#218. 다가오는 그림자 (2)
그 후 규민은 리허설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화장실을 두세 번 더 들락거렸다.
“너 공연 중에는 화장실 갈 시간 없는 거 알지?”
정 안 되면 대기용 화면을 스크린에 띄워 두고 다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화장실을 두 번 이상 가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또 그 정도의 위장 상태라면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기에도 무리가 있을 테고.
불안한 마음에 대체 묻자 규민이 남은 이온 음료를 남김없이 털어 마시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야, 이제 완전 다 나았거든? 얼굴 쌩쌩해진 거 안보이냐?”
글쎄다. 어제부터 화장실을 얼마나 많이 갔으면 한 3일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처럼 눈 밑이 퀭한데.
볼살만 야위었으면 오히려 좋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눈 밑에도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자리 잡는 바람에 메이크업을 평소보다 진하게 해서 가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안색이 살짝 창백한 느낌이 되기는 했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괜히 공연 중에 쓰러지면 우리도 우리지만 팬분들도 트라우마 남을 사건일걸.”
“아 진짜 괜찮다니까!”
규민이 재차 호언장담을 하고 나서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긴 한데.’
뭐 목청이 저만큼 돌아온 거 보면 말마따나 괜찮아진 건 맞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과 달리 규민은 무사히 일정을 소화해 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엔카운터였습니다! 유어 뉴 유니버스!”
“엔카운터!”
“다음에 또 만나요!”
“감사합니다!”
목청 높여 감사 인사를 드리고 2일 차 공연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풀려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죽겠다….”
“진짜 힘들었어….”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주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덥냐….”
“…얼른 들어가서 씻고 싶어요.”
그도 그럴 것이 무대 위에서는 에어컨이 소용없어지는 탓에 다들 보송보송 프라이머나 케어용품으로 땀을 말려 놓은 곳을 제외하고는 샤워를 한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지금 날씨면 이 정도는 아닌데.’
이제는 분장이 지워져도 괜찮으니 다들 물티슈며 키친타월이며 벅벅 문질러 가며 닦아 내고 있지만 이대로는 곧 각자의 찌든 냄새에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다.
“저희 이제 바로 호텔로 돌아가는 거죠?”
하나둘 뒷정리를 하는 사이 내가 냉큼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매니저에게 묻자 영인이 등 뒤로 비난을 날렸다.
“헐 형 언제 가서 세수하고 왔어요? 나도 하고 올걸.”
내가 바둥바둥 영인의 입을 틀어막고 손등을 살짝 꼬집는 사이 매니저가 겨우 마음이 놓인 듯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차량 대기 중이니까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돼요. 얼마 안 되긴 하는데 팬분들도 몇 분 대기 중이라고 하니까 다들 너무 풀어져 있진 마시….”
그리고 그 순간 눈가를 메이크업 리무버도 아니고 그냥 물티슈로 벅벅 문대고 있던 은찬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앗.”
“아아….”
“헛.”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요, 멤버 한 명 정도 선글라스 끼고 있는다고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내가 부랴부랴 간이 가방에 따로 챙겨 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주자 은찬이 쭈뼛거리다가 냉큼 받아 들었다.
“고, 고마워.”
“별거 아닌데요. 뭘.”
나도 봐서 컨디션 너무 안 좋아 보인다 싶으면 쓰려고 가져온 건데. 다행히 조금 지쳐 보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뭐 쓸모가 없어진 김에 나눠 줘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은찬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우르르 주차장으로 이동하자 미리 들은 대로 십수 명이 주차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확실히 국내 공연에 비하면 수가 좀 적기는 한 것 같기도.’
국내 공연이 끝났을 때 출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던 수백 명의 인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정말 양반에 가까웠다.
수가 많지 않은 만큼 잠깐 들러서 사인이라도 해 드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번진 화장 자국이 선글라스 밖으로도 살짝 삐져나와 있는 은찬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잘 티가 안 나는 수준이긴 하다만. 나만 사인을 해 줄 수도 없고 다 같이 이 길바닥에서 시간을 지체하다 보면 은찬을 유심히 보는 팬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그러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정은찬 성격에 별로 기분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다들 땀에 절어 있어서 냄새가 날까 봐 걱정이 되는 것도 있으니 아쉽지만 지금은 몸을 사릴 때였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봬요!”
시큐리티의 도움을 받아 팬분들께 지나가며 인사를 하고 차량에 올라타니 냉큼 조수석에 앉은 혜성이 창문을 내렸다.
“……?”
나도 모르게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혜성이 멋쩍게 웃었다.
“아, 혹시라도 냄새, 날까 봐….”
그러고는 드르륵 다시 창문을 닫았다. 다행히 차량 내부의 에어컨은 성능이 무척 좋았고 다들 불쾌한 경험을 하기 전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내일 봬요, 형!”
1층에서 매니저와 작별하고 우리가 머무는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자 다들 한결 풀어진 얼굴이 되어있었다.
“아 드디어 끝났다….”
규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은찬이 지적했다.
“끝나긴. 투어 이제 절반도 못 왔는데.”
그러자 규민이 무슨 소리냐는 듯 삐죽 입술을 내밀며 대답했다.
“그래도 저희 필리핀 일정은 다 끝났잖아요? 이제 이틀 쉬다가 쇼핑센터 가서 사인회 하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엥?”
“음?”
규민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물음표가 튀어나왔다. 나는 규민이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 보니 뭔가 착각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끼어들었다.
“우리 이틀 연달아 쉬는 거 아니잖아, 모레 MV랑 화보 촬영 있는데?”
“응?”
“……?”
“잠깐만 그거 태국 가서 찍는 거 아니었어?”
역시나 완전 착각하고 있었군. 진실을 알게 된 규민의 얼굴이 순간 절망으로 물들었으나 아쉽게도 적극적으로 위로해 줄 기력이 남은 멤버가 없었다. 영인만 한두 마디 말을 던져 규민을 놀렸다.
“아무튼 내일은 푹 쉬다가 이동이니까. 다들 들어가서 쉬어.”
그렇게 반씩 나뉘어 방으로 들어오고 나니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계속 이렇게 우중충한 분위기로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지.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머리 위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먼저 씻을 사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안 내면 진 거….”
“아악, 잠깐만 잠깐만!”
“헉!”
“가위, 바위, 보!”
다행히 깔끔하게 승패가 갈렸다. 나의 승리였다. 얼른 욕실로 튀어 버려야지.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챙겨서 수건과 함께 쏙 욕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서브 에피소드 미션 ▷ 믿을 수 있는 동료]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간만에 미션 창이 튀어나왔다.
‘그동안은 리퀘스트더니만 이번에는 그냥 서브 에피소드네’
단순히 보고 있는 구독자의 사심 섞인 욕구가 아니라 뭔가 진행과 관련이 된 내용이라는 건가? 곰곰 고민하던 찰나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될 듯도 하고 확신은 서지 않았다.
‘믿을 수 있다… 는 걸 보면 혹시 멤버들 관련 문제인가.’
그거라면 제일 신경 쓰이는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규민의 계약 건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정말 없는데 괜히 미션 수락했다가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하지만 발생한 퀘스트에 대해 내게 거부권은 없었다.
버튼은 사실상 형식이나 마찬가지고…. 이미 알아 버린 건 알아 버린 거고 혹시나 퀘스트가 규민의 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는 않으려나.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상세한 미션 내용이 나타났다.
[24시간 이내로 등장인물 ‘이규민’의 고민을 듣고 상담해 줄 것]
[잔여 제한 시간 23:59:59]
아오 역시나잖아. 해결해 줄 필요까진 없고 상담만 해 주면 되는 거라면 나쁘지 않…까지 생각하기도 잠시.
그래서 규민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가 제일 난관이었다.
너 아픈 동안에 내가 어쩌다 보니 문자를 봐서… 로 말문을 텄다가는 규민의 자존심에 얌전히 있을 리 없었다.
진지한 고민 상담은커녕 오히려 네가 봤을 땐 내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 어차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고 길길이 날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에서 서로 어느 정도…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말할 수 있으니 잠잠해졌지만.
‘겟 데뷔 초반만 해도 나한테 좀 자격지심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안 그럴지도 모른다고 한들, 괜히 역린을 건드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상의를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 얘기했겠지. 얌전히 입 닫고 있었던 것을 보면 멤버들에게도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필 그걸 우연히 본 게 나라고 하면… 썩 바람직한 그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곤란한데….’
내일이 아무리 휴일이라지만 24시간 안에 마무리를 짓긴 어려울 듯하니 나는 우선 쓰지 않고 남겨 두었던 아이템부터 사용했다.
[제한 시간 연장 키트]
[등급] A
[제한 시간 연장을 희망하는 미션의 제한 시간을 최대 7일까지 연장 가능.]
[사용할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아이템 목록]
[▷제한 시간 연장 키트]
[▶제한 시간 연장 키트]
곧바로 사용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현재 수행 중인 서브 미션의 제한 시간이 연장되었다.
‘그럼 일단 태국으로 넘어갈 때까지로 시간은 연장됐고….’
내일 슬쩍 분위기를 보면서 탐색해 보고 코인도 꽤 남아 있으니 봐서 뽑기를 더 돌려 볼까.
곰곰 생각하고 있으려니 밖에서 곧장 항의가 들이닥쳤다.
“야 안에서 뭐 해? 왜 물소리가 안 들려?”
내 다음 타자가 규민이었는지 구시렁거리는 잔소리였다.
“변태냐? 왜 남이 씻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나도 모르게 경멸이 담긴 문장이 튀어 나간 순간 규민이 보이지는 않지만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미친 소리야. 욕실이랑 침대가 바로 붙어 있는데 물 쓰는 소리가 안 들리니까 그렇지. 이상한 관리 같은 거 하지 말고 빨리 씻고 나와!”
이상한 관리라니. 지원에게서 나눠 받은 팩을 써 보겠다고 숙소 공용화장실에서 한번 난리를 친 적 있던 것 때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었다.
“됐으니까 신경 꺼. 알아서 나갈게!”
문밖으로 소리치고 나니 일단은 씻는 게 먼저였다.
말끔하게 남은 메이크업과 먼지, 땀을 씻어 내고 보송해진 채로 나오자 그저 평화로웠다.
“아 에어컨 좋다.”
푹 퍼진 얼굴의 지원이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어 미소가 지어지기도 잠시.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지….’
규민을 어떻게 구슬려 볼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