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엇갈리는 길 (2)
‘또 단서로….’
또 비슷한 방법으로 회유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절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건 또 뭐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야만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
뭐 비교적 무난한 미션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어서 나는 흔쾌히 수락 버튼을 눌렀다.
[서브 리퀘스트 미션 ▷ 각자의 사정]
[각 멤버들의 해체 후 활동 방향에 대해 조사할 것] (2/7)
[- 이규민(완료)]
[- 표영인(완료)]
[- 제현호]
[- 유지원]
[- 박하연]
[- 정은찬]
[- 주혜성]
예상한 대로 귀찮은 미션이 맞았다. 이제 계약 기간도 절반밖에 안 남은 만큼 이런 화제로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도 좀 너무 전원한테 캐묻고 다니면 그것대로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조사하고 다니는 티는 안 내되 계획을 알아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일단 각자 따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을 만들어야 할 거고.’
중형 이상의 소속사에 속해 있는 멤버들은 나름의 대외비라고 꽁꽁 숨기고 알려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단 두 명은 미리 선달성이 되어 있어서 다행인가. 그다음으로 누구를 우선 조사해 봐야 할지는 그리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원이는 그냥 내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줄 것 같은데.’
의심은커녕 그동안 폐가 될까 봐 다른 멤버들에게 상담 요청도 못 했던 걸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 줘서 고마워할지도. 지원의 평소 성격이나 행동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럼 우선 쉬울 만한 녀석들부터 공략해 보자.’
제일 먼저 유지원, 그다음이 제현호려나. 제현호도 어쩌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창 고민하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사가 워낙에 작기도 해서 제대로 된 데뷔를 지원해 줄지 미지수였으니까.
‘음….’
머릿속으로 열심히 순번을 굴려 본 끝에 어렵지 않게 순서를 정할 수 있었다.
우선 지원이랑 현호부터 물어보고, 그다음에 주혜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몬 콤비들을 공략해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이들 중 제일 난관이 예상되는 건 단연 크몬 콤비였다.
‘의외로 쉽게 얘기해 줄 수도 있겠다만.’
희망편을 기대하고 계획을 짜는 건 솔직히 무모하고. 말해 주지 않을 때가 제일 문제였다. 같이 한배를 탔던 사이에 뭐 그렇게 대단한 기밀이냐고 좀 알려 줘, 졸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니까.
일단 다른 멤버들 반응을 보면서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봤다가 경험치를 좀 쌓고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뭘 했다고 벌써 3시야.’
머릿속으로 찬찬히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다 불쑥 핸드폰 화면을 보니 벌써 늦은 밤을 지나 새벽이 한참이었다.
내일 퀭한 얼굴로 공항에 나타났다가 ‘서인수 얼굴 삭은 거 봐라 얘도 슬슬 눈 맛 가는 듯’ 같은 악플 테러를 받고 싶지 않다면 눈을 붙여야 했다.
‘내일 바로 또 출국하고…. 바쁘다, 바빠.’
그러는 사이 분식점 사장님께 전화를 해 보겠다는 계획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눈앞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 조금은 미뤄도 되는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게 원래 사람 본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안 나는데 어떡하냐고.’
투덜투덜하는 사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하자.’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나도 피로가 겹쳐서 사고가 이성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숨 깊이 자고 다시 생각하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조식을 먹고 나가려면 서둘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 좀 일찍 깨워 주지!”
“그럼 네가 알아서 알람 맞춰 놓고 잤어야지.”
“항상 네가 챙겨 줬잖아.”
“맡겨 놨냐?”
규민과 입씨름을 하며 식당으로 내려가자 매니저는 물론 동행한 다른 스태프와 옆방 멤버들도 내려와서 우물우물 접시에 쌓아 둔 음식을 먹고 있었다.
조식은 더운 나라에서 먹는 음식답게 불에 굽거나 찐 것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날것으로 먹으면 쉽게 상하거나 변질될 수 있어서인가?
생으로 먹는 건 과일과 샐러드 한 종류뿐이었다.
‘샐러드에 과일만 조금 먹을까….’
아침을 원래 거하게 먹는 편이 아니라서 속쓰림을 가시게 할 정도만 깨작거리고 있으려니 영인이 엄청난 양의 볶음밥과 고기 요리를 접시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너 그거 다 먹을 거야? 진심으로?”
내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묻자 영인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 이번 주 내내 엄청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으려고요!”
고생은 너만 했냐. 우리 모두 다 같이했지. 마음 같아서는 접시를 빼앗고 싶었으나 이미 담아 온 음식을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음 숙소에서부터는 제대로 관리해야 해. 우리가 지금 시차 적응하랴, 날씨 적응하랴 그냥 피곤해서 칼로리를 많이 태운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극기 훈련을 온 게 아니야.”
내가 줄줄 앞에 접시를 늘어놓고 잔소리를 하자 규민이 날름 영인의 귀를 막아 주며 말했다.
“야 어차피 먹일 건데 잔소리는 먹고 나서 해라, 먹고 나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인의 접시에서 큼직한 고기 한 덩이를 가져가는 게 어이가 없었다.
“엇, 아니 형 잠깐만요!”
규민에게 뭉클 감동받은 얼굴을 하고 있던 영인이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그러게 순진하게 규민을 믿고 있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순수하게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라.”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간단한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오늘 낮 비행기였던가.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자 생각한 것보다 많이 어둑어둑했다. 이제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닌데도.
“오늘 해가 늦게 떴나? 왜 이렇게 아직도 새벽인 것 같지?”
그도 그럴 게 여기서 머무는 내내 아침 10시면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라 작열하는 햇볕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가 막 뜬 직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우중충했다. 우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려니 매니저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오늘 이따 세 시쯤부터 큰비가 내릴 예정이래요. 저희가 그 안에는 출발하니까 지장은 없을 것 같아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날씨 좋을 때 화보도 다 찍었고 비행기도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뜬다니 타이밍 참 잘 잡은 거지.
주섬주섬 다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싸고 있으려니 하늘이 점점 더 본격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우리 비행기 뜨기 전부터 쏟아지는 거 아니야?”
불쑥 규민이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나는 규민의 등짝을 가볍게 쳤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 말이 씨가 될라.”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대로 실현되고 말았다.
“어…. 예보보다 일찍 쏟아지네요. 여기는 육로로 이동할 수도 없는데….”
아직 비행편이 캔슬되었다는 소식은 없었으나 앞 스케줄이 실시간으로 줄줄이 지연되고 있었다. 공항에 내리는 것도 뜨는 것도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공항으로 이동해 있죠. 갑자기 정시 스케줄로 당겨지거나 하면 낭패니까요.”
이미 호텔도 체크아웃을 해 버린 상태라 계속 다른 고객들도 오가는 로비에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예정대로 현지 가이드의 차를 빌려서 공항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와….”
공항이 마비되면서 발이 묶인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난리 통을 이루고 있었다.
급히 매니저가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는 듯했다. 추가로 비용을 내겠다고 해도 이미 사용하고 있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 추가 입장이 불가능하다나.
결국 어쩔 수 없이 미리 배정된 게이트 앞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계속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어 댔다.
“음….”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거나 사인에 응해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비행편은 계속 20분, 30분씩 밀리고 언제 정말 출발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지. 점점 사람들은 몰리지 피로가 쌓였다.
“와 진짜네? 대박!”
“아 어떡해, 다들 캐리어 다른 거 쓰는 거 너무 귀엽다.”
“봤어? 지원이 방금 하품한 거 찍었다? 완전 귀엽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국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계속 지켜보는 와중, 계속 피로만 더해지는 채로 대기해야 하니 다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래서야 꼭….’
머릿속으로 무심코 생각한 것을 툭, 영인이 단체 대화방에 올렸다.
[Young]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아요 오후 3:43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지 공감하는 듯한 표정의 이모티콘만 죽죽 쌓였다. 괜히 타자를 치다가 그것까지도 줌 화면에 걸려서 인터넷 같은 데 뿌려지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서.
평소에 팬분들과 마주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스케줄일 때는 미리 대비를 하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해질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우리가 뭐 간단히 공연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토크 쇼나 짧은 미니 팬 미팅 같은 건 더더욱 무리일뿐더러 주위가 너무 시끄럽고 사람이 가득해서 이렇게 앉아서 숨을 죽이는 게 고작이었다.
뭘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에 수많은 눈동자가 우리를 찍고 바라보고 있다는 압박감이 꽤 부담스러웠다.
지금 실시간으로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만 하나, 둘, 셋 넷… 그 외에 핸드폰을 사용하는 척하면서 계속 녹화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도 있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줌 화면에 찍히면 안 되니까 편하게 핸드폰을 할 수도 없고….’
답답해하던 찰나, 겨우 4시간 만에 스케줄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장 4시간 반의 대기 끝에 탑승을 시작한다는 안내 멘트가 천장에서 흘러나왔다.
“와!”
“드디어!”
“아까 밥 먹은 거 먹은 거 벌써 다 꺼졌어….”
다들 진이 빠진 채로 비행기에 올라타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 공항 도착하면 바로 숙소 들어가서 식사부터 할게요. 리허설은 내일 아침에 좀 일찍 당겨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내일부터 바로 다시 콘서트 일정이었다.
‘정말 쉴 틈을 안 준다, 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