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6화 (16/200)

16. VIP

“한신 은행 지점장이시라고요?”

“예. 고객님. 맞습니다.”

한신 은행 동천지점이라면 틀림없이 내가 계좌를 튼 지점이고, 여태껏 거래를 하는 곳이다.

세상이 하도 흉흉해 사방에 사기꾼들이 천지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덫을 던지는 그들이 이런 정보까진 알 수는 없다.

저쪽에서 밝힌 신분이 진짜라는 것.

그런데 행원도 아니고 지점장이 직접 전화?

그 사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 계좌로 입금된 거액의 돈.

무슨 탈이라도 난 걸까?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겁낼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에 문제가 있었다면 검경 혹은 금감원이나 국세청에서 연락이 올 것이지 은행에서, 그것도 거래 지점에서 전화가 올 리 만무하다.

어설픈 대리인에게 일을 맡긴 것도 아니다.

무려 광월의 변호사가 처리를 했다.

실수가 있었을 리 없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라도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다.

지점장의 반응은 역시나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문제라니요.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다만 저희 은행의 VIP인 한영수 고객님을 지점장으로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요.”

재밌네.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 내 차례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려만 봤지, 그들로부터 VIP 대접을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 한영수의 키는 그대로지만, 돈이 벌써 나를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거 전화상으로 말씀 나눌 것이 아니라 한번 꼭 뵈었으면 하는데요. 당연히 제가 고객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 인사드리는 게 도리이나··· 혹여 괜찮다면 저희 지점으로 방문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글쎄요. 은행은 네 시면 문을 닫지 않습니까.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 내기가 빠듯합니다.”

흘낏 회사 복도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네 시는커녕 이미 시침이 숫자 6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객님께서 지점을 방문만 해주신다면 제 사무실에 불을 켜놓겠습니다. 혹시 오늘은 어떠십니까.”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은행을 방문해서 처리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

“고객님 반갑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렸던 황기욱입니다.”

지점장은 나에게 악수부터 건넸다.

야근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나는 칼퇴 후 바로 은행을 찾았다.

지점장은 은행 앞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곱게 빗어넘긴 머리, 그의 늘씬한 체형에 잘 어울리는 멋을 낸 옷차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지 외견상 보이는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황기욱 지점장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젊은 엘리트의 전형이었다.

“문이 닫혀있네요”

당연한 소리지만 은행 출입구의 셔터는 누구에게도 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기는 일반 고객님들을 위한 곳이죠. 한영수 고객님을 위한 출입구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를 따라 은행 뒤쪽으로 돌아가자 지점장실로 바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고객님. 우선 이것 받아주시겠습니까? 저희 동천지점이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지점장이 내게 선물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뭡니까? 이게.”

“와인입니다. 부끄럽지만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종일관 지점장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아무리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을 향해서도 저렇게 웃기는 쉽지 않을 듯싶었다.

“이거, 얼굴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 분이 대단한 자산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실 저희 지점에 이렇게 거액이 한번에 이체된 건 개점 이래 처음입니다. 보고받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결례가 아니라면 혹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직장인입니다. 평범한.”

“하하하.”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황기욱 지점장이 기름진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숨기려고 하시니 이거··· 지점장이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도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자금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리가요! 혹시 제 말이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지점장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더니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과장된 어조로 사과했다.

“돈의 출처에 대해서야 감히 제가 캐물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고객님께서 설마하니 범죄에 연루되셨을 리도 없고···”

입과 눈이 따로 논다.

지점장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가늘게 뜬 눈은 제법 날카롭게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 자리까지 온 사람이다. 결코 만만한 나이롱은 아닐 것이다.

“깨끗한 돈입니다. 그 이상 말씀드릴 게 없을 것 같네요.”

”하하하! 그럼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은 고객님 자산의 미래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분명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영업이군.

가면을 쓴 이 남자는 나에게 뭘 팔아넘기려는 걸까.

“와인까지 선물해 주셨는데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당연히 들어봐야죠.”

“고객님. 이 정도의 자산을 모으셨다면 이젠 도전보다는 안정을 택할 시기입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시기엔 말이죠. 분명히 고객님께서는 돈에 대해서는 프로이시겠죠. 고객님의 돈. 저희 은행을 믿고 맡겨주십시오. 우대금리 조건이 어떠니 하는 아마추어 같은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지점장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리 한영수 고객님 같은 현금보유자에겐 금리 인상이 더할 나위 없는 호재입니다. 저희 지점 최고 이율 4.8%에 제 권한으로 0.6% 더 붙여서 연이율 5.4%로 맞춰드리겠습니다. 10년 만기로요.”

“5.4%. 확실히 나쁘진 않군요. 당연히 변동금리겠지요?”

“고정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율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변동금리가 맞지요.”

사실 정말 나쁘지 않아 보이는 조건이었다.

우수리를 떼고 500억을 묻는다 치면 매년 이자만 27억이다.

10년 동안 매해 로또를 한두 번씩 맞는 셈.

그뿐인가, 무엇보다 은행이 망하지 않는다면 내 원금은 고스란히 보전된다.

생활만 하고자 하면 당장 저 거금이 묶여있더라도 월세 수익만으로도 충당할 수 있다.

지점장의 말은 쉼 없이 이어졌다.

“미국발 금리 인상 릴레이는 계속될 겁니다. 그 여파를 현물 시장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부동산도 어디가 바닥일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는 현금 보유가 맞습니다. 더불어 안정적인 이자로 부가 수익을 올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요컨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거라는 말.

하지만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은행도 결국 돈이라는 상품으로 장사를 하는 곳이다.

장사의 본성은 이기심이다.

이 자가 결코 이유가 없는 선의를 나에게 베풀 리가 없다.

내가 은행에 돈을 예탁한다면 그것은 대출의 형태로 잘게 쪼개져 세상으로 뿌려질 것이다.

은행은 그 대출금리를 얼마로 잡을까?

확실한 건 나에게 약속한 5.4% 이상일 거라는 거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고금리일지언정 1금융권이라면 돈을 빌리고 싶어 목을 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10년이라는 기간.

그 긴 시간 동안 돈을 묶어두는 것이 지점장의 말처럼 유일한 답안지일까?

- 이 사람들아! 지금이 바닥이야! 남들이 다 주워가게 그대로 둘 거야?

문득 장 회장이 IMF 시절 했다는 도전적인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점장님. 주식 장은 그렇다 치고, 부동산 시장도 그렇게 안 좋습니까?”

“물론입니다. 눈만 뜨면 아파트값이 하락하고 있다고 기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더 심각한 건 건물들이죠. 건물 담보대출은 아파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금액이 작아도 수억, 크게는 수십억입니다. 최근에 담보대출을 조기 상환해버리는 고객님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금리상승을 계속 말씀하시는데, 건물주들이 대출이자가 감당이 안 되니 가지고 있던 건물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던졌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매각해서 나온 돈으로 대출 상환금을 때우고.”

“정확하십니다. 아차 하다가 경매로 넘어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값을 받을 수 있을 때 정리를 하시는 겁니다. 부동산이 호시절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죠.”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긍정적 신호로 읽었는지 지점장은 더욱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고객님. 거액의 자산에 저희처럼 좋은 조건을 제시할 곳은 없다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지점장님···”

“예. 말씀하세요.”

“지점장님 말씀을 가만히 듣자니, 오히려 부동산을 사기에는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이 존버를 포기하고 던지기 시작할 때, 그때가 바로 진입타이밍 아니던가.

시장이 움직이는 가장 간단한 원리 중 하나이다.

승리를 확신하던 지점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가면에 처음으로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이다.

“··· 글쎄요. 지금의 하락추세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예측이 어렵습니다. 자칫 떨어지는 칼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버틸 수 있는 총알이 충분합니다. 주가는 출렁여도 부동산의 우상향은 역사가 증명한다고 하던데요? 제 말이 틀린 건가요, 지점장님?“

황기욱 지점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부러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10년은 너무 길군요. 중간에 해약이라도 하게 된다면 약속하신 이자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텐데··· 그래도 지점장님을 믿고 50억 정도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지점장님이 보시기에 너무 적은 돈인가요?”

“··· 아닙니다. 고객님. 그럴 리가요.”

황 지점장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90도로 인사를 했다.

“고객님의 귀중한 돈을 저희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50억.

이 정도는 만에 하나 내가 큰 실패를 겪게 될 때를 대비해 보험으로 맡겨둘 만하다.

“아. 그리고 지점장님. 제가 이체를 하고 싶은데 혹시 지금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필요하실까 봐 창구를 하나 열어두었습니다. 얼마를 보내시려고···”

“5억입니다. 자애 보육원이란 곳의 후원 계좌에 무기명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부군요. 좋은 일도 하시고, 세금도 아끼시고.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점장을 바라보았다.

*

일찍 퇴근한 김에 헬스장에서 근육을 제대로 찢어보려다 핸들을 돌렸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나의 불알친구 이승우.

남에게 밥을 해주느라 제 밥은 굶기 일쑤인 그에게 불현듯 맛난 저녁을 사주고 싶었다.

승우가 자애 보육원에 온 것은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내가 부모의 얼굴조차 몰랐다면, 반대로 승우는 부모의 얼굴을 잊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모친은 승우가 엄마 젖을 떼기가 무섭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매일 같이 승우를 가혹하게 매질하던 부친은 한겨울에 진탕 술을 마시고 길에서 얼어 죽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보육원에 온 첫날 푸른 멍으로 뒤덮여있던 승우의 몸을.

서로 많은 점이 달랐지만 우리는 한 쌍의 나무젓가락처럼 서로에게 의지했었다.

어른이 되어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진 후에도 승우는 불쑥 내가 사는 곳을 찾아와 굶지 말라며 밥을 차려주곤 했었다.

“이 자식, 전화를 왜  이리 안 받아.”

승우가 일하는 중화요리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저녁 막판 손님맞이로 바쁜 모양.

7시 40분.

녀석의 퇴근 시간이 8시 즈음이니 금방 볼 수 있으리라.

차 안에 가만히 눌러 앉아있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라 나는 근처 공터에 주차하고 승우가 일하는 가게 ‘공화루’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 어머! 영수 씨 말도 없이 웬일이야!”

그렇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콧소리가 잔뜩 섞여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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