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8화 (18/200)

18. 나도 명품 하나 사볼까

“한영수 대리님. 그리고 김영하 주임님. 저희 정실 전자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사의 로고가 오른쪽 가슴에 새겨진 공장 잠바를 입고 정실 전자의 이신재 사장은 주차장까지 우리를 따라 나와 배웅했다.

오늘은 정실 전자와 미팅이 있었던 날.

직원 수는 50명 남짓. 공장과 그 옆에 작게 딸린 사무실까지 합해 부지가 100평이나 될까 한 작은 회사였지만, 공장의 기계들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직원들의 표정도 한결같이 밝았다.

다만 재무제표상 순이익은 작년과 비교해서 다소 줄어들었는데, 재무값은 늘어나고 있다.

이건 은행 대출이 늘고 있다는 뜻.

그 이유야 정실 전자의 속사정이니 내가 함부로 단언 할 수 없지만.

“면목 없지만, 지금 회사 사정이 넉넉지는 않습니다. 사장이 되어서 직원들 월급은 빠트리지 말고 챙겨줘야지 않겠습니까. 저희 회사, 작지만 내실이 있습니다. 납품 맡겨주시면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 사장은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아귀힘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작은 키에 머리는 반쯤 다 벗겨진 50대 중년의 남자.

검게 탄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를 제 나이보다 훨씬 겉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사장의 손톱에는 기름때가 잔뜩 끼어있었다.

갑이 을이 되고, 또 그 을이 누군가에겐 갑이 되기도 하는 요지경 같은 세상.

규모를 떠나 한 회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일개 중소기업 대리에 불과한 나에게 이리도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나는 이신재 사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말씀만 들어보려고 온 것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습니다. 일단 회사에는 긍정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면서 서로 조건을 맞춰봐야죠.”

“예. 다음에는 여기가 아니라 제가 좋은 곳에서 모시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사장은 친정집을 나서는 딸이라도 보는 것처럼 우리가 공장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어때 보여?”

조수석에서 안전띠를 매며 김영하에게 물었다.

“글쎄요. 페이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회사 규모가 조금 작은 거 같은데요? 걱정이네요. 납품하게 되면 저쪽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까요?”

“작년에 램프 생산량이 얼마나 되었지?”

“4만 개요.”

“CAPEX(자본적 지출)는?”

“작년에는 8억 규모였고요, 올해는 많이 줄었던데··· 4억, 5억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투자에 돈을 아끼는 것 보니까 현금 사정이 어려운 모양이다. 분명히 기존에 정실 전자와 납품 계약이 끝난 곳이 있을 테지. 계약이 급한 건 저쪽이니까 물량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한번 준비 잘해봐.”

“예. 선배님.”

김영하는 잠시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선배님. 정실 기업 사장 말이에요. 명색이 사장 타이틀 달고 있는데 사람이 좀 추레하지 않아요?”

“왜? 손이 지저분해 보이기라도 했니?”

뜨끔했는지 김영하의 입술이 삐쭉 나왔다.

“아니, 뭐··· 기름때가 잔뜩 묻어있으니까.”

“그런 손이야말로 일하는 손이고, 정직한 손이지. 나는 머릿속에 골프 치러 나갈 생각만 하는 사장들보다 훨씬 나아 보이더라. 사장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밑에 직원들이 놀 수 있겠어?”

“선배님 말씀이 또 듣고 보니까 맞네요.”

김영하는 기어봉에서 손을 떼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나저나 선배님. 예리 씨 말이에요. 선배님한테 관심이 많은 거 같던데.”

“관심? 무슨 관심.”

“선배님이 자리에 안 계실 때도 있잖아요. 선배님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눈이 반짝반짝하던데요. 제가 봤을 때는 100% 선배님 좋아하는 겁니다. 걔.”

“쓸데없는 소리.”

“아··· 나도 하루만 우리 한 대리님 얼굴로 살아봤으면 좋겠다.”

사실 그 낌새는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최예리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대놓고 얼굴에 쓰여있는데 나름 눈치가 빠르다는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꼭 같은 사무실 밥을 먹는 처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최예리는 분명 매력이 있는 여자다.

귀염 상의 외모에 싹싹한 성격. 분명히 연애도 최선을 다해서 할 스타일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최예리에 대한 감정을 굳이 말로 표현해 보자면 챙겨주고 싶은 동생 정도?

“선배님 한번 잘 해봐요. 예리 씨 정도면 귀엽고 괜찮지.”

“그런 거 아니야. 아마 예리 씨는 내가 자기 일 같은 것도 많이 도와주고 하니까 날 좋은 선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니, 진짜 그런 느낌이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혹시라도 예리 씨한테 괜한 바람 같은 거 넣지 말고.”

왜 생각이라는 것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할까?

최예리 이야기를 하는데 내 머릿속에는 고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금요일.

내일 저녁에는 고윤아를 만나기로 했었지···

호기심이 자꾸만 생기는 여자다.

화려한 스펙 속에 감춰진 그녀만의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

토요일.

차를 끌고 문산 아파트로 향했다.

서류상으로 그 아파트가 아무리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 ME ME WE GANGNAM

“오··· 마세라*에다, 저건 람보르기*···”

강변북로에서 빠져나와 동호대교를 타고 압구정동에 들어서자 대문짝만하게 써 놓은 강남구의 슬로건과 함께 두 눈에 치이도록 많은 고급 외제 차들이 보였다.

그것들의 숫자가 길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내 차, 아반*보다도 많을 정도.

마치 여기는 별천지, 다른 세상인 것만 같았다.

문산 아파트는 압구정역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입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설치된 차단막이 나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단기에 달린 호출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경비원 한 명이 슬슬 다가왔다.

경비원이라고 하면 연세 많으신 분들이 당연히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곳의 경비원은 유니폼부터 무슨 보안업체의 직원을 연상케 하는 젊은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아파트 좀 보려고 하는데요.”

“방문하시는 호수가 어떻게 되십니까.”

내 차를 마뜩잖은 눈으로 슬쩍 확인하더니, 경비원은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말만 존대지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다.

나를 무슨 잡상인으로 보는 듯한 눈빛.

“4동 1006호요. 그런데 제가 거기 사시는 분을 뵈러 온 건 아니고···”

“주민분들과 방문자분 아니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경비원은 내 말꼬리를 자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거기 사시는 분은 월세로 계시는 거고 제가 그 집의 주인인데 단지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겁니까?”

“··· 예?”

“문산 아파트 15차. 4동 1006호 말입니다. 제 소유라고요.”

마술처럼 경비원의 태도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은 어느새 공손하게 모여 있었다.

“혹시 성함을 한 번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한영수요.”

경비원은 허리를 굽혀 구부정한 자세로 단말기를 꺼내 무언가 두들겨보더니 나를 향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확인했습니다. 차량이 등록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알겠습니다. 일단 이 차단막이나 좀 올려주시겠어요? 제 뒤에 기다리는 차도 밀려있는데.”

“예, 예!”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저 사람도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아까 길가에서 보았던 억 소리 나는 차들을 타고 여기 왔다면 대접이 달랐을까?

어찌하랴, 세상이 이런 것을.

한 사람의 알맹이보다 걸치고 있는 것이 먼저 보는 것이 세상의 눈 아니던가.

30억을 호가한다는 말이 우습게 아파트의 외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것과 같았다.

아니, 오히려 요즘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들에 비하면 턱없이 칙칙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물론 엄청난 부자들만 사는 곳이니 내부 인테리어는 입이 떡 벌어지게 해놨겠지만.

한 달에 월세 500. 그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나처럼 눈뜨고 나니 벼락부자가 된 것도 아닐 텐데.

아무튼 어린 시절, 서울 땅 어딘가에 내 자리를 꼭 마련하겠다는 꿈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래. 내 눈으로 봤으면 된 거지.”

나는 세워놓았던 차에 올라타 단지를 빠져나왔다.

저 멀리서 아까 나를 제지하던 경비원이 부리나케 뛰어나와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압구정역을 지나치자 도로 오른쪽으로 태상 백화점이 보였다.

태상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태상 백화점은 장영복 회장의 딸, 나와는 배다른 오누이인 장은우가 회장 자리에 있었다.

아직도 태상의 새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백화점의 회장 역시도 그 대권을 노리고 있을까?

태상 백화점의 많은 지점 중 하나인 압구정점은 다른 백화점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하이엔드 명품 판매장들이 입점해 있는 곳이다.

유통업계에서 최초로 명품관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니, 대한민국 명품 업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1평당 일 매출이 거의 천만 원이라고 하던가?

“생각해보니 아직 날 위해 뭘 산 게 없네.”

돈이 생기고 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입 안에 넣던 퍽퍽한 닭가슴살 대신 소고기 우둔살을 인터넷으로 좀 주문했을 뿐이다.

정신이 없었기도 했고, 당장 필요한 게 있지도 않아 뭘 따로 사진 않았다.

그런데 아까 일도 그렇고 갑자기 무언가 크게 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핸들을 돌려 백화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보통 백화점이라면 1층에 명품 매장들이 모두 모여있는 것에 비해, 여기 압구정점은 무려 1층부터 3층까지가 전부 명품 판매장들이었다.

나는 3층에 있는 남성 명품관을 소풍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익숙한 로고의 브랜드들이 절반쯤, 나머지 절반은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의 것들이었다.

“오데마피*? 시계 기가 막힌데?”

뭘 살지 곰곰이 고민하다, 시계를 하나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고무밴드의 카시* 시계는 그만 보내줄 때가 되었지.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멋진 시계가 하나 보이기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뭐야, 1억이 넘는다고? 미친 거 아니야?”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의 시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못 사지. 저걸 진짜로 실착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1억짜리 시계가 기스라도 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 매장을 순회하던 중 내 눈에 한 브랜드의 매장이 들어왔다.

“그래. 저거는 예전부터 내가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나는 소시민으로서 위축된 속마음을 숨긴 채 일부러 더 당당한 걸음걸이를 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로렉*입니다.”

모델처럼 잘 차려입은 점원이 나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가장 깊은 곳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