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9화 (19/200)

19. 가장 깊은 곳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매장의 입구는 마법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그것처럼 화려함을 뽐냈다.

천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화려함.

여기가 손 때 묻은 돈이 오가는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화랑(?廊)에라도 온 것 같았다.

“고객님. 이쪽으로.”

매장 안의 공간 대부분은 진열용 시계들이 도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자본주의가 낳은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콧대 놓게 뽐내는 것처럼.

친절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는 내 앞의 여직원도 말투와 행동거지가 판매사원이라기보다는 큐레이터에 가까웠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매대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작 매대 안에는 시계가 몇 개 남아 있지도 않았다.

“고객님. 지금 구매할 수 있으신 남성용 라인 제품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엔트리 모델입니다. 오이스터 38mm 구매 가능하시구요. 요트맨 40mm, 피드웰러 44mm가 남아 있습니다. 따로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십니까.”

“아, 그게···”

이게 전부?

요즘은 명품매장에 오픈런이라고 새벽부터 대기 줄을 서가며 물건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리셀. 수량이 한정된 물건을 사서 웃돈을 받고 되파는 행위.

리셀은 어느 순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고, 들불처럼 번진 이 개인들의 상거래는 전 국민을 영맨으로 만들기라도 할 기세였다.

되팔렘이라는 멸칭을 각오하면서까지 직업적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 수익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쏠쏠하고.

로렉*에서 내가 사고 싶었던 물건은 이 브랜드를 상징하는 대표 모델이기도 한 서브다이버.

물욕이 많다고 할 수도 없고, 명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이걸 고집하는 이유는 나름대로 사연 아닌 사연이 있다.

한창 사춘기의 정점을 찍고 흑역사를 쏟아내던 중학생 시절, 머리를 자르러 갔던 미용실에서 서브다이버를 처음 만났다.

사람이 많아 내 순서를 하릴없이 기다리던 중 우연히 남성 잡지를 펼쳤는데 거기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된 것이다.

- 가장 깊은 곳에서도 서브다이버는 멈추지 않습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심해를 유영하는 잠수부와 시계의 사진.

그리고 볼드체로 쓰여 있는 광고 문구.

고백하자니 부끄럽고, 손발이 다 오글거린다.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염세적인 성격이었다.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처해있던 환경에 더해 중 2병까지 도졌던 탓이리라.

그랬던 내게 깊은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저 시계가 마치 무저갱에서 날 꺼내 줄 티켓처럼 보였다.

물론 그 티켓이 얼마짜리인지 알지도 못하는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었지만, 그때의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혹시 서브다이버는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찾으시는 그 제품은 워낙 인기가 있는 모델이라··· 매장에 입고되는 즉시 손님분들께서 찾으셔서요.”

“그래요? 그럼 혹시 예약은 가능한가요.”

직원은 난처함과 미안함이 섞인 미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공손한 말투를 잊지 않으며.

“저희가 예약은 따로 받고 있지 않습니다. 고객님.”

“그래요? 그럼 요트맨, 저거 보여주시겠어요?”

검은 장갑을 낀 직원은 신생아 다루듯 조심조심 매대에서 시계를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40mm 콤비입니다. 3005무브를 사용하고 있고요. 대부분의 남자분들께서는 요트맨2를 많이 찾으시지만,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이쪽을 좋아하십니다.”

“가격이 어떻게 될까요?”

“1,796만 원입니다.”

역시나 만만치 않은 가격.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하고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거금을 한방에 태우는 것인데 그래도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걸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이 아니라면 굳이 로렉*여야 할 이유도 없다.

“아시다시피 저희 제품들은 해마다 가격이 오릅니다. 지금이 제일 좋은 가격으로 구하시는 겁니다.”

내가 망설이는 낯빛을 하고 있자 직원은 어서 구매하라고 격려라도 하듯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저는 서브다이버가 꼭 가지고 싶었거든요.”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은 애절한 눈빛을 직원에게 보냈다.

“아··· 그러시군요.”

몇 초 정도 직원의 눈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퍼뜩 고개를 숙이며 내 눈을 피한 직원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 고객님. 그러시면 잠시만 기다려보시겠어요?”

직원은 나를 남겨놓고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른 직원과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나에게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시계 상자가 하나 들려있었다.

”고객님, 정말 운이 좋으세요.“

그녀는 마치 자기가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는 올라가 있었다.

“방금 서브다이버 제품이 환불이 들어왔어요. 126613CB입니다. 제품군 중에서 젊은 층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라인업이구요.”

직원은 전면에 로렉*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고급스러운 포장 상자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와, 이거지.

추억보정을 감안하더라도, 시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뭐랄까, 오랜 세월동안 몸 속에 인이 박혀 있던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바다의 색이 떠오르는 푸른색 시계 몸통의 다이얼이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정말 멋지네요. 그런데 왜 환불이 들어왔을까요. 없어서 못 구한다는 걸.”

내 말에 직원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환불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고객님이 운이 좋으시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 손님은 오늘 오전에 급하게 사서 가셨는데, 그때도 걱정을 많이 하셨거든요. 사모님께서 알면 난리가 날 거라구요. 역시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혹시라도 물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저희가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이놈은 얼마일까요?”

“1,880만 원입니다.”

··· 아반*를 1,400만 원 주고 샀었는데.

이제 내 왼쪽 손목에는 자동차 한 대가 채워지는 건가.

“알겠습니다. 주세요. 제가 사겠습니다.”

*

고윤아와의 약속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백화점을 좀 더 돌아다녔다.

신부님과 승우에게 줄 선물로 하나씩 사고 내친김에 1층까지 내려왔다.

남성 코너와는 다르게 1층은 마치 여자들을 위한 놀이공원 같았다.

역시나 백화점의 주 고객층은 여성.

남성 코너들은 뭔가 여유로운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화려했고,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렸다.

고 변호사에게도 무언가 선물을 하나 할까.

자기 일처럼 내 일을 처리해준 게 고마웠기도 했고, 앞으로도 부탁할 일이 적지 않을 테니 소소한 뇌물 조의 의미라고 봐도 좋을.

“뭘 사줘야 하나.”

여자의 선물을 고르는 데는 좋은 말로라도 재주가 있다고 하기 어려운 나였다.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의가 없어 보이지도 않은 것을 고르려니 더더욱 고민이 되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뭐하나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별수 없이 나는 서 있던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구* 매장에 들어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 명품 브랜드.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대중적인 맛이라는 거니까 선물이 실패할 확률도 낮겠지.

가방까지는 굉장히 오바하는 것 같고 작은 액세서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것 있으신가요?”

“여자분에게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요. 30대 초반의 여자가 할만한 액세서리류도 있을까요.”

“그럼요. 고객님. 마침 목걸이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잘되었네요. 좀 보여주시겠어요?”

“예.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친절한 안내를 받아 반지와 목걸이가 진열된 액세서리 매대로 향했다.

“이건 어떠세요? 하트 펜던트 목걸이. 정말 귀엽지 않나요? 가장 인기 있는 모델 중 하나고, 오늘 때마침 입고되었어요. 캐쥬얼 복장에도 정말 잘 어울립니다.”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거라고 짐작이라도 한 걸까?

직원은 단박에 동그란 원에서 가운데가 폭파인 하트 목걸이를 추천했다.

고윤아의 희고 긴 목에 저 목걸이가 어울릴까?

글쎄. 별로 이미지가 매칭되진 않는다.

그때, 하트 펜던트 목걸이 옆에 다른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구*의 로고가 아주 작게 헤드로 달려있고, 체인도 얇게 빠져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저거는 어떤가요?”

“인터로킹 목걸이요. 스털링 실버 925로 제작이 되었고요. 실제로 착용하시면 굉장히 우아한 느낌이 듭니다.”

“이게 괜찮아 보이네요. 이걸로 하겠습니다. 포장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객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끝내고 매장을 나가려던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무전기를 든 백화점 보안요원의 입이 바빴고, 출입구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뭐, 유명 인사라도 방문하는 건가?

“저기요, 혹시 밖에 무슨 일 있나요?”

구*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아, 그게 오늘 장은우 회장님이 압구정점 방문 일정이 있으셔서요. 지금 도착하신 모양인데요?”

허. 장은우 회장이라고?

이건 또 무슨 지독한 우연이란 말인가.

골드미스의 상징이라며 뭇 여성들의 부러움과 탄성을 자아내는 여자.

대한민국 문화계의 큰 손이라고 불리는 여자.

그리고 장 회장의 딸이자, 나와는 반쪽일망정 피가 섞인 여자.

기껏해야 기사를 통해 봤을 뿐이지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달랐기에 유니콘과 같은 환상의 동물과 다를 바 없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장은우를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마주쳐서 좋을 건 없겠지.

자리를 피하려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제기랄, 내가 왜 도망을 쳐야 하지?

태상의 자녀들에게는 지우고 싶은 얼룩일지 모르지만, 나는 죄인이 아니다.

장영복 회장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걸 알기 전에도 떳떳하게 살아왔으며, 비밀을 알게 된 지금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어디 한번 멀리서 지켜나 보자.

혈육의 얼굴을.

그리고 그때,

“회장님! 저희 지점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입문이 열리고 뒤로는 수행원과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장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위풍당당한 입장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공간의 주인은 장은우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압구정점의 지점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인사를 시작으로 도미노라도 하듯 도열한 사람들이 차례로 장은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도도한 걸음걸이로 백화점 안에 들어선 장은우는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하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들었다.

익숙한 눈이었다.

그녀의 눈은 나와 닮아있었다.

태상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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