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고윤아
2010년, 여기는 태상 본사의 기획홍보팀 회의실.
교복 차림의 고윤아는 홍보팀 소속 팀장들을 앞에 놓고 면접을 보고 있었다.
“고윤아 학생, 장래 희망이··· 법조인이네요?”
“예 맞습니다.”
태상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학까지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회 환원을 통해 태상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적.
고윤아는 최종 선정 후보자 중의 한 명으로, 선발을 위한 마지막 면접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일까.
장차 법조인을 꿈꾼다는 그녀의 말에 면접관으로 앉아있는 팀장들의 표정이 셀로판지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저 애는 합격이 어렵겠다 싶은 분위기.
그런데 그때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팀장님, 회장님께서 지금 오고 계십니다.”
“뭐? 회장님께서 여길 왜?”
“이천 공장 방문일정이 취소되셔서 공백이 생기셨습니다. 직접 면접을 참관하고 싶으시답니다.”
장영복 회장의 예기치 못한 방문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회의실이 분주해졌다.
팀장들은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장 회장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들이 많아. 잠깐 시간이 나서 들렀는데 괜찮지?”
팀장들은 장 회장의 등장에 고윤아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대로 앉아있어야 할지, 저 팀장들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저는 은림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윤아라고 합니다.”
그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씩씩하게 인사 하는 고윤아를 장영복 회장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고윤아 학생. 당찬 모습이 보기 좋구만. 홍 팀장, 어디 저 학생 지원서 나 좀 한번 볼 수 있을까.”
장영복 회장은 서류를 받아들더니 코끝에 걸려있던 안경을 올려 쓰고 천천히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길 몇 분, 장 회장은 직접 고윤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학생 부모님께선 장애가 있으시다고?”
“예.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부모님이라고 썼군. 내가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을 하곤, 고윤아는 단어를 곱씹기라도 하듯 힘을 실어 말했다.
“저희 부모님은 평생 가난하셨습니다. 몸도 불편하십니다. 하지만 항상 인생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님을 통해 저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희 부모님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한 정신력을 잃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이라···”
장 회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교 성적도 굉장히 우수하군.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걸. 이렇게 영특한 딸이 있으니 두 분이 행복하실 수밖에.”
“회장님 잠시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장 회장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팀장이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학생은 장래에 법조인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여라도 나중에 정말 법관이 되기라도 하면··· 저희가 돈으로 장래 유망한 법관을 매수했다고 괜한 억측을 살까 염려됩니다.”
“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군.”
태상 본사의 팀장 직책은 계열사의 어지간한 임원들도 모두 발라버릴 수 있는 정도의 자리.
사내 정치라면 이골이 나 있을 그가 장 회장의 말뜻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팀장은 더는 사족을 달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고윤아 학생. 내가 하나만 더 묻지. 학생이 여기서 장학금을 받다가 장차 판사나 검사가 되었다고 치자고. 제척사유가 되고 안되고 그런 사정은 일단 접어두고··· 만약 그때 가서 태상이 연루된 사건을 맡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장영복 회장에겐 특유의 눈빛이 있었다.
그가 집중할 때면 종종 나오곤 하는 그 눈빛은 폐부를 꿰뚫을 듯이 날카로워서 오랜 세월 동안 장 회장과 함께해온 임원들조차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곤 했다.
장 회장은 지금 바로 그 눈으로 고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고윤아는 장 회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 속에는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변호사가 될 생각입니다. 누구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 제가 변호사가 되면 태상도 변호해드리겠습니다. 태상 그룹이 법에 희생당하는 억울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라면 말입니다.”
푸하하하━
장영복 회장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그가 이렇게 웃어본 적이 언제 였던가?
적어도 쉰이 지나고 나선 처음이었다.
장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팀장들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 봐들, 저 학생 꼭 합격시키라고.”
*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청각장애가 있으십니다.“
나에게 이 말을 하고선 고윤아는 갑자기 돌발행동을 했다.
그녀는 양손의 검지와 중지만 펴고 펼친 손가락을 위아래로 겹치더니 이어서 오른손의 날을 세워 왼손등을 두 번 두들겼다.
수화··· 인가.
고윤아가 수어를 쓴다는 건, 부모님의 장애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고윤아의 표정에선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 청소를 하셨습니다. 귀도 안 들리고 남들과 의사소통도 쉽지 않으니 하실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셨겠죠.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 되는 건물 청소는 당신들께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가난했습니다. 제가 광월의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는요.”
고윤아의 타이틀과 외모만 보고 나는 당연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일 거로 생각했었다.
“··· 그랬군요. 멋대로 짐작했던 거, 사과드립니다.”
고윤아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는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호수처럼 평온했다.
결코 자신의 과거를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웃으셨습니다. 두 분은 어디를 가든 서로 손을 꼭 잡고 다니셨죠. 어느 집과 비교를 하더라도 부족함 없이 화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잔잔하던 호수에 도대체 누가 돌을 던진 걸까.
고윤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두 분이 파출소에 잡혀 계신다는 말을 듣고 수업 중에 뛰쳐나간 적이 있습니다. 청소하던 건물에서 귀중품이 사라졌는데 어쩐 일인지 부모님께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신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가난은 하나의 혐의가 되곤 합니다. 당황한 두 분이 구어로 억울함을 호소하셨지만 뭉개진 발음은 그 혐의를 벗기기에는 한참 모자랐습니다. 하필이면 귀중품이 놓여있었던 곳을 지나가시는 게 CCTV에 찍혔었거든요.”
가난은 하나의 혐의가 된다.
그녀의 말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보육원의 형제들을 향해 때때로 날아오던 의심의 눈빛들이 바로 그것 아닌가.
“물건 주인의 오해였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시나브로 고윤아의 이야기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두 팔이 축 처진 채로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때 다짐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부모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제가 선택한 것은 법이었습니다.”
고윤아는 후식으로 나온 차를 한입 머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여쭤보셨죠? 장 회장님과의 인연이 무엇인지. 저는 태상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는 면접에서 떨어졌어야 했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붙여주셨다고 하더군요.”
옆에서 아무리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해도 상주는 따로 있는 법이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론 한 달에 한 번씩 장 회장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 편지요?”
“예. 제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생활비로 받은 돈은 어떻게 사용을 했는지. 당연히 답은 없었습니다. 바쁘신 분이 제 편지를 보기나 하실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계속 보냈습니다. 저에 대한 후원이 한 푼도 헛되게 쓰이지 않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회장님께서 직접 학교에 절 만나러 찾아오셨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수많은 일을 하는 거대 기업에서 사회 환원 사업쯤이야 아주 작은 프로젝트에 불과할 터.
그저 장부에서 숫자로만 남을 뿐, 사람의 기억에서는 점차 희미해지는.
그런데 기특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 하나쯤은 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고윤아의 편지는 어쩌면 장영복 회장에게 있어 작은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이따금 회장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는 제가 예뻐 보였는지 절 친딸처럼 대해주셨습니다. 당돌하게도 저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곤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에서 법학을 더 배우고 나서 회장님을 돕고 싶다고. 그러자 그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태상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면 보내주마.”
그때의 기억을 반추라도 하듯 고윤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연수원 생활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태상 그룹의 변호사단에 지원했지만, 회장님께서는 받아주시지 않더군요. 여기에 얽매이지 말고, 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그래서 지금 일하는 로펌에 들어오게 되었고, 후에 회장님이 저희 로펌에서 변호사를 구한다는 소리에 바로 달려갔습니다. 그제야 장 회장님께선 못 말리겠다며 절 받아주셨습니다.”
“...”
“··· 장 회장님도 인간이기에 두 손을 더럽힌 과오가 분명 있으시겠죠. 어쩌면 용서받을 수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에게 있어 장 회장님은 큰 은인이시라는 겁니다.”
*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아닙니다. 저만 혼자서 너무 떠들었습니다. 민망합니다.”
“그나저나 전에는 개인적인 사정이라며 딱 잘라 말하더니, 오늘은 속에 있던 이야기를 다 하셨네요.“
“··· 여자는 선물에 약한 법입니다.”
“예?”
고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 농담이었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윤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껏 쌀쌀해진 날씨 탓일까, 고윤아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더욱 따듯하게 느껴졌다.
“고 변호사님.”
나는 제 갈 길을 가려는 고윤아를 불러세웠다.
“아까 수화로 저에게 뭐라고 말한 겁니까?”
고윤아는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한번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자기 손을 잘 보라는 듯 손바닥을 펴 보였다.
양손의 약지와 소지를 모으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편 그녀는 펼친 손가락을 자기 가슴에 대고 엇갈리게 두어 번 움직였다.
나에게 또 하나의 물음표를 남긴 채 고윤아는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이 바로 그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