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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30화 (30/200)

30. 태상의 회장들 (1)

장영복 회장의 사망 세달 전.

서울 모처에 있는 어느 바.

손님이라곤 정장 차림의 한 남자뿐이었다.

조도를 잔뜩 줄인 조명은 남자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새겨놓고 있었다.

“맨하튼 한잔.”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텐더는 남자의 주문에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 남자의 이름은 장은수.

장영복 회장의 첫째이자, 태상 건설의 회장.

그는 유독 눈꼬리가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바텐더는 여자의 나신처럼 유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술잔에 장은수가 주문한 칵테일을 멋들어지게 따라 내놓았다.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은 장은수는 눈을 감은 채 그 맛을 음미했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회장님. 윌렛 라이 베이스입니다. 베이스가 묵직해서 풍미가 괜찮으실 겁니다.”

“음.”

그때, 한 여자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윤아였다.

장은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고 변호사. 여기.”

고윤아는 장은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바 테이블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회장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늦은 시간입니다.”

“일단 한잔하지 그래. 긴장할 것 없어.”

“괜찮습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바텐더가 솜씨가 정말 훌륭하거든. 대한민국 최고야.”

“회장님께 실례가 아니라면 정중히 거절해도 되겠습니까?”

흥━

장은수는 콧방귀를 한번 뀌더니 손짓으로 바텐더를 자리에서 쫓아냈다.

“그래. 고 변이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안 좋아하지. 피차 수다 떨 사이는 아니니 바로 본론만 말하지. 아버지가 유언장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고 하더군. 고 변이 그 자리에 있었다던데··· 고 변은 내용을 알고 있지?“

고윤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저는 일개 변호사에 불과합니다.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릴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이래, 고 변. 우리 아버지가 제 자식보다 더 믿고 있는 게 고윤아 변호사 아니야?“

장은수는 이 말을 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고 변호사.”

장은수의 눈과 입은 드라마틱하게 따로 놀고 있었다.

입은 세상 좋은 사람처럼 인자하게 웃고 있었으나, 눈에서는 비린내가 풍기는 안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이질감 때문에 고윤아의 등짝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지금 전설 속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린 채 자신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겁먹지 말자.’

고윤아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예. 회장님. 듣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지. 나는 그 유서의 내용이 궁금해.”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해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고 변, 아버지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 1년이나 2년? 아니, 어쩌면 이제 채 몇 달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장은수는 칵테일 잔을 들어 남아있는 오크 색의 액체를 모두 들이마셨다.

“앞으로 태상을 책임질 사람은 바로 나야. 그런 나로서는 아버지가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셨다면 신경이 가지 않을 수가 없지. 아버지는 더 이상 젊지 않아. 늙고 지친 당신이 판단이 흐려져 엉뚱한 소리로 태상을 망치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라고.”

사실 장은수는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날카로웠다.

장영복 회장이 그를 태상 건설의 회장 자리에서 쳐내려는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임직원 수만 10만이 넘는 거대 공룡 태상의 역사는 태상 건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건설 붐이 사그라진 지금도 태상 그룹 내에서 태상 건설은 상징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 태상 건설의 회장이 태상 전체의 주인이 된다.

굳이 숨길 것도 없이 세상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높은 곳의 왕좌만을 바라보며 장은수는 자신의 커다란 야심을 숨기고 끊임없이 인내했다.

장은수가 태상 건설의 회장 자리를 장영복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지 이제 겨우 3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늙은 여우가 나를 내치려고 해?’

그래서 장영복 회장이 새로운 유서를 만들었다는 첩보를 듣곤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은수는 훗날 알게 될 것이다.

그 유서의 내용은 그가 상상도 못 했던 종류라는 걸.

“회장님. 여쭤보실 것이 그것뿐이면 저는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고윤아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허, 고 변. 지금 화를 내는 거야? 자네가 그런 사람인 줄 처음 알았는걸?”

“...”

“··· 이봐, 고윤아.”

고윤아는 섬뜩했다.

장은수의 눈빛이 사정없이 자신을 베고 찌르는 것만 같았다.

“혹시 네가 그 노인네의 딸이라도 되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저는 그저 고용인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리는 말이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야. 이미 다 주인이 정해져 있어. 주인이 될 수 없다면, 누가 주인인지는 알아봐야지. 고 변 똑똑하잖아.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 오늘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장은수는 멀어지는 고윤아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으르렁댔다.

“건방진 년.”

*

다시 현재.

태상 본사의 임원 회의실.

오늘 이곳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태상 계열사의 회장들!

“바쁘신 시간에도 모여주신 회장단 여러분께 감사 말씀부터 올립니다. 오늘 의제는 알고 계시다시피 본사의 총수 선임 건에 대한 재확인입니다.”

“확인하고 말고가 어딨어?”

간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장단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상 금융의 전기형 회장.

장영복 회장 사후에 공개적으로 장은수를 지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선대 총수께서 남긴 유언 때문에 공석으로 비워두는 거지, 태상 건설의 회장이 곧 태상의 총수라는 건 세 살 어린애도 아는 일인 것을···”

“허!”

전 회장의 말을 맞받아치며 누군가 크게 혀를 찼다.

이번엔 태상 중공업의 김준형 회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상의 총수 자리는 공식적으로 2년간 공석이요! 그런데···”

김 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회의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은수를 바라보았다.

“장은수 회장은 벌써 총수가 된 것처럼 선대 총수께서 고인이 되시기가 무섭게 태상 전자와 태상 물산의 회장들을 내쫓고 어떻게 그 자리를 꿰찰 수가 있습니까!”

“어허! 김 회장님, 내쫓다니요! 공적인 자리에서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다.”

장은수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전기형 회장이 장은수를 변호했다.

- 본인이 태상의 총수 자리에서 은퇴 전에 사망할시, 사망한 날로부터 2년 뒤 회장단 회의를 통해 새 총수를 선임한다.

- 새 총수는 태상건설의 회장을 겸임하며, 새 총수에게는 본인이 소유한 태상건설의 지분 전부를 상속한다.

자신의 자녀들을 비롯해 회장단에게 공개된 장영복 회장의 유서 중 일부.

장영복 회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태상을 가지고 싶다면, 2년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라.

물론 회장단에서 총수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장은수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장영복 회장의 사후 그의 행보에 다들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한자리에 이렇게 모이기도 어려운 분들인데 만나기가 무섭게 이렇게 언성들을 높여서야 되겠습니까.”

마침내 혼돈 속의 중심에 서 있는 장은수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 것입니다. 태상의 총수는 지금 공석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같은 회장단의 일원일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 질문에 답을 좀 해주시지요. 전 회장 말고 장은수 회장님이 직접.”

태상 중공업의 회장은 오늘 회의에 작정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선대 총수께서 남긴 유지를 받드시겠다는 분이, 어째서 선대 총수의 오른팔과 왼팔 같던 분들을 쳐내셨습니까. 태상 전자와 태상 물산의 회장님들, 선대와 함께 어려운 시절을 모두 버텨낸 분들입니다.”

“김 회장님이 오해하시는군요. 그분들께서는 자진 사퇴를 하셨습니다. 진작에 은퇴하셨어도 이상할 것 없는 연세들 아니십니까?”

“선대께서도 한번에 회장직을 세 개나 역임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태상 전자도 태상 물산도 이사회의 선임으로 정당하고 절차에 맞게 선출되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것이지!

김 회장은 일갈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 역시 장은수에게 쫓김을 당한 회장들처럼 원로 축에 속하는 남자였다.

그때였다.

“태상 건설의 회장께서 선대 총수의 유지를 받들겠다니 저 역시 고인의 아들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단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집중되었다.

장은호.

장영복 회장의 차남이자, 태상 자동차의 회장.

재벌계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장은호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임에도 장은수와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장은수가 날카로운 이미지라면, 장은호에게서는 호방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유서에 따르면 회장단의 누구라도 2년 뒤에 태상의 총수가 될 수 있는 거죠. 오늘 이 자리에 불참한 제 누나 장은우 회장까지 포함해서요.”

장은수는 말없이 자기 동생을 쏘아보았다.

그런 그를 대신해 입이 된 것은 역시나 전기형 회장이었다.

“누구든 이라니요. 유서에도 분명히 적혀있지 않았습니까. 태상건설의 회장이 총수가 되는 것이라고.”

“아니지요. 해석은 확실히 해야지요. 전 회장님은 지금 완전히 반대로 말씀을 하시는데요?”

“무슨 소리입니까.”

“태상 건설의 회장이 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총수가 태상건설의 회장이 되는 것이라고 유서에 적혀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현 태상 건설의 회장님이 2년 뒤에 총수가 되지 못한다면 당연히 새 총수를 위해 회장의 자리에서도 내려오셔야 한다는 뜻이죠.”

장은호의 거침없는 대범한 발언.

회장단에는 누군가 얼음이라도 쏟아부은 듯 썰렁해졌다.

반명 장은호는 왜 이 당연한 걸 모르시냐는 듯 빙그레 웃으며 회장단을 바라보았다.

“태상 건설의 회장이자 2개 사의 회장도 함께 역임하고 계시는 저의 형님 장은수 회장께 여쭤보겠습니다. 제 말에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장은수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썩소를 지었다.

그는 장은호를 외면하곤 회장단을 향해 말했다.

“제 동생이 기업경영에 참여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정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이 확실히 틀리진 않지요. 그래서 저는 회장단 여러분께 제안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총수 자리를 두고 다툴 때가 아닙니다. 태상 전체의 발전을 위해 다 같이 뜻을 모으는 방향으로 가시죠.”

그렇게 누군가는 진땀을 흘리고, 누군가는 야욕을 품었을 태상의 회장단 회의가 끝났다.

이제 회의실에는 단 두 남자만 남아있었다.

장은수와 장은호.

두 형제는 서로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누구나 총수가 될 수 있다니. 아버지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구나.”

비릿하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은수였다.

태상의 회장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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