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행복해지거라, 영수야 (2)
“신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하나도 모르겠네요. 제가 무슨 5억을 보내요.”
“날 속이려고 하지 마라. 이 신부님이 널 모르겠니. 네가 보육원에 왔을 때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들었다. 다만 그때는 네 부모님의 소식을 알게 되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겼지만, 네가 다녀간 뒤로 며칠도 지나지 않아 5억이라는 돈이 후원 계좌로 들어왔더구나.”
무기명으로 보낸 것이니 우기려면야 더 못 우기겠는가.
하지만 신부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자니 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건물을 사는 것 하며, 승우한테 가게를 내어준 것까지··· 혹시 돌아가셨다는 네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이냐?”
거기까지 생각하셨단 말인가.
당신 입으로 과시를 안 하실 뿐이지, 신부님은 신기에 가까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실 때가 종종 있었다.
“··· 예. 말씀하신 게 맞아요. 나쁜 생각으로 말씀 안 드린 건 아니에요. 엄청난 거액이에요. 제가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런 돈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욕심조차 내본 적 없는.”
“영수야.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주렴. 네 친부모님을 욕보일 생각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니. 혹여라도 그 돈 말이다. 네가 가져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돈은 아니더냐?”
신부님은 돈의 떳떳함을 먼저 물어보셨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제 친부모의 삶에 대해 다 알지 못하니, 이 돈의 천원 한 장까지 전부 깨끗한 돈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어쩌면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는 돈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나라에 전부 신고가 된 합법적인 재산이에요. 제가 누군가와 싸워서 강제로 뺏은 것도 아니고요.”
“그랬구나. 그랬어.”
신부님은 역시나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셨다.
“돈에 대해 숨기려고 한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건 영수, 네가 참 잘한 것이야. 적은 돈은 고달프고 많은 돈은 혼란스럽다고 했다. 돈에 휘둘리지 않게 앞으로 처신을 더 신중하게 해야겠구나.”
“예.”
“나도 오늘 너에게 들은 일은 잊어버리마. 너야 알아서 현명하게 행동하리라 믿지만, 네가 가진 것의 향기에 취한 악인들이 주변에 몰리지 않게···”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저 이제 신부님께 받은 은혜 갚을 수 있어요.”
“영수야.”
신부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애초에 대가를 바라고 내가 널 길렀겠느냐. 그리고 훌륭한 어른이 되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넌 내게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단다. 그 이상으로 완벽한 보답은 없어.”
“...”
“보내준 돈은 지금 있는 아이들과 앞으로 자애 보육원의 품 안으로 들어올 아이들만을 위해 쓰도록 하마. 이제 더 이상 돈을 보낼 필요 없다. 만약 네가 여유가 된다면 주변에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으면 한다.”
신부님! 나의 영원한 스승.
이분 밑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잘못될 수 있을까.
당신이 원하셨다면 나는 5억이 아니라 10억이고, 20억이고 더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신부님은 내가 얼마가 생겼는지 그 액수조차 묻지 않으셨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무슨 권리로 네게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말할 수 있겠니.”
신부님은 갑자기 탄식처럼 혼잣말을 내뱉으셨다.
“행복해지거라, 영수야.”
“예?”
신부님의 선문답 같은 말에 나는 그 안의 진의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지금 가진 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구닥다리 같은 말은 하지 않으마. 네 말처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니··· 오직 널 위해 쓰거라. 그렇게 해서라도 꼭 행복해지거라.”
가슴이 뭉클했다.
이봐, 한영수.
넌 항상 자신을 뿌리도 없이 공허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지?
아니야. 넌 한 번도 외롭고 혼자였던 적이 없어.
네 옆에는 항상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만약 그렇게 행복해지려다 네가 죄를 짓게 되면 그건 내가 하느님께 최선을 다해 용서를 빌어보마. 영수 너는···”
나의 아들이니까···
삶이라는 독한 놈이 내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울지 않고 버티는 법이었다.
하지만 신부님의 마지막 말 한마디는 나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고, 기어코 눈물샘을 터트려버렸다.
”영수 형! 울지 마세요!”
그때,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이 하나가 뚝뚝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하곤 부리나케 다가와 휴지를 건네주었다.
축구공을 앞에 두고 나와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던 아이, 동일이였다.
“형들이 맨날 나보고 울보라고 놀리는데. 영수 형도 우는구나. 형, 울지 마세요. 휴지로 눈물 닦아요.”
“동일아, 이리 와보렴.”
신부님은 내게 붙어 서 있는 동일이를 다정하게 불렀다.
동일이가 다가서자 신부님은 아이를 품에 안고 둥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사람들은 약해서 우는 게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강했기 때문에 우는 거란다.”
*
“승우야. 정말 안 도와줘도 되냐?”
“괜찮아요, 오빠. 그냥 내버려 두고 들어가세요.”
신부님과 보육원 아이들과 작별한 뒤의 일이다.
가게 정리를 도우려는 나를 승우와 은주는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야, 영수야. 나 있잖아. 오늘처럼 요리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나를 배웅하겠다고 가게 앞까지 나온 이승우의 말이었다.
“그래서 앞으론 가끔 보육원 아이들 데려다가 오늘처럼 먹이려고.”
“아주 장사 시작하기 전부터 퍼줄 생각만 하고 있네.”
“새끼. 오늘 내 솜씨를 보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네. 애들이 아무리 먹어도 돈 걱정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분명히 대박 날 거야. 우리 만리향.”
“그래. 너 말이 맞아. 잘 될 거 같아.”
“그런데 넌 아까 신부님 앞에서 갑자기 왜 눈물을 질질 흘렸냐?”
나는 주먹으로 이승우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야, 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거다.”
“새끼, 구라는···”
“그나저나 너 매일 그렇게 새벽 나절부터 일어나서 버틸 수 있겠어?”
이승우는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가게 준비에 자신을 모두 불태우고 있었다.
녀석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다가도 혹여나 몸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고. 정히 힘들면 장사 되는 거 봐서 주방 보조해 줄 사람 뽑든지 해야지 뭐.”
“그래. 자리가 좀 잡힌다 싶으면 사람 써. 제수씨는 다니던 일 그만둔 거야?”
“응. 나는 서빙이야 아르바이트 구하면 된다니까, 남한테 돈 주지 말고 그냥 자기한테 100만 원만 달래.”
우리 둘은 은주의 말이 웃겨서 잠시 하하 웃었다.
“잘 해낼 거야. 너희 둘은.”
“그래. 은주나 나나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 둘이서 휴대전화로 찍어놓은 가게 사진 매일 보고 자잖아. ··· 고맙다 영수야.”
“이젠 또 장사해야 한다는 핑계로 결혼 못 한다고 하지 말고, 빨리 장가나 가.”
이승우는 내 말이 민망한지 괜히 말을 돌렸다.
“야, 얼른 가라. 어휴! 한영수. 새끼야 지겹다, 지겨워. 우리 둘은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앞으로 너랑은 더 지겹게 얼굴 보겠네.”
“그래. 내가 너희 가게 가면 짜장면은 항상 공짜지?”
내 말에 이승우는 피식 웃었다.
“새끼야, 중국집은 짬뽕이지.”
언젠가 어린 시절 그와 내가 했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대화.
이 대화를 처음 했을 때는 모든 것이 막연한 미래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명백한 현실.
꿈과 현실이라는 건 철길의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소중한 사람이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나는 이승우와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
- 전화가 왔습니다.
운전 중 차량 내비게이션 화면에 알림 문구가 올라왔다.
“흠.”
최예리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로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그녀와 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갑작스러운 연락에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리님. 저 최예리에요.”
“그래. 예리 씨.”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이야기해.”
다행히도 최예리의 목소리는 내 우려처럼 어둡지 않았다.
최예리의 후일담은 김영하가 임 차장이 쫓겨난 썰을 풀 때 곁다리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선배님, 아니 이젠 형이지. 예리 씨 말이에요. 형 회사 그만두고 나서부터 유난히 기운이 없었거든요? 처음에 난 임 차장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임 차장 지방으로 가고 나서도 여전히 약 먹은 병아리처럼 힘이 없더라고요. 역시 내 촉이 정확한 거 같아. 내가 말했었죠? 예리 씨가 형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요. 이제 형 못 보니까 그러는 거지.”
김영하는 웃으며 내게 농담을 했지만, 최예리의 진심을 엿보았던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응,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예리 씨는 요즘 좀 어때?”
“저도 좋아요.”
“오 과장님이랑 영하는? 연락 한번 해봐야지 하면서 이래저래 미루게 되네.”
“다들 잘 지내세요. 새로 오신 팀장님은 무난하게 좋은 분이라서 사무실 분위기도 많이 좋아졌고요.”
“그것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회사는 이제 인사 시즌.
한창 이번엔 누가 승진하네, 마네 뒷말이 나오는 시기다.
“어떻게, 영하는 이번에 대리 달 것 같아?”
“네. 임 차장 때문에 자기도 승진길 막히는 거 아니냐고 걱정 많이 했었는데, 다행히 잘 될 것 같아요.”
“반가운 소식이네. 예리 씨는? 정규직 전환은 문제없이 되는 거지?”
“저··· 그게.”
어쩐 일인지 최예리는 바로 답을 않고 뜸을 들였다.
“사실, 저 회사 그만두었어요.”
“뭐? 그만뒀다고?”
”네. 저번 주에···“
설마 회사에서 최예리에게 저번 일로 알력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그럴 리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SNS와 유튜브의 화력에 그렇게 된통 두들겨 맞았으니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국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야? 우리 마지막에 헤어질 때도 한 말이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예리 씨 돕고 싶어.”
“아니에요.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럼?”
“저··· 대리님. 혹시 지금 어디 계셔요?”
“난 지금 집 근처야. 운전 중이고.”
잠깐의 침묵.
“대리님, 시간 괜찮으시다면 지금 제가 뵈러 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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