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34화 (34/200)

34. 자애 GYM 오픈

“대리님! 여기예요!”

최예리는 나보다 먼저 자리에 와 있었다.

출입구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의 그녀는 마치 대학생처럼 보였다.

내가 회사에서 익히 보아오던 그녀완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달라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예리 씨.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었다니, 무슨 일이야?”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회사를 나올 때는 정말이지 속이 후련했다.

내 짐들이 담긴 박스를 들고 나갈 땐 가는 길 좌우로 군악대가 팡파르라도 연주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면 최예리였다.

여린 가지처럼 떨리던 그녀의 손.

그게 마음에 걸렸었다.

“대리님, 다음에 만나면 그냥 예리라고 하기로 했잖아요.”

최예리는 여느 때처럼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심각한 건 아니겠구나.

“입에 붙은 호칭이 잘 떨어지지 않네.”

“그땐 알겠다고 하셨으면서.”

“그래? 근데 예리 씨도 나보고 대리님이라고 하잖아. 그럼 예리 씨가 먼저 나한테 오빠라고 해보지, 그래.”

“예? 아··· 오···”

최예리는 오빠라는 단어가 무슨 금단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어절 하나를 채 완성하지 못했다.

“거봐. 쉽지 않지? 어떻게 부르는지가 뭐가 중요해. 서로 좋은 오빠, 동생 사이로 생각하기로 했으면 그걸로 된 거지.”

꽃이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고 향기가 나지 않을까.

최예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의사를 밝히곤 빨대로 음료를 쪼록 빨아 마셨다.

그나저나 호칭 정리 따위를 하자고 날 보러 온 것은 아니겠지.

계속 같은 말로 물으면 최예리를 추궁하는 꼴이 될까 봐,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과연 침묵은 누군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데 즉효약이었다.

“그때 대리님이 저한테 해주셨던 말 기억하세요?”

당연히 전부 기억하고 있다.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잔뜩 무게를 잡고 떠든 소리였으니까.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지 말라고. 그것도 습관이 된다고 그러셨죠.”

“그래. 그땐 상황이 그랬으니까. 예리 씨가 자책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이 잊히지 않았어요. 그런데 계속 회사에 다니다 보면, 정말로 사과만 하는 사람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이 참 많아졌는데···”

이런.

의도치 않게도 내 말 몇 마디가 타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가.

··· 나는 당장 회사를 박차고 나오라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제 꿈이 생각났어요.”

“꿈?”

최예리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어렸을 때부터 소설 읽는 걸 참 좋아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쓰는 데도 관심이 생겼었고. 대학 때에는 소설 집필 동아리도 가입했었고요.”

그래. 최예리의 사무실 책상 한쪽 편에는 소설책이 꼭 한 권 놓여있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이 손에 안 잡힐 지경이었어요. 얼마간 땅속에 묻어두었던 보물을 찾은 것처럼 달뜬 기분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저, 대리님. 혹시 웹소설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웹소설이라.

그쪽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요즘에는 웹소설 원작이 웹툰이나 드라마로 미디어믹스 되면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리도.

“응. 내가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것 같더라고.”

“네. 맞아요. 한번 해볼까 싶은 마음에 쉴 때마다 틈틈이 써서 짧은 웹소설 하나를 연재했었거든요. 비록 그걸로 돈을 벌거나 한 건 아니지만, 놀랍게도 제 글을 읽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가슴이 펄떡펄떡 뛰더라고요.”

꿈이라.

최예리는 꿈에 취한 사람들의 대게 그렇듯, 두근거림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유난히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꿈’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건 그저 단순한 우연일까?

“그래서··· 정말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바로 사표 냈죠.”

“예리 씨가 그렇게 과감한 사람인줄 몰랐는데? 난 또··· 혹시라도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걸까 봐 걱정했지.”

“그건 아니에요. 사실 시선이 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래. 아무튼 예리 씨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네. 미리 작가님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놔야 하나?“

”에이, 작가는 무슨요. 아직 저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최예리는 내 말에 양 손바닥을 팔랑대었다.

하지만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나는 잘했다고 응원하고 싶네.”

허울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정식 모터스에 미래를 거느니, 내가 해보고 싶은 일에 모든 걸 걸어보는 것이 훨씬 낫지.

회사를 벗어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살아있는 송장, 혹은 기계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시간을 죽은 채로 보내왔다.

“왠지 대리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어요. 사실 정신 차리라며 저를 말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거든요.”

“아무래도 갑자기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면 가족분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걱정하겠지··· 당분간은 수입이 없다고 봐야하나?”

“네. 일단은 막연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 독서실 총무 같은 자리라도 알아보려고요. 작게 용돈벌이만 하더라도 소설 구상도 하고 조금 끄적일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있어요.”

꿈을 말하며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던 최예리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내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최예리는 그 그늘을 웃음으로 애써 지우곤 내게 말했다.

“오늘 대리님을 뵙자고 한 건,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감사? 나에게 뭘···”

“대리님이 제게 해주신 마지막 말이 저를 다시 돌아보게 했으니까요. 그 계기가 아니었다면 글을 써보겠다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치기 어린 내 말이 그녀의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묘한 부채감이 느껴졌다.

물론 최예리는 내게 그런 부담을 주겠다고 감사를 입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기, 예리 씨.”

“네?”

“혹시 괜찮다면 말이야···”

최예리는 둥근 눈을 들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헬스장을 하나 열어.”

“헬스장이요?”

최예리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뜨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기야, 최예리가 나에게 자기가 작가가 되려 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헬스장을 차렸다는 말은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들렸으리라.

“응. 예리 씨가 글 쓰는 것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운동을 좋아하기도 했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어떻게 좋은 기회가 생겨서 하게 되었어.”

“우와!”

최예리는 짝짝짝 손뼉을 쳤다.

“대리님, 대단하세요! 자기 사업을 하시게 되었다니···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저녁 타임에 데스크 봐줄 친구는 구했는데, 아직 오전 타임을 구하지 못해서.”

아까 물음표라고 했던가?

이제 최예리의 머리 위에는 느낌표가 떴다.

어차피 누군가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예리의 성실함에 대해서는 같은 팀이었던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예리 씨만 괜찮다면 말이야, 나와서 일해 보겠어? 청소와 회원 관리만 해주면 좋겠어. 아마 그렇게 바쁘진 않을 거야. 한가한 시간에는 글을 써도 좋고. 사실 이제 시작하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운영할 생각은 없거든.”

“아···”

“회사 다닐 때만큼 아니겠지만, 예리 씨의 소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는 챙겨줄게.”

“대리님···”

“천천히 생각해보고 연락해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예리의 입이 열렸다.

“대리님, 아니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문득 최예리가 영업팀 사무실에 인사를 왔던 첫날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

“대표님, 저 나왔어요!”

“어. 예리 씨. 일찍 왔네.”

자애짐의 오픈일.

최예리는 나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을 기어코 하나 만들어냈다.

대리님도, 사장님도, 관장님도 더더욱 오빠도 아닌 대표님.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어색하기만한 이름표였다.

뭘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부르냐는 내 말에도 최예리는 그래도 명색이 이 사업의 수장인데 대표님이라고 부르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새벽 5시.

오늘 내가 센터를 연 시간이다.

아직은 태양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센터의 불을 켰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자 반들반들하게 도색된 머신들, 잘 정리된 덤벨과 바벨이 왕을 기다리듯 도열해 있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헬창으로서 느낄 수 있는 지복의 경지랄까?

누군가는 나를 비웃지 않을까?

500억이 생겼는데 기껏해야 헬스장이냐고.

그에게 대답해주고 싶다.

이것은 그저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젠 믿게 되었다고.

장사가 잘되면 좋겠지만 사실 안돼도 상관없다.

이 센터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일종의 트로피 같은 것이니까.

나는 아직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기구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예리 씨, 내버려둬. 청소기는 내가 새벽에 나와서 돌렸어.”

나는 창고에서 업소용 청소기를 들고 나오는 최예리에게 말했다.

역시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일을 찾는 센스가 있는 그녀다.

“아! 제가 해야 하는 건데, 다음부터는 그냥 두세요.”

“그래. 알겠어. 앞으로 잘 부탁할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열심히 한다고 상 안 줄거야. 너무 열심히 하진 말고, 작가님께서는 글을 써야지. 글.”

최예리와 둘이서 그렇게 센터의 첫날을 맞이했다.

첫 번째 손님은 역시나 이승우였다.

“아하, 이분이 영수 회사 후배분이구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제는 후배가 아니라 사장님과 직원 관계랍니다.”

이승우에게는 최예리에게 건물주니, 로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미리 다짐받아놓은 참.

녀석은 그냥 운동하고 싶을 때는 아무 때나 와서 하고 가라는 내 말에도 부득불 1년 치 이용권을 끊고 갔다.

오전은 꽤 바쁘게 흘러갔다.

일부러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헬스장이 새로 오픈한다는 소문이 어떻게 돈 모양이었다.

오픈빨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진 않았지만, 상담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자애짐을 찾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조금 뜸해져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잘 아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수 님. 개업을 축하드립니다.“

작은 화분을 품에 안고 고윤아가 내게 다가왔다.

헬스장이 너무 잘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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