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35화 (35/200)

35. 헬스장이 너무 잘됨 (1)

이쯤에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려 한다.

살면서 여복이 없지는 않았다.

외모가 괜찮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어왔고, 스스로 거울을 봐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어디 사람이 외모가 전부겠냐만, 그래도 그 덕에 어려서부터 여자들의 시선을 솔찬히 받아왔다.

혹시라도 도끼병이라는 오해를 살까 봐 말해둔다만, 1년에 몇 번쯤은 늦은 밤 술에 취한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꼭 받곤 했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연애를 하고 다닌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래야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외려 평범한 내 또래의 남성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바쁘게 사느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첫 번째요, 누구도 모르게 꼭꼭 숨겨놓은 콤플렉스를 들킬까 두려웠던 것이 두 번째였다.

구구절절 이 하소연 같은 이야기의 요점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깨끗한 축에 속한다는 거다.

최예리에게 같이 일을 해보자고 했던 건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린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던 건 무엇보다도 그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차’ 싶은 부분이 있었다.

최예리의 마음을 간과했다.

그날, 불타오르던 최예리의 눈동자 앞에 나는 오빠, 동생 사이라는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내 의사를 표시했었다.

내 나름대로는 관계에 대해 못을 박은 것이지만, 지금의 내 비루한 선의가 그녀에게 희망 고문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

물론 내가 일을 나오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최예리도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지만, 혹시라도 내 언행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게 더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윤아에게는 얼마 전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이제 센터가 문을 연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미모의 여성이 내 이름을 부르며 등장하자 최예리는 온 관절에 녹이라도 슨 것처럼 어색하게 행동했다.

“저··· 대표님, 저분은 누구세요?”

“응.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랄까···.”

내게 조용히 물어오는 최예리에게 마땅히 대답해줄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고윤아와 최예리.

이 두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최예리가 챙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면 고윤아는 옆에 있어 든든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매력이 있으니 내가 감히 우열을 논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 마음을 주머니 뒤집듯 털어서 들여다보면 더 알고 싶고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은 역시나 고윤아였다.

고윤아가 책이라면 그녀는 몇 번을 곱씹어야 비로소 뜻을 알게 되는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쨌든 최예리의 눈치를 보자고 축하를 해주러 온 고윤아를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

나와 눈인사를 끝낸 고윤아는 최예리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수 님의··· 지인인 고윤아라고 합니다.”

“아, 아! ··· 예. 안녕하세요. 최예리라고 합니다. 대표님과는 예전 회사에서부터 같이 일하고 있고요. 그나저나 정말 ··· 너무 예쁘세요.”

지인이라.

사려가 깊은 고윤아답게 현명한 단어를 골랐다.

쓸데없이 고문 변호사니, 그런 소리를 했다면 오히려 내가 난처해졌을 것이다.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요.”

“영수 님의 새 출발을 축하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건 소나무 분재입니다.”

“귀한 걸 가져오셨네요. 이 무거울 걸 어떻게 들고 올라왔어요.”

“괜찮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힘이 센 편입니다.”

두 여자가 한 공간에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니 죄지은 것도 없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때마침, 최예리가 손님 대접을 하겠다고 음료를 준비하려고 했다.

“예리 씨. 괜찮아. 내가 할게. 나 잠깐만 손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나는 최예리를 손짓을 해 보이곤, 고윤아를 상담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

고윤아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가며 센터 내부를 둘러보았다.

“영수 님, 여기 분위기가 엄청납니다. 숨만 쉬어도 강해질 것 같습니다.”

“조금 거칠죠? 의도적으로 연출한 인테리어에요.”

“여기에 오니 예전에 의뢰인이 생각납니다. 아주 유명한 운동 유튜버였는데, 상해 사건이었습니다.”

“···어?”

왠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유튜브 ‘강쇠’, 그러니까··· ’강한쇠질‘ 아닌가요?”

내가 구독하고 있는 채널이기도 했고, 비교적 최근의 이슈라 기사를 유심히 지켜봤었다.

강쇠에게 폭행을 당해 턱뼈가 골절되는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한 남성이 그를 고소 했던 것.

강쇠는 강력하게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현장 주변에 CCTV가 없어 그의 무고를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350만 원 벌금의 약식명령을 내렸었다.

“예. 아시는군요. 그 의뢰인은 약식명령에 불복하여 정식재판을 청구하곤 저희 법률사무소를 찾아왔었습니다.”

120만 유튜버 강쇠.

끝까지 자기는 죄가 없다며 합의를 보지 않겠다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었다.

평소 선량한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던 그는 오히려 가식적인 인간으로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강쇠의 해명 영상에는 수많은 비난 댓글들이 달렸고 구독자 수는 매일 몇만 단위로 깎여나갔다.

“결국 무죄가 나왔죠. 그 재판에 변호사님이 참여한 줄은 몰랐네요. 강쇠가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군요.”

“아닙니다. 어렵지 않은 재판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계속 달라져서 정황이 의심스러웠고, 사건 현장 주변을 수소문해보니 고소인이 술에 취한 상태로 계속 쫓아다니며 시비를 거는 걸 봤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강쇠를 고소한 사람은 근 한 시간 동안 그를 쫓아다니며, ”너 돈 얼마 버냐?“, ”몸 좋던데 나랑 맞짱 한번 뜨자.“ 같은 시비를 걸어왔다고 한다.

참다못한 강쇠가 자꾸 자신을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그만하라며 뿌리쳤을 뿐인데, 술에 취한 시비꾼은 비틀대다 콘크리트 바닥에 스스로 턱을 찧었고, 그걸 강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사람 인심이란 건 참 무섭다.

자극적인 섬네일을 달고 강쇠에 대한 짜깁기 영상을 게재해대던 사이버렉카들도, 댓글로 그를 조롱하고 욕하던 사람들도.

누구 하나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아무튼 흉흉한 민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강쇠는 구사일생.

내가 잘 아는 유명인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드라마를 찍고 있을 때 그 현장 중심에 고윤아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저 영수 님.”

“예?”

“같이 일하시는 직원분은 어떻게 여기서도 같이 일하게 되셨는지···”

항상 깔끔 명료하게 말하던 그녀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직장 후배였어요. 저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잠깐 쉬는 중에 할만한 일을 찾길래 제가 먼저 도와달라고 부탁했고요. 그건 왜···?”

“아닙니다.”

고윤아는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영수 님.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사업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예.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벌떡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 고윤아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대표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어요?”

센터가 개업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출근 도장을 찍기가 무섭게 최예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응. 예리 씨,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최예리의 표정은 심각했다.

“대표님. 우리 센터, 이대로 괜찮은 거 맞나요?”

최예리는 내 앞에 A4 용지 출력물을 내밀었다.

언뜻 보니, 자애짐의 오픈일부터 시작해 회원 누계와 수익을 차트로 정리해 놓은 듯했다.

사실 첫날만 약간의 반향이 있었을 뿐, 그 이후로 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뜨문뜨문 이었다.

이 헬스장의 진가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은 센터를 한번 둘러보곤 군침을 흘리며 장기 회원권을 주저 없이 끊었다.

하지만 운동 초심자나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센터의 험악한 분위기에 부담감을 느끼고 그대로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나라고 자애짐의 수익을 따져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최예리와 다른 한 명의 직원 월급을 포함한 센터 운영비를 빼고 나면 나에게 떨어지는 것은 기껏해야 백만 원 남짓.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는 명백히 망한 장사였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일전에 은행장이 VIP 특별 우대라며 개설해준 파킹통장 개념의 입출금 계좌.

여기에는 400억가량의 현금이 잠들어 있었고, 매달 이자만 이천만 원가량이었다.

그뿐인가. 가진 건물 2채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료도 있다.

이 둘을 합치면 숨만 쉬고 있어도 젊은 직장인 연봉 수준의 돈이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최예리는 혼자 애가 탄 모양이었다.

대표랍시고 하나 있는 양반이 업장 관리는커녕 회원들보다 더 열심히 운동만 하고 있으니.

“입소문 나면 회원들도 늘어나겠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생각해주는 최예리가 기특하기도 해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최예리는 진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아는 대표님 맞죠? 이것 좀 봐주세요.”

최예리는 자신이 뽑아온 출력물의 활자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주변 헬스장은 저희 헬스장 오픈했다고 가격할인 행사에 들어갔어요. 월 회비로 따지면 저희보다 만 원 이상 싼 가격이고요.”

“뭐야, 주변 시장 조사까지 한 거야?”

“경업자들은 이렇게 대비를 하는데 우리는 너무 태평한 것 같아요. 이 통계도 보세요. 오픈 날 이후로 신규 가입 회원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아직 개업 초반인데 벌써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거야, 원.

정식 모터스 영업팀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최예리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페이퍼를 들고 유심히 읽어보았다.

“··· 정리 잘했네. 문제점도 정확히 집어냈고, 대책 방안도 현실적이야.”

“대표님, 지금 우리가 한영수 대리와 최예리 사원이 아니에요.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들고 있던 페이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리 씨 이런 거 고민하라고 데려온 거 아니야. 쉬엄쉬엄 일보면서 예리 씨가 진짜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

“제가 아는 한영수 대리님은 절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거든요? 아무리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어요.”

하하하━

내가 갑자기 크게 웃자, 최예리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좋아. 그럼 우리 진지하게 한 번 회의해볼까. 예전처럼 말이야. 그럼 어디 한번 살려보자고, 우리 센터.”

헬스장이 너무 잘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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