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58화 (58/200)

58. 옛날이야기

“참 많이 변했어.”

“그러게요. 명동이 코로나 이후로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요놈아!”

복희 할머니는 웃으며 내 등을 찰싹, 때렸다.

“그것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쇠락하게 되었지만, 명동에 한국 증권거래소가 있었을 때는 이곳 거리에는 문자 그대로 돈이 넘쳐흘렀어.”

“할머니는 건설주에 투자하셔서 큰돈을 버셨죠?”

“처음 시작은 건국 채권이었어. 때마침 정부가 수출지향적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했었지. 슬슬 돈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 하지만 진짜 기회는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단다.”

“오일쇼크.”

나는 알고 있는 대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그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쓰러지기 직전의 권투 선수처럼 나라 경제가 휘청였어.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하긴 그 대단하다는 미국조차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단다. 그전까지는 저유가가 상식인 시대였으니.”

첫 만남 이후로 매일같이 복희 할머니의 집을 드나들었다.

장영복 회장과의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말했듯이 나에 대해 미안함이 있어서일까.

그 둘 다 아니라면, 정말 나를 한번 가르쳐 볼 만한 그릇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할머니는 나를 스스럼없이 친손주처럼 대해주었다.

오늘은 곰탕을 먹고 싶다는 복희 할머니를 모시고 명동거리로 외출한 참이었다.

길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 중에 우리를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겠지만, 만약 봤다고 한들 그저 할머니와 손주가 나들이를 나왔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이 작은 노인이 조 단위의 재산을, 그리고 내가 500억대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손자에게 자상하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복희 할머니의 일화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참 재밌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단다. 나라를 살릴 수 있는 탈출구가 열린 거야.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앞세워 중동으로 많이 건너갔지. 산유국들은 기름값을 올리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거든. 냄새가 났어. 사막에서 피땀을 흘린 이들이 고국에 혼자 돌아오지 않겠구나. 기름 묻은 달러도 같이 오겠구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지. 막대한 외화자금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왔어.”

“위기가 기회가 된 격이었네요.”

“그 말이 참말이지. 진짜 돈을 벌 기회라는 건 항상 남들이 우는소리를 할 때 생기는 법이야.”

복희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돈들이 어디로 갔겠니? 자산시장에 모두 쏠렸어. 바야흐로 부동산 투기 붐이 분 거지. 미리 건설주에 투자해두었던 나는 아주 큰 재미를 보았고. 자고 일어나면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니. 아이야, 우리 잠깐만 저기에 앉자꾸나.”

나의 부축을 받아 느리게 걸음을 걷던 복희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벤치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복희 할머니의 입에서는 에구구, 소리가 나왔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전까지 유창하게 세계 경제를 복기하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복희 할머니는 주먹으로 자기 무릎을 탁탁, 몇 번 쳐댔다.

“공자가 말하길 일흔이 되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참 우스워. 막상 세상을 잘 알게 되었더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셈이거든.”

“제가 차로 모시고 가도 되는데.”

“바깥바람 쐬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다. 두 다리가 움직이면 걸어야지. 그나저나 할미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건설주로 큰돈을 버셨다고요.”

“그래. 사 놓았던 주식을 정리한 뒤에는 재산의 절반을 헐어 부동산을 사들였다. 남은 돈으로는 몇 년을 묵혀두어도 끄떡없을 것 같은 우량주들만을 골라 담았어. 그리고도 현금이 남아 우수리는 이곳 명동 사채시장에 풀었다. 어느 순간 세상이 나를 명동의 차 여사라고 부르더구나.”

과연 복희 할머니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를 만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흥미롭지 않은 게 없었다.

나와 할머니를 무심히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소리 높여 호객하는 장사꾼들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세상에는 나와 복희 할머니,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있었다.

“딱 90년대가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야. 그 후로는 부동산 몇 개만 내버려 두고 나머지는 다 정리했어. 찾아오는 사람만 만나며 유유자적 살았지. 공덕 좀 쌓아보겠다고 이리저리 좋은 일에도 돈을 좀 쓰면서.”

“승승장구만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 한국의 금융시장에 새로운 괴물들이 등장했어. 기관이니 외국인이니 하는 것들 말이야. 그 공룡들과 싸워봐야 승산은 기껏해야 반반이라고 생각했어.”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아셨네요.”

“그래. 덕분에 아직 천수를 누리고 있는 거지.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졌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같은 과거의 큰 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어. 그런데도 예전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무리를 하다가 모든 걸 잃고 망가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야.”

문득, 복희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도 떠들었더니 할미 입이 다 부르트겠다. 그래, 이 할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느냐?”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이 날카로웠다.

결코 단순한 감상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선 돈 버는 데 마법 같은 비결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기는 것보다 그 승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는 수성(守城)이 더 중요하다는 걸.”

“그래? 어디 더 이야기해 보거라.”

복희 할머니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든 눈치였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전성기로 단번에 자산을 불렸던 오일쇼크 때를 말하지만, 저는 그 이후에서 정말 배울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째서 그렇지?”

“그때 짧은 기간 동안 재산을 수십 배 불리셨다고 했죠?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 짜릿한 성공의 맛을 절대 잊지 못할 거에요. 자신도 있을테고, 자기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엄청난 성과도 이뤘으니 말이에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할머니가 입고 있는 패딩의 옷깃을 여며드렸다.

“아마 신이라도 된 기분이겠죠. 모든 것이 다 자기 뜻대로 될 것 같고. 하지만 열 번을 이겨도 한번을 지면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게 돈으로 하는 놀이 아니던가요?”

복희 할머니의 양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것은 분명 내가 이 수업의 열등생은 아니라는 증거일 테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러지 않으셨죠. 누가 들으면 그게 무슨 비법이냐 싶은 정석적인 투자만 하셨어요. 물러나는 시기까지 완벽했으니, 결과적으로 욕망을 너무나 훌륭하게 통제하신 거죠.”

하하하━

복희 할머니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요, 개호주! 요놈.”

복희 할머니의 날카롭던 시선은 어느새 자애가 가득한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네가 깨달은 것을 잊지 마라. 영원히 이기기만 하는 인간은 없어. 설령 천운으로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음 앞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 아니더냐. 명심하거라, 단 한 번만 삐끗해도 천 길 낭떠러지일 수도 있다는 걸.”

*

할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곰탕집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상황을 보니 이거 20,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 줄이 너무 긴데요. 어디 앉아 계실만한 곳도 없고. 오늘은 다른 것 드시는 게 어때요?”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여기서 다신 밥을 먹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하세요. 이 집에 무슨 각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지금은 아들 내외가 하고 있지만, 이전에 주인 여자와는 꽤 친분이 있었지. 예전에 두 다리가 튼튼할 때는 명동거리에 나올 일이 있으면 꼭 끼니를 여기서 때우곤 했었단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 보세요.”

나는 길게 늘어서 줄을 만들고 있는 인파를 헤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골탕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게 안이나, 밖이나 혼잡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카운터에서 막 계산을 마친 종업원을 붙잡고 말했다.

“저, 바쁘신데 죄송한데. 저희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밖에서 계속 기다리시기가 힘든데 혹시 전화번호 좀 적어놓으면 연락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는 그렇게 못 해드려요.”

“그럼 이 의자만 잠깐 빌려도 될까요?”

나는 카운터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종업원은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거린 후 빠르게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대단한 맛집이길래 이렇게 장사가 잘될까?

“할머니, 여기 의자에 앉아 계세요.”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을만한 곳에 의자를 내려놓고 복희 할머니를 앉혔다.

“저는 저기 줄에 가서 서 있을 테니까···”

곰탕이면 테이블 회전이 빠를 법도 한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대기 줄은 영 줄어들지를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을 때,

“아이고━! 아이고━!”

어디선가 곡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 노파가 의자에 앉아있는 복희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노파는 그렇게 몇 분을 내내 꺽꺽대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곰탕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곰탕집 안에서 웬 중년의 남자가 부리나케 튀어나와 복희 할머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줄에서 빠져나와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저희가 몰라뵈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아니야, 내가 여기 온 걸 가게 안에 있는 자네가 무슨 수로 알았겠어? 자네 모친에게도 내가 공연히 꾸짖지 말라고 말했구만···”

“들어가시죠. 날씨가 춥습니다.”

“먼저 온 손님들도 기다리시는데 난 여기 좀 앉아있지 뭐. 그리고 길에 있으니 이렇게 몇 년 만에 자네 모친도 만나고. 그게 얼마나 고맙고, 반가워.”

“아이고, 안 됩니다. 어르신. 그러다 어머니가 저를 경을 치십니다.”

남자는 할머니 곁에 다가선 나를 보고서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어르신 손자분인가요?”

남자의 말에 복희 할머니는 푸근하게 한번 웃고는 대답했다.

“그래. 내 손주야. 아주 인물이 좋지?”

”예. 정말 훤칠하시네요. 어르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금방 식사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후다닥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까 말씀하신 곰탕집 사장이에요? 할머니에게 엄청 깍듯하네요?”

“저 친구 자당을 내가 예전에 도와준 적이 있지. 가게가 어려울 때 내가 세를 몇 번 눈 감아 준 적이 있어. 내 입에 맞는 가게인데 돈에 쫓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길 원하지 않았거든.”

“세라고요? 그럼···”

“그래. 내 것이야. 이 건물.”

고개를 돌려 1층에 곰탕집이 입주해 있는 건물의 층수를 세어보았다.

1층, 2층, 3층···

명동 노른자 한복판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의 주인이라니.

새삼스럽게 복희 할머니의 머니 파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을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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