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실전 (1)
“··· 네가 조금만 더 나를 빨리 찾아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복희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당신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있었다.
“이 할미를 따라다니면서 뭔가 얻은 것이 있느냐?”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할머니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그전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깡통이었다는 걸.”
한 움큼 먹은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해서일까.
아니면 나의 말이 기특했을까.
복희 할머니의 얼굴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앞으로 더 많이 가르쳐주세요. 그러려면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래··· 아무렴. 그래야지.”
“좀 괜찮아지신 거 같으니, 오늘은 저 그만 일어날게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영수야.”
복희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이 할미의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부탁이요? 예, 말씀하세요.”
“그래. 돈 이야기다.”
“··· 얼마 필요하신데요?”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다.
애초에 내가 가진 돈이라야 복희 할머니에게는 속된 말로 껌값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름의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린 것이다.
“간단한 심부름이다.”
갑자기 복희 할머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고통에 시름 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손주 재롱 보듯 날 대하던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채권을 담보로 빌려준 돈이 있다. 그 돈을 좀 받아올 수 있겠느냐. 심부름 값은 섭섭지 않게 쳐주마.”
테스트구나.
단박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복희 할머니는 말 한마디 허투루 하시는 분이 아니다.
자신에게 배운 것이 있냐는 질문도 나에게 일을 맡겨보려는 빌드업의 하나였구나.
항상 말씀하시던 돈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지금 복희 할머니는 일거리를 하나 주고 내 그릇을 시험해보시려는 것일 터.
다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말씀하세요.”
“4년 전 일이다. 알고 지내던 사장에게 전환사채를 담보로 50억을 빌려준 적이 있어. 돈놀이할 생각은 없었고, 그저 도와준다는 마음이었지. 참 건실한 양반이었거든. 다행히 그 돈으로 발등의 불씨를 끄고 살아날 수 있었어.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50억을 태우고 한동안 잊고 지낼 수 있다니.
새삼 복희 할머니의 스케일이 느껴졌다.
“그런데 작년 여름에 그 양반이 갑자기 별세해버렸어. 집에 자식이라곤 서른도 안 된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자연스럽게 아버지 자리를 물려받았지. 그런데 늘그막에 얻은 외동아들을 오냐오냐 키웠는지 철딱서니라곤 하나도 없는 망나니야. 제 아버지가 산전수전 겪으며 알토란같이 키워낸 회사를 언제라도 말아먹고도 남을.”
“돈을 회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복희 할머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액수는 묻지 않겠다. 재주껏 받아올 수 있는 만큼만 받아와 봐. 할 수 있겠니?“
“예. 알겠어요.”
두말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나 역시 얼마나 내가 성장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돈이라는 총알로 싸우는 전장에서 내가 통할 것인가.
“회사 이름은 뭔가요?”
“신형제지라는 곳이다.”
“신형제지?”
낯선 회사다. 하지만 어디선가 분명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빗자루로 머릿속을 쓸듯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나의 자랑 중의 하나인 기억력은 금세 한 토막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예전에 읽었던 인터넷 기사였다.
신형제지는 종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지만, 그중에서도 골판지 박스를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쓸고 지나가면서 언택트 문화가 확산되었고, 택배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신형제지는 뜻하지 않게 큰 수혜를 입었다.
자연스럽게 주식시장의 불나방들이 이 회사에 달라붙어 제법 주목할만한 주가 상승을 보였었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를 기억하는 것은 사실 그런 재료들 때문이 아니었다.
경제면보다 신형제지의 이름을 더 화려하게 알린 것은 사회면이었다.
바로 복희 할머니가 말한 바로 그 망나니 아들이 주인공이었다.
이제는 신형제지의 젊은 사장이 된 그는 자신의 아버지 생전, 회사가 막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그 시점에 강남 한복판에서 차로 건물을 들이박았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건물 1층이 완전히 박살이 나는 큰 사고였다.
언론이 주목한 것은 사고보다 그 이후 망나니의 행보였다.
사고를 내고 어딘가로 줄행랑을 쳤던 그 망나니는 뻔뻔하게도 다음 날 저녁에야 경찰서로 자진 출석했다.
- 운전 미숙이요.
변호사와 함께 나타난 망나니는 제 입으로 단 여섯 글자만 말했다고 한다.
김 아무개 씨라고 언론이 밝힌 망나니의 정체가 신형제지 사장의 아들 김진우라고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진우는 원치 않게도 인터넷 세상 속에서 험악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유명세는 또 다른 폭로를 불러왔다.
학창 시절 그가 소위 말하는 ‘일진’이었다며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들이 속속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신형제지의 사장이 급사했다고 했나?
어쩌면 사망의 이유에는 아들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억측마저 들었다.
“제가 한번 처리해 볼 테니까, 제가 할머니의 대리인이라는 것만 그쪽에 확인만 시켜주세요. 그리고 심부름 값은 저랑 약속 하나 지키는 걸로 갈음하시죠.”
“약속? 무얼.”
“병원요. 할머니 병원 꼭 가보시는 겁니다.”
복희 할머니는 주름진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말년에 복이 있구나···”
*
경기도 안양.
신형제지의 본사가 자리 잡은 곳이다.
사전에 신형제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이곳에 왔다.
코로나가 가라앉으면서 자연스럽게 테마주들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신형제지의 주가 역시 한창때보다 많이 빠져있는 상태.
그래도 최근 3년간 영업이익이 매년 7%에서 15%까지 꾸준히 상승했고, 영업이익률도 11%에 달한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더니, 고인이 된 전(前) 사장이 얼마나 회사를 살뜰히 운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형편없는 인간이 오너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회사가 아직 건실한 걸 보면.
다만, 경영권에 있어서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사모펀드 하나가 주주로 크게 치고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주주로 이름을 올린 것은 정확히 사장의 사망 직후.
불과 1년 사이에 사모펀드는 신형제지 지분의 38%를 잠식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분명히 목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투자였다.
“안녕하세요. 한영수라고 합니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실에는 타이 없는 와이셔츠 차림에 중년 남성과 비단 같은 슈트에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넘긴 기생오라비 같은 젊은 남자가 각자 자리를 나누어 앉아있었다.
어느쪽이 개망나니인지는 바로 식별 할 수 있었다.
“아··· 예, 전화 통화로 말씀 들었습니다. CB 때문에 오셨지요. 저는 재무 책임자 신석현 상무라고 합니다.”
중년의 신 상무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에 반해 김진우는 보일 듯 말듯 그저 고개를 한번 까딱해 보였을 뿐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긴 저희 회사의 김진우 사장님입니다.”
김진우는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곤, 꼰 다리 끝을 까닥거렸다.
나는 김진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실질적으로 상대할 사람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인 김진우가 아니라 신 상무일 것이다.
나는 그저 받을 것만 받아서 돌아가면 된다.
김진우의 오만을 굳이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더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나는 신 상무에게 미리 준비해온 서류 봉투를 넘겼다.
“신형제지는 전환사채를 담보로 저의 위임자로부터 50억을 빌리셨지요. 위임자께서는 풋옵션으로 원금의 상환을 원하십니다.”
“예. 말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임 사장님께서는 생전에 채권자분이 은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 문제에 있어서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살피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으니 빠르게 처리해드리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뭐야.
의외로 일이 싱겁게 끝나겠군.
그때였다.
“상무님. 50억이라면서요. 말 몇 마디에 넙죽 그 큰돈을 넘겨줄 만큼 회사에 여유가 있습니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우리 회사를 믿고 기다려주신 분에 대한 도의적 차원에서···”
“이자 꼬박꼬박 냈잖아요. 들어보니 아직 만기도 되지 않았다면서요.”
조용히나 있을 것이지 갑자기 왜 끼어든 걸까.
채권에 붙은 이자라고 해봐야 1% 남짓.
이 정도면 거저 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장님, 선대인의 말씀도 있으셨고···”
“지금 이 회사의 주인이 누군가요. 저 아닙니까. 그럴 현금이 있으면 차라리 지금 지분을···”
“큼-!”
신 상무는 다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김진우의 말을 끊으려는 의도였다.
그 의도가 뭘 감추려고 하는지는 훤하게 보였다.
채권자 앞에서 회사의 위기를 제 입으로 떠들려고 하다니.
혀를 찰 노릇이었다.
“저기요.”
응?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김진우는 나를 지칭해 '저기요'라고 했다.
“어디 사채 하시는 사람인가 본데.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돈 내놓으라고 하면 곤란하죠.”
김진우는 아직도 가오를 잡던 일진 시절 속에서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험악하게 눈을 뜨고 협박조로 내게 말했다.
“그래서 상환을 못 하시겠다는 겁니까?”
“못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만기까지 기다리시란 말입니다.”
하하하━
내 입에서 기어코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회사는 앞으로 5년을 넘기기 힘들겠구나.
“그럼 별수 없네요. 전환사채를 모두 주식으로 돌리겠습니다. 몹시 번거로운 일이 되겠지만 계산기 두들겨보니 시장에 모두 던지면 원금 이상으로 배부르게 거둬갈 수 있겠더군요. 물론 50억 폭탄이 쏟아지면 신형제지 주가가 어찌 될지는···”
내 말에 신 상무는 입을 떡 벌렸고, 김진우는 나더러 왜 웃냐고 씨불여대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상무님. 근데 지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신 상무는 김진우의 말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한영수 사장님, 저희 사장님이 아직 경험이 없어서 실수가 많습니다. 원금은 최대한 빨리 준비할테니 조금만 시일을 주시지요.”
신 상무는 다급했는지 엉겁결에 속마음까지 튀어나와 버렸다.
··· 그런데.
“신 상무님! 지금 사람을 앞에 두고 뭐라 그러신 겁니까?"
김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이마빡에는 시퍼런 핏줄이 벌떡 선 채로 뭐가 그리 분한 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사장님, 그게 아니고요···”
“뭐? 실수? 경험이 없어?”
“사장님, 제발··· 나중에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
저 개망나니에게 교훈을 하나 주고 가자.
그것도 아주 값비싼 교훈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옥신각신하며 한 편의 희극을 찍고 있던 둘의 시선이 나에게 와 닿았다.
“100억입니다. 원금에 프리미엄까지 얹어주셔야겠습니다. 제 조건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사모펀드에 채권을 전부 양도하겠습니다.”
실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