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65화 (65/200)

65. 불량 채권 추심

“별일 아니야.”

글쎄.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것 같은걸.

대수롭다지 않다는 듯이 내뱉는 말과 달리 최화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유성처럼 반짝 스쳐 지나갔다.

“뭐, 그건 됐고. 그나저나 자기는 어떤 사람이야? 누군지도 모르고 옆에 둘 수는 없는 거잖아.”

내가 누구냐고?

한때는 중소기업을 다니는 회사원이자, 직장 상사의 갑질을 울분으로 씹어 넘기던 갑남을녀의 표상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500억대의 자산을 가지고 있고, 작지도 크지도 않은 헬스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다.

매달 통장에는 수천만 원의 돈이 꽂히고 있으며, 망해가던 회사를 하나 살렸다.

그래.

삶의 뿌리를 찾아 헤매던 이방인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구도자가 된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모두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는 복희 할머니가 보낸 사람입니다. 최 사장님은 담보를 잡는 데 익숙하시죠? 이것만큼 확실한 인보증이 있을까요.”

“··· 선생님이 보낸 사람이라.”

이 세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복희 할머니의 이름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최화란은 입을 일(一)자로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비록 은퇴했지만, 자기 스승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싶었다.

턱을 괸 채로 그녀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 그래. 좋아. 하지만 내 나름대로 자기에 대해 간을 좀 봐야겠어. 사실 지금 내가 아주 사소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하나 있거든···”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더 아픈 법이죠.”

최화란은 내 말에 짝하며 손뼉을 쳤다.

“그래. 자기는 어쩜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을 해? 딱 맞아. 손톱 밑에 가시.”

내가 보기에 최화란은 결코 삶의 농도가 옅지 않은 사람이었다.

분내와 향기로 몸을 뒤덮고 있는 그녀지만, 필요하다면 악취가 풍기는 음험한 수단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리라.

선과 악의 구분은 무용지물이요, 오직 돈이 정의인 것이 이 바닥.

그게 바로 최화란이 발을 담그고 있는 세상일 테니까.

그런 그녀에게 박혀있는 가시라면 크든 작든 절대로 만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최화란을 찾으면서 스스로 한가지 다짐을 했었다.

결코 그들이 사는 세계에 동화되지 말 것.

복희 할머니도 절대 뒷세계에서 사람의 고혈을 짜내는 방법을 배우라고 나를 여기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최화란에게 무언가 증명을 할 필요도,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만약 그 ‘골치 아픈 일’이 법의 테두리 밖의 문제라면 단호하게 거절하리라.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관찰하고 거기서 배움을 얻으면 그만이다.

“최 사장님은 음지의 실력자라고 들었습니다.”

“어머, 선생님이 나더러 그렇게 말씀하셨어? 기쁘네.”

정확히는 솜씨가 쓸만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실력이 있다는 소리와 크게 다르진 않겠지.

“그런 분이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라면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는 최화란에 대한 평가를 올려 치면서 다른 한 편으로 발을 뺄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최화란도 보통은 아닌지라 문어의 빨판처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적어도 선생님이 보낸 사람이라면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번뜩이는 걸 보여줘야지. 있잖아, 내 말 좀 들어봐.”

최화란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곧이어 구름처럼 그녀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지하 시장에서는 말이야, 10억이 있으면 그 어떤 더러운 뒤처리도 해줄 수 있는 건달들을 구할 수 있어. 100억이 있으면 정치인과 은행장들을 살 수 있고. 그 이상이 있다면 뭐···”

최화란은 곁눈질로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왜 내 말이 겁나니?”

“전혀요. 어쩌면 그런 게 정말 듣고 싶었던 이야기 인걸요.”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이 화란이도 선생님 밑에서 몇 년을 굴렀어. 선생님은 비열한 잔재주 같은 건 싫어하시니까. 이 바닥에서 나만큼 털어봐야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을걸?”

내 귀에는 최화란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여자의 몸으로 이 자리까지 오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털어봐야 먼지가 안 나온다는 말의 의미는 그녀의 투철한 준법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법을 세탁하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소리일 것이다.

“자기 앞에서 허세 좀 부려보자. 내가 말이야 이제 어지간해선 겁나는 게 없거든? 그런데 어깨 쫙 펴고 걷다가도 아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있잖아? 자기가 아까 물어본 젊은 애. 걔가 내 손톱 밑의 가시고, 작은 돌부리인 셈이야.”

그 젊은 놈이 대체 뭐길래.

통속적인 소리가 되겠지만, 나는 가능성을 하나씩 밟아 나갔다.

“혹시 사장님의 애인이라도 됩니까.”

“실망이다. 나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남자라면 불장난이라도 싫은걸. 고객이라고 해야 할까? 나한테 빚이 있어.”

빚이 있다기엔 그자의 행동은 너무나 당당했다.

내 눈과 귀로 보고 듣지 않았는가.

최화란의 수하가 젊은 남자 하나에게 절절매는 것을.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2가지 정도.

그자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거액을 빚지고 있어 오히려 함부로 대할 수 없다거나, 최화란이 손을 쓰기에는 너무 윗선이라거나.

“어디 재벌가나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라도 됩니까?”

“응, 이야기를 많이 따라왔는걸? 역시 내 후배답네.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도 이렇게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아. 비슷해. 하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힘든 사람의 자식이거든. ··· 내 쩐주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야.”

전주(錢主).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지하 금융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금동원력이라고 하셨다.

그 현금동원력은 전주들에게서 나오고 사채업자들도 그들의 손에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전주들 중에서 진짜 최고는 몇 안 되며, 그들은 은막 속에서 숨어 대한민국의 지하경제를 쥐락펴락한다고 하셨다.

“이런 표현 참 유치하지만, 그분이 돈이라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걸? 나야 운 좋게도 선생님의 후광으로 연이 닿을 수 있었지. 물론 신뢰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지금 최화란의 입에서는 얼마를 주고도 못 들을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양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왜 굳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썼느냐?”

“아니요. 그렇게까지 자조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화란은 깔깔 웃었다.

“들어봐. 이 화란이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내가 최화란에게 들은 이야기.

최화란이 모시고 있는 전주는 ‘강남 구 회장’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말처럼 구 회장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구동일.

구 회장은 젊은 시절 아내를 여의었는데, 한창 돈을 쓸어 담던 시절이라 아비로서 구동일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엄마를 잃은 어린 아들에게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그가 부정(父情)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선택했던 것이 바로 돈이었다.

아들이 필요하다면 액수도 묻지 않고 집히는 대로 돈을 쥐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 어긋난 부정은 구동일의 인생관을 망쳐놓았다.

세상의 어려움을 하나도 모른 채 소공자로 자란 구동일은 나이만 먹은 채로 성인이 되었고, 오직 삶을 주색잡기로 채워 넣게 된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오늘만 즐기며 사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면 구동일의 천성 자체는 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위 말해 팔자 좋은 한량인 셈.

구 회장은 그런 아들을 이제라도 바로잡아보고자 자기 밑에서 데리고 일도 시켜보았지만, 평생 해본 것이라곤 신선놀음밖에 없는 구동일은 아버지의 기대를 단 1%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구 회장은 결국 극약처방으로 아들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돈이 궁해지자 구동일이 찾은 것이 최화란이었다.

구동일은 최화란에게 온갖 이유를 대며 손을 벌렸다.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절대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며.

“안 빌려줄 수가 없었지. 그런데 나중에 전후 사정을 구 회장님을 통해 우연히 듣게 된 거야. 이거 자칫 나중에 나까지 큰일이 나겠구나 싶더라니까.”

“말하자면 불량 채권 같은 거군요.”

“맞아. 내 처지에서는 그거보다 더하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빌린 돈은 얼마나 됩니까?”

“3억 정도 될 거야. 내가 1원 한 장이라도 손해를 보는 걸 정말 못 참는 성격인데. 이 경우는 돈이 문제가 아니야.”

“돈을 빌려준 걸 구 회장에게 숨긴 게 문제가 되겠군요.”

“맞아. 자기 아들 기강 잡는데 내가 훼방을 놓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여차하면 나에게도 회초리를 휘두를지도 모르지. 그거 진짜 심각한 일이다?”

재산이 많건 적건 자식 문제에 예민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 회초리지 전주가 이 일을 추궁하며 최화란을 손절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로서는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될 것이다.

“구동일이라는 사람이 돈을 갚고는 있습니까?”

“갚기는 무슨··· 괜히 이쪽에서 돈 갚으라는 말이라도 먼저 꺼냈다가 제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갈까 봐 입도 뻥끗 못 하고 있지.”

“확실히 사장님이 중간에서 곤란할 만하네요.”

“그렇지? 자기 생각에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흥미로운 이야기다.

내 예감은 이 이야기에서 크게 얻어갈 게 있을 거라고 나를 충동질을 해댔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깨달은 요즘이다.

출생의 비밀은 내게 고윤아를 만나게 해줬고, 고윤아를 통해서 무려 태상 자동차 그룹의 회장인 장은호와 연을 맺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연은 나를 복희 할머니에게까지 끌어주었다.

만약 여기서 지하경제의 제왕과 끈이 닿게 된다면?

머리 쓰기에 따라 이건 아주 좋은 기회다.

단순히 최화란을 위해, 그녀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돈을 대주는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 큰손 아버지와 철없는 아들··· 3억···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짱구를 열심히 굴리는 나를 최화란은 호기심과 기대감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정적이 계속되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이거다!

이거면 구동일이 빌려 간 돈을 모두 받아내는 것은 물론이요, 잘하면 구 회장에게 3억보다 훨씬 더 큰 빚을 안겨줄 수도 있다.

“최 사장님.”

“응?”

“구 회장을 직접 제가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최 사장님도 동행하고요.”

최화란의 눈이 과장하나 안 보태고 두 배는 더 커졌다.

“회장님을 만나서 뭘 어쩌려고?”

“돈 안 받으실 겁니까? 3억 말이에요.”

“여태껏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무슨 수로 회장님한테···”

“말해야죠. 당신 아들이 우리에게 빚이 있다고.”

“자기, 제정신이야?”

최화란은 붉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고, 나는 그녀를 보며 여유 있게 웃었다.

“불량 채권 추심 해보셨겠죠?”

“내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해? 당연히 우리 주 업무 중에 하나지.”

“그럼 출발하시죠. 불량 채권 회수 받으러요. 구 회장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습니다.”

계산을 해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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