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미스터 오닐
“미스터 오닐. 여기도 아니군요.”
또 공쳤다.
며칠간 앨런 오닐과 함께 서울 시내에 있는 국제 입양 기관을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어디서도 입양되기 전 앨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진척이 없었다.
열심히 출구를 찾으려 움직여도 제자리인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우리 둘은 빈손으로 다시 거리에 나왔다.
앨런 오닐은 자신의 한국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쯤 살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설령 그가 무언가 기억해낸다고 해도 거의 30년 전 이야기.
강산이 바뀌어도 무려 세 번이니, 미스터 오닐을 입양 보냈던 기관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양 당시에 서류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혹시 양부모님께 여쭤보셨습니까?”
나의 말에 앨런 오닐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제 부모님들은 정말 좋은 분들입니다. 한국어로 표현이 있던데···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한··· 그···”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요.”
“예. 맞습니다.”
앨런 오닐은 내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자 손뼉을 쳤다.
장갑을 끼고 있는 탓에 그의 손뼉에서는 시원한 박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퍽, 하며 퍼지는 먹먹한 소리는 지금 그와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제가 한국을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투자은행 시절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니 미국에서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며칠을 같이 시간을 보내고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앨런 오닐은 일에 있어선 냉철한 사람일지 몰라도 마음까지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이니 차마 자신의 입양서류를 보여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겠지.
마치 내가 신부님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할 때 많은 고민을 했던 것처럼.
“아무튼 저 때문에 괜히 미스터 한을 고생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앨런 오닐은 몇 번이고 나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분명한 건, 남에게 실례를 끼쳐가면서도 포기를 하지 않으니 그가 이 일에 정말 간절하다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저도 미스터 오닐이 뭔가를 찾고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그나저나 저번에 미스터 한의 분석은 정확했습니다.”
내 차에 올라타며 앨런 오닐이 말했다.
“분석이요?”
“윤 회장님과 함께 있을 때 말입니다.”
“아··· 건설업 이야기. 잘 알고 한 소리는 아닙니다. 그냥 회장님이 계속 물어보기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No. 사실 우리는 미스터 한이 분석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고왕 건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리고 차를 세웠다.
말은 정보전달의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그 정보라는 것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청자가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흘려듣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소리다.
앨런 오닐은 방금 ‘우리’라는 말했다.
그건 단순히 그의 사견이 아니라 OI 회사 차원에서 고왕 건설에 대해 내린 판단이 있다는 의미겠지.
궁금해졌다.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값진 이야기일 테니까.
“듣고 싶습니다. 미스터 오닐이라면 저보다 그런 쪽에 훨씬 더 식견이 밝으시겠죠.”
“앨런이라고 불러주세요. 미스터 말고··· 그런데 식견이 무슨 뜻입니까?”
“잘 안다는 소리입니다.”
“식견··· 그렇군요. 예. 고왕 건설은 굉장히 그··· crisis 합니다. 지금 그들은 몇 개 안 되는 계열사와 윤 회장 개인 자산에서 자금을 긴급 수혈해 겨우 연명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렇게나 안 좋습니까?”
“조만간 기사가 나올 겁니다. 유상증자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뭐라고 발표할지는 모르지만, 채무상환 자금 마련 용도이니 미스터 한이 혹시 고왕 건설 주식을 갖고 있다면 모두 파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혹시··· 고왕 건설이 쓰러질 가능성도 있습니까?”
앨런 오닐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급순위 2위, 3위를 달리는 거대 건설사가 부도가 난다.
그렇게 된다면 국내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고왕 건설 그룹에 딸린 하도급들도 다 같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어디 거기서 끝이겠는가?
은행들.
고왕 건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에도 심각한 위기가 불어닥칠 것이다.
IMF 때도 한보그룹이라는 기업이 무너지면서 대참사가 불어닥쳤다.
고왕 건설이 제2의 경제위기의 트리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소리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럼 그렇게 진단을 내렸는데도 오션 인베스트먼트가 고왕 건설과 접촉을 한 이유가 뭡니까.”
침묵.
앨런 오닐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다 알면서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
“설마···”
“윤 회장님의 말과 달리 아직 우리와 고왕 건설은 협상 테이블에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 맞겠군요.”
앨런 오닐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고왕 건설에 대해 입을 닫았다.
아무리 회장이 방만하게 운영한다고 해도 고왕이 쌓아온 건설 쪽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부산에 국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뚝딱 지어내기도 했다.
결코 매력 없는 먹잇감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하하 속없이 호탕하게 웃던 윤일중 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 고왕 건설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지금 윤 회장은 자신이 투자라는 가면을 쓰고 언제든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호랑이와 한배를 타려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앨런, 일단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나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고 화제를 돌렸다.
앨런 오닐은 내 주변에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몇 마디 대화를 통해 나는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머릿속으로 막연한 예측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한다.
앨런을 돕고, 그의 마음을 얻어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 사실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평생 절 괴롭힌 기억이지요···”
앨런 오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이 타는 집이었습니다. 어떤 여자, 아마도 제 친모겠지요. 그 불길 속에서 저를 꼭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습니다. 숨을 못 쉬겠는데··· 나가야 하는데··· 마치 같이 죽자는 듯이 풀어주지 않더군요.”
앨런은 자기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어 보였다.
“아마 그때 생긴 흉측한 화상이겠지요. 어떻게든 어린 내가 그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대다가 생긴 흉터. 미국에 와서 양부모님의 손을 잡고 몇 번을 수술했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었습니다. 원래는 손가락이 모두 달라붙어 있었어요.”
앨런 오닐은 푸━ 하고 한숨을 내뱉더니 영어로 혼잣말을 했다.
“It's a terrible nightmare.”
“혹시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나 겨우 다섯 살 때 기억이라면···”
“아니요. 매일 밤 악몽을 꿀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어느정도 크고 나서 생각을 해보았어요. 어쩌면 같이 죽으려던 게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돈이 문제였겠지요. 내가 입양 보내진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고.”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면도를 시작했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곤 한다.
나이를 먹어도 그 구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그것을 메우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게 된다.
바로, 미움과 증오로 빈 곳을 채우는 것.
“그렇다면 이상하네요. 만약 앨런 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럼 왜 굳이 부모님을 찾는 겁니까.”
“이유···”
앨런 오닐은 한참 동안 내 말을 곱씹었다.
“복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죽이려던 자식이 이렇게 성공했다. 끝내 나는 살아남았다.”
··· 거짓말.
글쎄.
그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입양 기관을 나설 때마다 앨런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가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국어.
한국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는 그가 저리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한다는 건 후천적 학습 때문일 테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언젠가 자기 부모를 만났을 때,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엔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말은 앨런의 말은 핏줄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고 싶은 명분으로만 보였다.
“어쩌면 앨런 씨가 숨기려는 손, 그게 힌트가 될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시죠.”
*
한동안 매섭게 춥던 날씨가 풀렸다.
나는 복희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근처로 산책을 나왔다.
“그래서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왕 건설 말이에요.”
나는 할머니 무릎 위의 담요를 바로 해드리며 물었다.
“재료가 없으니 어떻게 정확한 진단을 내리겠느냐. 다만 네가 판단한 것이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아.”
“그럼 정말 고왕 건설이 부도가 날 수도 있을까요?”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거야.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어야지. 그 정도 공룡이 쓰러지는 꼴은 막으려고 정부에서 공적자금이 투입하겠지. 살려놔야 뜯어먹을 것이 있으니 여기저기서 간보는 것들도 달라붙을 거고 말이다.”
콜록콜록━
복희 할머니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할머니, 춥죠? 우리 들어가요.”
“아니야, 아니야.”
당신은 크게 손을 흔들며 온 힘을 다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병실 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
복희 할머니는 잎이 다 떨어져 헐벗고 있는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 모습이 혹시 당신과 같다고 생각하고 계실까?
가는 할머니의 손목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의사는 이미 복희 할머니가 자신이 예고했던 기대여명을 넘어섰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은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휠체어를 잡고 있는 내 손등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할머니의 손이었다.
“그 앨런이라는 사람과 연을 맺은 건, 사모 펀드가 짜놓은 판에 혹시 발을 들이밀고 싶어서이냐? 고왕건설에 대해 할미에게 말을 하는 본새를 보니 유난히 신경을 쓰는 것 같구나.”
? “예? 무슨요. 어디 저 같은 개인이 낄 판인가요. 그냥 제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가서 그런 거죠.”
“잠깐 이 할미 앞으로 와보지 않으련?”
할머니의 부름에 나는 휠체어 손잡이 놓고 당신 앞으로 가 몸을 낮췄다.
“어디, 우리 개호주 얼굴 좀 보자.”
복희 할머니는 내 눈을 골똘히 바라보셨다.
“··· 많이 컸구나.”
“할머니, 저 서른둘이에요. 이제 조금 있으면 서른셋이고. 인제 와서 크긴요.”
“할미가 그것도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할까! 눈은 마음의 창이야. 내 나이쯤 되면 사람의 눈만 봐도 보이는 게 있어.”
“그래요? 할머니 건강해지시면 우리 점집이나 차릴까요?”
“이 녀석이 농은··· 이젠 제법 큰일을 해볼 만한 태가 난다는 소리야. 그래··· 그것도 너 복이겠구나. 앞으로 고왕 건설을 계속 지켜보거라. 분명히 안팎에서 크게 흔드는 세력이 나타날 거다. 기회는 그때일 거야.”
“할머니, 제가 가진 거야 몇백억이 전부인데··· 뭐 당연히 엄청나게 큰돈이지만 대기업을 상대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걸요, 뭐.”
“녀석··· 말하는 것이 마치 돈만 충분히 있으면 뭐라도 해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복희 할머니의 눈이 초승달처럼 얇아졌다.
그날의 진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