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77화 (77/200)

77. 그날의 진실 (2)

센터장이 알려준 주소는 A 시의 외곽에 있었다.

개발이 전혀 안 된 곳이라는 센터장의 말처럼 야트막한 산비탈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였다.

개중에는 새로 지어진 듯한 주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낮은 천장의 오래된 가옥들이었다.

찬 바람 부는 혹한의 날씨를 홀로 버텨내던 겨울의 해는 이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이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서 뉘엿뉘엿 몸을 눕히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동네였다.

차가 얼마 다니지도 않는지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아예 꺼져 있었고, 지팡이를 진 노인들이 대문 앞에 나와 앉아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의 모습이 앨런이 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에 살았었군요.”

동네 어귀에서 앨런이 입을 열었다.

“뭐가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앨런은 머릿속의 작은 조각이라도 짜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노려보았다.

잠시 뒤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리곤 앨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것도요.”

다섯 살이면 작은 기억쯤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그의 머리가 스스로 그가 이곳에 살던 시절을 봉인해버린 것일까?

“일단 올라가 보시죠.”

센터장이 말한 곳은 달동네의 중간쯤이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이곳에서 모난 돌처럼 어색하게 자리를 잡은 단독 주택이었다.

터를 닦고 새로 지은 집인지 주변의 오래된 가옥들과 비교해볼 때 제법 위풍당당한 맛이 있었다.

딩동━

집을 들여다보고 있는다고 뭐가 나오겠는가.

나는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인터폰 건너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꿀꺽━

옆에서 앨런 오닐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와의 조우.

그에게 있어서 퍽 긴장되는 순간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예전에 여기서 살던 사람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

“예? 여기는 우리가 쭉 살았는데.”

“그러니까, 30년 전쯤에 이 자리에서 불이 났었다고···”

“···”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요. 우리가 집 짓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남의 집 앞에서 그러지 말고 가세요.”

“그래도 혹시나 들으신 게···”

“아니, 가시라니까. 안 가면 경찰 부를 거예요.”

뚝━

여자는 야박하게 인터폰을 끊어버렸다.

나는 앨런을 보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안다고 해도 좋은 일도 아니고···”

여자를 대신한 나의 해명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옛날 일은 왜?”

그때, 우리의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옆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와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뭐라고?”

“여기서 오래 사셨냐고 여쭤봤어요.”

“암··· 내가 나이가 이제 여든넷인데, 스무 살에 시집와서 여기서 평생 살았어. 아이고 지겨워··· 그런데 총각들은 왜 이 집에 관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럼··· 저 집에 예전에 살던 사람들도 알고 계시겠네요?”

“알고말고.”

됐다.

마침내 실마리의 끝을 잡을 수 있게 된 우리였다.

“할머니. 혹시 저 알아보시겠어요?”

앨런은 할머니에게 바짝 다가가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바심이 잔뜩 느껴지는 몸놀림이었다.

“총각을? 난 처음 보는데··· 가만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I lived in this town when I was five. Do you happen to remember my mother?”

마음이 급한 그의 입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에비씨 몰라.”

할머니는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앨런은 다급하게 말의 국적을 바꾸었다.

“앨런, 저는 앨런이라고 합니다. 저기에 다섯 살 때 살았고요. 그때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그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표정에서 간절함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앨런의 말을 듣자, 졸린 듯 거의 감겨있던 할머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가만··· 저기에 살았단 말이야? 그럼 네가 경민이라고? 옳아, 그래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더라니···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경민··· 그게 내 이름···”

“그래, 너는 경민이야, 김경민. 이놈아! 네 이름도 여태껏 몰랐던 거야? 어디 멀리 입양 갔다는 소리까지는 내가 들었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이리 와라, 들어와.”

할머니는 앨런의 손을 붙잡고 대문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

“미국에서 살았으면 커피 좋아하지? 이거 마셔.”

할머니는 커피믹스 두 잔을 타서 나와 앨런에게 내밀었다.

궁금한 게 많을 앨런은 뜨거운 커피를 거의 단숨에 들이마셨다.

“할머니, 듣고 싶어요. 제 이야기해 주세요.”

“그래··· 너는 어렸으니까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겠구나. 저 집엔 너랑 너희 엄마랑 둘이서 살았어.”

“그럼 아버지는···”

“그건 몰라. 경민이 엄마가 통 말을 안 했으니. 너 태어나고 얼마 안 있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만 들었거든.”

“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을까?

앨런은 자신의 숨겨진 역사 앞에 서서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자신은 대신해서 내가 그날의 일을 물어봐 주기를 간절히 청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할머니. 그날요. 불이 났던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응··· 그날.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할머니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는 조용히 할머니가 무언가 말을 꺼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분이 영원처럼 느껴지던 차에, 마침내 할머니의 주름진 입술이 떨어졌다.

“난 그때 집에 있었는데, 어디서 시커먼 연기가 들어오고 타는 냄새가 나더라고. 그래서 밖에 나가봤더니 이게 웬걸. 경민이 네가 살던 저 집에 불이 붙은 거야. 놀란 내가 세숫대야에다가 물을 받아다가 막 뿌렸는데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지.”

그때의 광경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할머니는 두 손을 꼭 모아쥐었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저기 경민이 혼자 있는데··· 아가가 저 안에 있는데. 도와달라고 소리를 막질렀어.”

“잠깐만요. 할머니. 제가 그때 혼자 있었다고요?”

앨런이 놀라 할머니의 말을 끊었다.

“아무렴.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 앞에 봉제공장이 작게 하나 있었어. 네 엄마가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놀라서 바로 뛰어가 데리고 왔는걸.”

“그럴 리가. 그건 분명히 기억나요. 엄마가 날 누르고 있었던 걸··· 빠져나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꼼짝도 안 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같이 죽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이놈아!”

그때, 갑자기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 과거에 애달파하던 노인은 앨런의 말을 듣자 얼굴이 붉어져 노기를 숨기지 못했다.

“네 엄마는 널 구하러 그 불구덩이 안에 뛰어 들어간 거야! 어디서 그런 못된 소리를···”

“예?”

할머니의 입에서 전해진 충격적인 사실에 앨런은 망치로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였으니까.

“사람들이 달라붙어 뜯어말리는데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다 뿌리치고 들어갔단 말이야. 아이고··· 불쌍한 경민이 엄마··· 그리고 살아서 나오지 못했으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못된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이놈아.”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앨런의 등을 힘없이 내려쳤다.

앨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별안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기억나. 이제 전부 기억나. 난··· 김경민”

*

89년 겨울.

다섯 살 경민이는 너무 지루하고 심심했다.

엄마가 없으면 늘 혼자서 지켜야 했던 집.

그래서 아이는 이 지루함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놀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야 했다.

오늘의 장난감은 성냥이었다.

칙━ 하고 긁으면 성냥 끝에 불이 타올랐고, 그걸 보고 있으면 경민이는 자기가 마술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가 있었으면 아주 크게 혼쭐이 났겠지만, 지금은 뭐, 혼자니까.

그렇게 성냥을 가지고 한창 놀고 있을 때였다.

“아야, 뜨거워!”

불꽃에 매료된 경민이가 그만 입으로 후 불어 불을 꺼야 할 때를 놓쳐버렸다.

불은 성냥의 아랫부분까지 옮겨붙었다.

자연히 성냥을 쥐고 있는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뜨거움 때문에 경민이는 그만 성냥을 떨구고 말았다.

하필이면.

성냥은 신문지 위에 떨어졌다.

엄마가 챙겨 먹으라고 차려준 밥상 위를 덮어놓은 신문지였다.

불은 금세 신문지를 태우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경민이는 어떻게든 불을 꺼보겠다고 거기에 손을 댔다.

경민의 손이 닿은 신문지는 쉽게 바스러졌고, 아직 불씨를 담은 재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집안 곳곳을 불길이 살라 먹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당장 집 밖으로 튀어 나가야 할 상황이건만, 경민이는 이제 겨우 다섯 살.

자기 때문에 집이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바닥에 엎드려 작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울고만 있었다.

애타게 엄마만 찾았다.

어느새 집안에는 검은 연기가 가득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경민의 의식이 깜빡이며 흐려져 가고 있을 때.

“경민아! 경민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경민의 엄마는 울부짖으며 불길 속에서 아들을 찾았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경민아!”

마침내 아이를 발견한 그녀는 얼른 자신의 품 안으로 들쳐 안았다.

“경민아, 엄마가 왔어. 숨 쉬어. 안돼··· 우리 아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매일 같이 먹고 자던 집인데 현관이 어딘지 조차 찾을 수도 없었다.

지옥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녀였다.

우직━

살갗이 타들어 가는 뜨거움과 숨을 콱콱 막히게 하는 죽음의 연기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녀의 등짝 위로 불길에 부서진 천장 합판이 떨어졌다.

“악!”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화마를 이기지 못하고 삽시간에 증발해 날아가 버렸다.

“경민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널 살려줘야 하는데··· 내가 널 혼자 집에 둬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꼭 안은 채로 바닥을 기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아이만··· 우리 아이만이라도 제발 누가 구해주세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다 해 경민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리고, 경민이의 한쪽 팔이 엄마의 품 밖으로 힘없이 툭 튀어나왔다.

“여기 사람 있어! 빨리!”

소방관들이 집 안을 부수고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불과 몇 분 뒤였다.

*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앨런은 잊혔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기억의 재현을 끝낸 그는 두 팔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사람이 낸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서러운 울음이었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난 거야? 아이고··· 불쌍한 것··· 경민이 엄마, 애가 이렇게 컸는데 이걸 못 봐서 어쩌누···”

할머니는 앨런의 등을 감싸 안고 같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앨런이 찾아 헤매던 진실의 끝에는 지독한 비극과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진실을 알아버린 그의 삶은 예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마치 내가 그러했듯이.

어느새 밖에는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할머니, 나의 할머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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