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80화 (80/200)

80. 할머니, 나의 할머니 (3)

전혀 상정해본 적 없는 지독한 상실감과 슬픔이었다.

그 늪 속에서 저항할 의지조차 잃은 채 멍하게 서 있었다.

지나친 감상에 빠지면 안 된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때마다 그 다짐들은 손에 쥔 모래들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장례의 마지막 절차만이 남아있었다.

할머니의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어 있었다.

유 변호사의 말로는 당신이 이미 10년 전에 미리 점 찍어둔 곳이라고 했다.

복희 할머니가 직접 골랐으니 어련했건만, 험하지 않은 산세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듯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엔 한탄강을 지류로 하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어르신이 고향과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다고 정한 자리입니다. 이 산 전체가 어르신의 재단인 선재 장학회의 명의로 되어있습니다.”

“··· 자리가 좋군요. 모르는 제가 봐도 그래요. 배산임수라고 하던가요.”

“예. 일단 외진 곳이라 주변에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죠. 다 떠나서 일단 풍경이 시원시원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풍수 지리학 박사가 잡아준 곳인데 어르신은 그저 듣고 한번 웃고 마셨지만, 음택풍수로는 후손이 만세의 복락을 누릴 자리라고 하더군요.”

장지로 가는 야트막한 언덕길은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잘 닦여 있었다.

아니, 할머니라면 분명히 이 모든 걸 미리 준비해놓으셨을 테지.

혹여라도 자신의 관을 옮기는 사람들이 발을 헛디뎌 다치는 일이 없도록.

다행히 하늘은 할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환하게 열었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날을 추울지언정,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일꾼들이 복희 할머니의 관을 조심스럽게 하관했다.

장지까지 따라온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던 국화꽃을 관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

그들 중에는 최화란도 있었다.

그녀는 빈소를 삼 일 내내 지켰으며, 이곳까지 운구차를 타고 따라온 참이었다.

나는 상주로서 그녀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영수 씨 취토(取土)하시죠.”

유태성 변호사는 나에게 삽을 건넸다.

나는 봉분의 뼈대가 되기 위해 쌓여있는 흙무더기에서 흙을 한 삽 퍼 관 위로 뿌렸다.

최대한 예의를 다할 수 있도록 아주 느리고, 정성스럽게.

그리고 한번 더···

“아이고··· 아이고···”

귓가에 꿈결처럼 최화란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흙을 퍼 날랐다.

얼굴에서 땀이 솟아나 내가 흘리는 눈물과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영수 씨,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제 일하시는 분들이 맡으실 겁니다.”

유 변호사가 내 팔뚝을 잡아 제지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내 동작을 멈출 수 있었다.

마침내 고인의 마지막을 기리는 모든 절차가 끝났다.

제사상을 차려놓고 성분제(成墳祭)를 지냈다.

할머니, 그동안 너무 힘드셨죠.

그곳에서 할머니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시길 바랄게요.

전쟁 때 잃어버렸다는 가족들도요.

저는 계속 살겠습니다.

할머니에게 배운 것들을 절대 잊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당신이 남긴 유언처럼요.

나는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하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봉분 앞에 남은 것은 나와 유태성 변호사였다.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어르신 입으로 말하는 걸 쉬쉬하셨지만, 생전에 많은 사람에게 덕을 베푸셨으니까요.”

“그래야죠. 할머니는 저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당신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영수 씨 때문에요. 전쟁통을 피해 혼자 남한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평생 홀몸이셨죠. 감히 말씀드리자면 고독한 삶이셨을 겁니다. 하지만 말년에 영수 씨가 당신의 삶에 나타난 것에 참 감사해하셨어요. 자식을 낳으신 적은 없지만 영수 씨를 늦둥이라고 여기셨어요.”

그것이 어디 복희 할머니뿐이었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당신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모정(母情)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영수 씨, 내려가시죠. 살아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밥도 먹고, 잠도 자야죠. 그렇게 어르신의 유지를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영수 씨는 운구차로 말고 제 차로 이동하시죠. 단둘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시골 마을의 왕복 2차선 좁은 도로를 운전하며 유태성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말을 하듯 그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어르신이 가장 집중하셨던 작업이 있습니다. 전국 단위로 퍼져있었던 당신의 재산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지요.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니.”

유태성 변호사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핥았다.

사실 가장 애를 많이 쓴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의 입술은 버석버석하게 갈라져 있었다.

“어르신은 애초에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실 생각이었습니다. 선재 장학회를 통해서요. 하지만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이죠, 그러니까 얼마 전 저와 공증인들을 불러 유언장을 수정하셨습니다. 영수 씨 때문에요.”

- 너라면 이 할미가 이룬 것들을 안심하고 맡길 테니까···

나는 할머니의 유언이 귀에 맴돌았고, 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이처럼 울며 떼를 쓰던 내 모습이 뒤이어 떠올랐다.

하늘을 우러러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할머니를 모시는 동안 그분의 재산을 탐한 적은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유 변호사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자 복잡한 심경이었다.

이룬 것들을 맡기겠다는 당신의 유언은 나에게 놀라움과 천박한 기쁨의 저 반대편에 있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부족한 내가 할머니가 평생을 바친 것을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아아···

운명은 도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이러는 것인가.

할머니의 상속은 시작도 전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드리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지만,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났으니 어르신의 유언장의 내용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생전에 당신의 의지로 재산 일부를 장학 재단으로 옮기셨습니다. 대부분 부동산 같은 것들이지요. ··· 그리고 이제 영수 씨가 어르신을 대신해서 선재 장학회의 이사장 자리를 물려받게 되실 겁니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선재 장학회는 어르신이 출연한 재산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리고 태상 건설의 지분을 5.6% 소유하고 있습니다. 태상의 장영복 회장이 4.8%의 지분을 과거에 기부했었고 어르신이 거기에 조금 더 더했습니다.”

허.

태상 그룹이 또다시 내 삶에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이사장 자리에 오르게 되면 ‘비공식적’으로 태상 건설의 대주주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 이렇게 되는구나.

은호 형님이 알게 되면 기뻐하겠군.

설마하니 장은호 회장이 여기까지 계산을 했겠느냐 마는, 결국 나는 그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와 태상, 그리고 장영복 회장의 뒷이야기를 알 리 없는 유 변호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재단의 주 재원은 태상 건설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과 부동산 임대업 수익입니다. 이사장으로 취임하면 따로 보고받으시겠지만 주 사업으로는 형편이 곤궁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어르신께서는 기부나 사회봉사를 선재 장학회의 이름으로 많이 하셨구요. 그리고···”

유태성 변호사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선재 장학회는 비영리재단법인입니다. 앞으로 영수 씨가 재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면 큰 세제 혜택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 할머니께서는 그러려고 장학 재단을 만드신 게 아닐 텐데요.”

딱히 적의를 품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입에서 지금 나오고 있는 목소리는 힘없는 비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뱉어놓고 보니 자기 소임을 충실히 하는 유 변호사에게 실례가 되는 소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남긴 재산을 지키는 것도 상속자로서 영수 씨의 의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금 관리를 절대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큼━

유태성 변호사는 자기 말을 곡해하지 말라며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할머니가 하던 사업이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제가 맡겠습니다.”

“네. 서류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차차 준비하시죠. 그리고, 이사장직 외에도 어르신께서는 보유 중이던 자산을 전부 영수 씨에게 남기셨습니다. 우선 현금성 자산입니다. 규모는 6조 이상입니다.”

6조.

도대체 0이 몇 개나 붙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다.

입에 담기만 해도 불경죄로 매를 맞을 것 같은 천문학적인 자산.

나의 생부인 장영복 회장이 세금까지 포함해서 나에게 천억을 남겼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자식의 손자까지는 3대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복희 할머니가 내게 남겼다는 6조는 무려 그 돈의 6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아찔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더 무서운 것은 그 6조가 할머니 재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리 재단에다 돌려놓으셨다는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당신의 재력이 어느정도였을지 아득하기만 했다.

“양평에 작은 땅이 있습니다. 창고도 하나 있구요. 거기에는 미술품들이 있습니다. 감정이 필요하겠지만 대략 30억 정도 가치가 됩니다. 그것 역시도 영수 씨가 상속받게 되실 겁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동의 집입니다. 어르신이 살던 그곳 말입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집을 남겨주신 할머니의 의도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그 집은 단순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은밀히 오가는 곳.

권력과 돈이 거래되는 곳.

지하경제 대모의 왕국이었다.

어찌 상징적인 의미가 없겠는가.

- 나의 뒤를 잇거라.

복희 할머니는 나에게 왕관을 씌워주신 것이다.

내 손을 잡아끌어 황금으로 된 옥좌 위에 앉히신 것이다.

“제 생각보다 많이 담담한 반응이군요.”

유태성 변호사가 흘낏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생각에 잠겨 무표정한 얼굴인 나를 보았을테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금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법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필요하시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증여세라면 이미 경험해보았다.

얼마나 나라에서 가혹하게 징수하는지.

하지만 할머니의 돈을 불법을 냄새를 묻히면서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할머니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유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나라에서 최고의 세무사들을 구해 최대한 손실을 막아보겠습니다. 거기까지가 제가 할 일입니다. 저도 어르신에게 받은 은혜가 큽니다. 보은한다는 마음으로 차질 없게 준비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지하경제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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