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83화 (83/200)

83. 우리는 지구와 달과 같이

어렴풋이 잠이 든 고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게 앞으로 뻗어있었다.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와 입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고···

하지만 막상 벌어지고 나니 그 믿지 못할 일이 아주 오래전부터 미리 예견되어 있던 일 같았다.

고윤아는 서툴고, 수줍게 나를 받아주었다.

그녀의 어깨 위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안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물을 한잔 마시고 거실 창밖으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빈틈없이 꽉 차 둥근 제 원래 모습을 선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영수 님.”

내 기척에 잠에서 깼는지 고윤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을 파고들었다.

고윤아의 체온이 따듯하고, 뭉클했다.

그 체온은 저 둥근 달처럼 내 마음의 모난 부분을 깎고 다듬어 둥글게 만들었다.

“··· 깼어?”

고윤아는 나에게 더 이상 경어(敬語)를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당연히 나 역시 그녀에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이 편하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를 처음 ‘윤아’라고 불렀을 때 어색함에 멋쩍어 나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관계의 진전을 의미하는 호칭에 금세 익숙해졌다.

앞으로 그녀와 나는 더 많은 것들에 익숙해져야겠지.

우리는 잠시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고윤아였다.

“저 달이 되고 싶다고.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영수 님의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말이 참 예쁘네.”

광원이라곤 오직 달빛뿐인 거실에서 고윤아의 모습은 흑백사진처럼 음영으로 구분이 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설령, 영수 님과 제가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언가가 되어 버렸네.”

우리 둘은 같은 얼굴로 함께 웃었다.

“윤아야.”

나의 부름에 고윤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또 한 번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도 네가 저 달처럼 언제나 옆에 있어 줬으면 해. 앞으로도 날 계속 도와줬으면 해.”

“하지만 ··· 아까 말한 것처럼 저는 더 이상 내세울 만한 간판이 없습니다. 아마 주요 로펌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고윤아의 손을 쥐고 있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은수.

아무리 대단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가 한 사람의 인생이 이리 멋대로 재단해도 되는가.

그의 선전포고는 잘 전해 들었다.

“과연 장영복 회장, 나의 생부가 광월 소속 변호사라는 이유로 윤아를 옆에 두었을까?”

“...”

“너만 괜찮다면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장학회의 고문 변호사로 있어 줬으면 좋겠어. 물론 이사회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만, 할머니 때부터 이사회는 그저 조언만 할 뿐이지 이사장이 거의 모든 의사를 결정하고 있었다고 해. 가능할 거야. 급여는 내가 어떻게든 보전해줄게.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날 계속 도와줄 수 있겠어?”

“영수 님이 원한다면···”

고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려 할 때 고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영수 님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나?

원한다면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겠지.

그만큼의 재산이 있으니까.

내 밑에 깔린 돈만 세며 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왕에 장학 재단의 이사장이 된 김에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누군가, 어쩌면 고윤아를.

나의 반려자로 맞이하여 아름다운 동화 속 결말처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피와 운명의 이끄는 충동질을 더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개호주는 대호가 될 것이다.

세상을 경영해보고 싶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 나만의 방식으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보려고 해. 우선 명동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할 거야.”

“이사 말입니까?”

“응. 거기서 계속 생활한다는 건 아니고, 당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앞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쓰려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니까.”

“··· 그렇군요.”

고윤아의 목소리가 영 밝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고윤아는 내가 평범한 삶을 살기를 누구보다도 바랐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갈 것이다.

비록 그 길이 부조리와 고난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일지여도 정상까지 올라갈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고윤아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내 품 안에 자기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윤아, 네 도움이 앞으로 더 많이 필요해질 거야.”

고윤아는 말없이 내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매서운 추위가 우릴 덮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영수 님이 어디를 가시던 함께 하겠습니다.”

아아···

장영복 회장이.

나의 아버지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고윤아였다.

*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무섭게 나는 앨런을 찾아갔다.

이곳저곳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니 앨런의 이력은 내 생각보다 훨씬 화려했다.

전미 최상위권 보딩스쿨을 졸업했으며, 프린스쿨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까지 수료한 인재였다.

그렇다고 학벌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GM 투자은행의 최연소 파트장이었으며, 사모펀드로 이적한 후에는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진 한 일본의 맥주 브랜드를 인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불과 3년 만에 매출을 300% 올리고 재매각한 성공적인 이력도 있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오! 미스터 한.”

오닐은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까지 나와서 나를 환대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

“이제 악몽에서 벗어난 모양이군요.”

그와 악수하며 물었다.

오닐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더 이상 불길 속에서 고통받는 어린아이는 없습니다.”

“그건 어떻습니까. 많이 자책했었잖아요. 자신을 용서하게 되었습니까?”

“아직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도 미스터 한이 해준 말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생을 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 올라가서 말씀 나누시죠.”

세계적인 사모펀드 회사답게 이곳의 직원들은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파티션 사이로 낯선 사람인 내가 하릴없이 지나다님에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거나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들기고 있을 뿐이었다.

앨런의 사무실은 별도의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컴퓨터 책상에는 무려 넉 대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모니터 안에는 각종 차트를 비롯해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래프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앨런은 다정하게 내 팔을 끌어 나를 응접실에 앉혔다.

“오늘은 장갑을 안 끼셨네요?”

“예. 더 이상 이 흉터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울던 앨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을 기점으로 앨런은 분명히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졌으리라.

“오늘은 제가 앨런에게 조언을 좀 구하려고 왔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로요.”

“오! 얼마든지요. 하지만 이곳의 경제에 대해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있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그 직원 중 한 명을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앨런에게 듣고 싶습니다.”

“예. 좋습니다.”

“만약에 저한테 자금이 어느정도 있다고 하면, 전문가로서 혹시 추천해줄 만한 투자 비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에둘러 말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됩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가 전부 serious 한 상황이니까요.”

일반적인 이야기다.

나는 오늘 이런 말을 듣기 위해 앨런을 찾은 것이 아니다.

순진무구한 질문이나 하겠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계획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 스텝으로 투자회사를 차릴 생각이었다.

복희 할머니는 주식 투자와 대부업으로 일가를 이루셨다.

그것을 오늘날의 방법으로 이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그게 어디 되겠는가?

나에겐 최고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다행히 지금 나의 밭에는 최고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씨앗이 뿌려져 있었다.

앨런 오닐이.

“아,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 말이 너무 막연하지요. 한국 내로 한정하면 추천해드리고 싶은 기업은 있습니다.”

앨런은 자신의 대답이 영 성치 않았다고 여겼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천할 만한 투자처라··· 구미가 당기는데요?”

“예. 미스터 한은 개인 투자자시니 포트폴리오에 포함하셔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는 태상건설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또 태상인가.

다분히 허탈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 미스터 한. 무슨 문제라도?”

앨런이 의아한 표정이 되어 눈을 둥글게 떴다.

“아닙니다. 한번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 태상 그룹은 아직 chief만 있을 뿐 owner가 없습니다. 그룹 내부에서 경영권 다툼이 예상되고요. 태상건설이 태상 그룹의 core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가 미래의 owner 자리라고.”

“총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태상건설 주식을 사들이다 보면 자연히 주가가 올라갈 거라는 말을 하는 거군요.”

“exactly! 역시 미스터 한입니다.”

“하지만, 그건 호재나 실적개선 없는 빈 깡통 아닙니까. 그렇게 가격만 올려놓으면 그 틈을 타 찍어누르려는 세력들이 나타날 텐데요. 공매도 같이···”

“소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앨런은 손가락을 검지를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카타르에서 1조 달러 이상이 투입될 어마어마한 사업이 있을 겁니다. ‘에메랄드 시티’라고 해양도시를 건축하는 거죠. 저는 그 사업의 일부를 태상건설이 수주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허━

등짝에 소름이 돋았다.

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단 한 번도 들은 적조차 없는 이야기다.

이러니 개미들이 공룡을 이길 수 있겠는가.

정보에서 이렇게 뒤처지는데.

“잠깐··· 그럼 혹시 지금 고왕 건설도 그 사업에?”

“No.”

앨런의 미간 사이가 찌푸려졌다.

오늘 만나서 그가 처음으로 보여준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경영진이 의지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자금 압박을 헤쳐가는 데 급급한 상황입니다.”

갑자기 대단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앨런은 목소리의 데시벨을 낮췄다.

“사실, 우리 회사도 고왕 건설에서 철수를 거의 결정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쌓아온 기술력은 아깝지만, 한국 정부··· 그러니까 금융감독원이 날 선 눈을 하고 우리를 주목하더군요. 혹여라도 외국 자본에 고왕 건설이 넘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입니다. 우리로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risk를 감수할 이유가 없지요.”

고왕 건설, 자금난, 에메랄드 시티, 1조 달러, 사모펀드의 철수···

마지막으로 태상건설.

키워드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 고왕 건설을 계속 지켜보거라. 분명히 안팎에서 크게 흔드는 세력이 나타날 거다. 기회는 그때일 거야.

복희 할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말이 떠오르며 퓨즈가 반짝였다.

내 예감이 아주 멀리까지 뻗어있는 길을 보여줬다.

“앨런.”

“예?”

“만약에 말입니다. 내가 고왕 건설을 사겠다면 뭐라고 하실 겁니까?”

첫 삽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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