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꿈
눈앞엔 짙은 안개뿐이다.
고개를 들어보자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은 마치 유리천장과 같았다.
갇혀있는 기분이 들어 갑갑했다.
나는 지금 입에 담배를 한 대 물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
내가 담배를 끊은 것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20살이 되었을 무렵 술에 몹시도 취했던 날 이승우와 함께 어설프게 담배를 처음 피웠었다.
지금은 나도, 이승우도 더 이상 그것을 태우지 않는다.
근 10년 만에 물은 담배이니 연기를 들이마시면 어질어질 할 법도 한데, 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수증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그 수증기가 폐를 가득 채워 당장이라도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하나 확실한 건, 이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담배의 맛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멈춰서기라도 한다면 이 안개가, 촘촘하고 단단한 결속으로 뭉쳐있는 물방울들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발걸음을 쉬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느낌이 묘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지어진 집.
안개 속에서 은은하게 자태를 보이는 그 집을 보자 바로 들은 생각이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안개 속에서 담배는 굳이 내가 발을 비벼 끌 것도 없이 금세 붉은 빛을 잃었다.
평소라면 쓰레기 따위를 바닥에 버리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을 텐데, 지금의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들을 무시하며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저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제야 이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덜컥━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묵직한 문의 무게가 팔을 타고 내 몸에 전해졌다.
그리고, 집 안은 안개 속 세상처럼 또 다른 이세계였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무한한 공간의 연장일뿐, 나갈 수 있는 탈출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서 와라.”
내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없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보자 동공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영복 회장.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 대고 서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꿈을 꾸고 있거나, 내가 죽었거나 둘 중 하나겠구나.
가만···
내가 어떻게 잠들었더라?
꿈의 경계밖에 있을 현실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조금 전까지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이제는 머릿속에 스며들기라도 한 듯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장영복 회장의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나오는 것처럼 울림이 컸다.
목소리가 장은호를 닮았군.
아니 장은호 회장이 당신을 닮은 거겠지.
“··· 왜 나타난 겁니까. 여기는 나의 공간입니다.”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네가 날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나는 당신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단정을 짓지 마라. 너는 언제나 날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스스로 그걸 억눌렀을 뿐이지.”
당신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어쩐 일인지 내뱉고 싶은 말이 목젖을 타고 흘러나오지 않았다.
··· 그런데 내가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꿈의 무대 속 인물인 장영복 회장을 부정해보려는 노력도 점차 허사가 되고 말았다.
꿈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나는 어느새 여기가 나의 무의식 속의 세상이라는 걸 잊고 말았다.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제 나와 그는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왜 날 버렸습니까. 꼭 그래야만 했습니까?”
“내가 너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모두 했다. 너에게 용서를 빌 수는 있다. 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겠다.”
“당신은 비겁합니다. 최후에 이르러서야 나에게 진실을 밝힌, 모든 짐을 내게 떠넘긴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장영복 회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널 찾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넌 그 이후에야 비로소 굵직한 선을 그리고 있지 않으냐? 내가 너를 끝까지 모른 척했다면 아무 보잘것없은 문장의 마침표 같은 삶을 살았을 것 아니냐.”
“아닙니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강하게 부정을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라는 것처럼.
“너의 유일한 경력은 오직 출생뿐이지. 나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명백한 도발.
장영복 회장은 나의 상처를 들쑤셨다.
그렇게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듯.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평소답지 않게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지금 나의 눈은 뜨거운 격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내 뜨거운 시선에도 장영복 회장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걸물이라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여유로운 자세로 나를 관조하고 있었다.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게 내 경력이에요. 그 시간이 없었다면 아무리 대단한 금은보화를 가졌다고 해도 절대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 생각해보니 당신이 준 것이 있긴 하네.
남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몇 배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
보육원 언덕에 서 있던 꼬마에게 그걸 새겨준 게 바로 당신이니까.
이 빌어먹을 피를 물려달라고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일생의 대부분은 평범해지기를 소원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장영복 회장이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식들은 하나같이 내 피를 이었음을 사방에 내세우고 싶어 하는데, 유일하게 너만 그것을 부정하는구나.”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 그리고 당신과 다른 방법으로 계속 길을 걸을 겁니다.”
“한영수.”
장영복 회장의 목소리가 우레가 되어 공간에 울려 퍼졌다.
저 노인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래. 네 이력이 오직 내 피뿐이라는 건 반쯤은 거짓말이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나를 닮았다. 벌써 세상을 모두 먹어 치우고 싶다는 욕망이 자라나고 있겠느냐. 증명하고 싶다면 보여다오. 네 유일한 이력이 고작 그것뿐이 아님을.”
“나는 당신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살지 않을 겁니다. 설령 내가 뭔가를 이뤄내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는 막이 내리기 전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대사를 외우는 배우처럼 결연하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장영복 회장은 대답 없이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선연하게 보였다.
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아비.
내 육신의 반을 만들어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작별이다.”
그의 입술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잠시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그의 입에 걸린 말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장영복 회장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으니.
끝없이 펼쳐진 이 공간에 참을 수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
그 고요함을 깬 것은 장영복 회장이었다.
“너는 이제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네가 찾는다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찾은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침묵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깊은 물 속을 유영하던 잠수부가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처럼, 나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웅웅━
모두가 잠든 늦은 밤에도 냉장고는 홀로 거실에서 모터를 돌리며 낮게 울고 있었다.
- 이봐, 이제야 정신이 드는 거야?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모터소음은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고윤아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몸은 달빛을 모두 빨아들여 나에게 나신의 음영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굴곡.
가슴에 손을 대자 땀으로 축축하다.
혹시라도 내 체취에 고윤아가 잠에서 깨지나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몸을 움찔했을 뿐,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뱉을 뿐이었다.
날숨과 들숨에 따라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사랑스럽다.
그래. 이게 나의 현실이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안개는 이곳에 없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어둠 속에서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장영복 회장과의 대화를 복기해보았다.
- 한영수.
그가 나를 부르던 묵직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드디어 그 날이다.
투자 회사가 첫발을 떼는, 간판을 올리는 날.
수많은 금융기관이 모여 있는 여의도에 건물 한개 층을 통으로 빌렸다.
나름 대표랍시고 내 개인 집무실을 하나 만들어 주었는데, 통유리 창밖으로는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회사의 이름은 ‘BH인베스트먼트’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부러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혹시 당신은 그래서 내 꿈에 나온 것인가?
복희 할머니만 애틋하게 생각하는 내가 밉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을 하는 압박감이 장영복 회장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일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까.
“··· 영수 님.”
내 품을 파고드는 고윤아의 체온이 느껴졌다.
여자의 몸이란 이렇게 부드럽구나.
고윤아로부터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가 반가웠다.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아닙니다. 표정이 무섭습니다. 나쁜 꿈이라도 꾸었습니까?”
고윤아는 용케 어둠 속에서도 나의 얼굴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나왔어. 꿈에 장영복 회장이.”
“...”
나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고윤아는 장영복 회장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를 향한 나의 복잡한 심경을 알기에 나오는 행동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고윤아는 힘을 주어 내 품을 벗어나더니 몸을 반쯤 일으켜 내 머리를 두 팔로 안았다.
그녀의 가는 손이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윤아야.”
“예?”
“장영복 회장의 이야기를 들려줘. 네가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들어 고윤아와 눈을 맞췄다.
어둠보다 더 검은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보석과 같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고윤아는 낮은 목소리로 이미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 대해 추억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손으로 내 몸을 토닥이며.
마치 자장가를 듣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가 저 멀리 멀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왕 시작한 거 나는 끝까지 갈 것이다.
BH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고왕 건설도 모두 시작에 불과하다.
내 앞에 벽이 막아서면 문을 찾을 것이며, 문이 없다면 벽을 넘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것마저도 안된다면 벽을 부숴버리겠다.
내일의 해가 뜨면 오늘 밤 이 꿈도 기억 속에서 휘발되리라.
그리고 이 세상에 나를 증명하는 과정의 첫 단추를 끼우리라.
온갖 상념들이 뒤섞여 목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테이프가 뚝 끊기듯 고요해졌다.
나는 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이종현 전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