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95화 (95/200)

95. 추운 겨울날, 훈훈한 저녁

언론을 활용해 주가를 떨어트리자는 건 앨런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왕이면 외국 쪽 언론사를 이용하자고 했다.

자신에게 연줄이 있다며.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펜대로 이름이 높은 사람 한 명이 절친한 동문이라고 했다.

드넓은 미 대륙에서도 학연과 지연을 무시하지 못하는 모양.

아니, 오히려 그렇게 땅덩어리가 넓으므로 더 각별할지도 모를 일이다.

괜히 국내 언론사를 통하려다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자들로 오해받아 꼬리를 밟히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실 고왕 건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작업은 꼭 필요했다.

그래야 우리의 입성이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심정적으로 앨런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볼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스터 한이 우리의 보스입니다. 보스는 감성적이기보다는 냉철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WSJ에 거짓 정보를 제보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주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정확한 회사의 재정 상태를 경고했을 뿐이죠.”

앨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이 소꿉장난도, 자선 사업도 아님을.

앞으로 원치 않더라도 악당이 되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돈의 습성이 그런 것처럼 온후한 감정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고왕 건설의 지분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주주가 여기서 탈출을 하겠다고 서로 번호표를 줄을 서고 있었다.

야금야금 그 지분들을 모으다 보니 어느새 대주주라고 불릴만한 자리에 올라 있었다.

여기에 든 자금이 870억가량.

1차 목표치였던 지분 5%를 넘긴 이후부터 우리는 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이는 일을 멈추었다.

이젠 고왕 건설 쪽의 연락을 기다릴 때.

진짜 승부는 거기서부터다.

“야. 새끼야.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냐?”

이승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 어, 그냥.”

“오빠. 언니도 있는데 새끼가 뭐야. 정말 창피하게.”

이승우의 여자친구인 은주가 자기 옆에 앉아있는 남자친구의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아··· 아니, 윤아 씨. 이거 제가 영수를 부르는 애칭이에요. 마치 자기야··· 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것과 같달까?”

“그 말이 그렇게 다정한 뜻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고윤아가 이승우의 너스레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오늘은 고윤아, 그리고 이승우 커플과 함께 저녁을 하게 되었다.

고윤아가 원했던 자리였다.

그녀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이승우는 우선 쌍수를 들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이 저녁을 먹고 싶어 한다는 말에 과감하게 가게 셔터를 하루 내렸다.

“그나저나 영수 덕에 변호사도 알게 되고 이것 참 영광입니다. 우리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법이라면 그저 벌벌 떠는데. 그런데 요즘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얼굴도 예쁘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저런.

승우야, 아서라. 위험 수위의 발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우의 말에 눈이 금방 샐쭉해지는 은주.

제 여친 앞에서 다른 여자의 외모를 칭찬한 셈이니.

“참나··· 우리가 아니라 오빠겠지. 그리고 나는 뭐 할 말 없는 줄 알아? 오빠는 영수 오빠를 반이라도 좀 닮아봐.”

저렇게 티격태격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위하는 둘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지금이야 장사가 잘되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이승우의 지갑이 깃털처럼 가벼웠을 때도 은주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그의 곁을 지켰다.

어디 그뿐이랴.

이제 막 병아리의 노란 털이 겨우 다 빠진 스무 살 때 일이다.

나와 이승우는 어른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건지 만나기만 하면 술잔을 부딪쳤었다.

제 주량도 제대로 모르는 것들이 주린 배에 독한 술을 들이부었으니 안 취했을 리가 없었다.

헌데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취기에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 마련.

나보다 몸을 먼저 휘청거리는 건 항상 이승우 쪽이었다.

녀석은 그때마다 붉어진 눈으로 아버지로부터 매질을 당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꼭 하곤 했다.

해줄 수 있는 게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던 나는 고개를 툭 떨궜었다.

승우 녀석이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벗어난 것도 은주를 만난 이후였다.

사랑을 시작한 후부터 이승우는 어지간하면 지나간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앞을 보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수 님에게 들었습니다. 음식 솜씨가 정말 훌륭하시다고···”

고윤아는 낯간지러운 칭찬의 화살을 돌리겠다는 듯 이승우에게 말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이승우의 어깨가 천장을 뚫을 것처럼 높아졌다.

“그럼요. 짬뽕 하나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을 품고 일하고 있는걸요.”

“언니, 언제 한번 꼭 드시러 오세요. 우리 집 정말 맛있어요.”

툭탁거리던 게 언제냐는 듯 은주가 잽싸게 제 남친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도 기왕이면 가게로 오라니까···”

“됐어. 맨날 고생하는데 너도 남이 해주는 음식도 좀 먹어야지.”

우리는 이 화제, 저 화제를 넘나들며 대화를 나눴다.

고향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언니, 나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네.”

붙임성 좋은 은주는 고윤아를 만나기가 무섭게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

고윤아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자리인데, 은주의 살가움은 이 자리의 적절한 윤활유가 되어주고 있었다.

“언니는 왜 영수 오빠한테 영수 님이라고 불러요? 뭔가 사극 배우가 말하는 것 같아요.”

하긴, 나야 고윤아가 날 부르는 호칭이 익숙하지만, 남들이 보았을 때는 어색한 존칭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상관없다.

남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할까.

고윤아가 그것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다.

“··· 음.”

고윤아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저 역시 애칭입니다. 아까 승우 씨가 말씀하신, 자··· 기야··· 같이.”

하하하━

자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무섭게 고윤아의 귓볼이 불에라도 덴 듯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떡해! 언니 너무 귀여워.”

은주는 고윤아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막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커플들의 이야기가 몹시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언니는 영수 오빠 어디가 좋아요?”

“멋진 점이 굉장히 많은 분입니다. 영수 님은.”

고윤아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은주는 우와━ 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저 새··· 아니 저 녀석이야 너무 이기적이지. 얼굴 잘났어, 신체 건강해. 이제는 건물까지 가지고 있는걸.”

“아니요. 제가 영수 님을 좋아하는 건 그 이유가 아닙니다.”

이승우의 말에 고윤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강한 남자입니다.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래서 영수 님이 좋습니다.”

고윤아는 고개를 들어 빛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아━

이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역시 흐뭇해진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고윤아는 몇 초간 눈으로 나와 감정을 나누다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향했다.

“물론 영수 님의 얼굴이 잘났다는 것은 저도 동감입니다.”

재치 있는 고윤아의 말에 또 한 번 좌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 우리 화장실 같이 가요.”

“아··· 화장실. 네, 그럴까요.”

두 여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화장실을 같이 가. 윤아 씨 귀찮게 하지 말고 너 혼자 갔다 와.”

“참··· 아저씨.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여자들끼리도 할 말이 있는 거거든. 가요, 언니.”

은주는 다정하게 고윤아의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여자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화장실은 혼자 가는 거지.”

“응? 글쎄. 네가 그런 소리 하니까 조금 웃기다.”

“새끼야. 내가 뭘.”

“너 기억 안 나? 7살 때, 신부님 몰래 무서운 영화 보고선 무서워서 화장실 못 가겠다고 나한테 같이 가자고 엄청나게 졸랐었잖아.”

“··· 어휴, 이거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 가지고.”

이승우는 괜히 내 앞에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나 영화 제목도 기억나는데? 엑소시스트였잖아. 너 그때 악령 들린 여자애가 계단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거 보고···”

“야! 야! 그만해.”

녀석은 민망했는지 내 입을 막고 아무 소리도 못 하게 했다.

“그나저나 은주한테 말 좀 따듯하게 해. 몇 번을 말하지만 좋은 여자야.”

“야, 밖에서나 이러지 집에 가면 꼼짝없이 잡혀 살아.”

이승우는 젓가락으로 차려진 음식을 조금 주워 먹었다.

“영수야.”

자기 앞접시에 코라도 박을 듯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승우가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 올해는 은주랑 결혼하려고.”

드디어 마음을 먹었구나!

반가운 소식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 양쪽이 올라갔다.

자기도 제 아버지랑 똑같은 사람이면 어쩌냐고 눈물을 보이던 녀석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싫은 인간이면 자연히 닮지 않아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부모 없이 자라난 우리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상상 이상의 상처이며, 그 그늘은 올가미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는 걸.

어쨌든, 이승우가 큰 결심을 내리는 데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겠구나 싶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정말로.”

“일전에 네가 조언한 데로 작은 디테일들을 잡다 보니까 이제 가게도 수입이 어느정도 안정되었어. 대충 앞으로의 계산이 서. 이젠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도 되겠다 싶더라고.”

문득 어린 시절 앞니 두 개가 빠진 채로 헤헤 웃던 이승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어느새 우리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은주한테는 아직 비밀이야. 그나저나 너는. 윤아 씨랑은 진지하게 만나는 거지?”

“내가 언제는 누굴 장난으로 만난 적이 있냐.”

“내 말은 결혼 생각까지 있냐는 말이야. 뭐 직업이 좋고 그런 걸 떠나서 윤아 씨는 정말 너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지.

마치 나와 꼭 맞는 퍼즐 블록을 만난 것처럼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정리되고 나면···

*

“영수 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새로 뽑은 차의 실내공간은 널찍했고, 대시보드 트림에선 고급스러운 조명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고윤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영수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합니까?”

아까 은주가 지나가듯이 말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고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에게 익숙하면 그걸로 된 거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칠 필요가 있겠어?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아주 좋은걸.”

잠깐 대기 신호에 걸린 틈에 나는 고윤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흡족했는지 그녀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응? 뭘 해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고윤아의 입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오··· 빠···?”

하하하━

오늘은 웃을 일이 많아서 정말 좋구나.

“좋네. 윤아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특별하고 좋다.”

“정말입니까? 그럼 계속 오빠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니야. 아주 가끔만 그렇게 불러줘. 아껴서 듣고 싶으니까.”

그렇게 둘이서 알콩달콩 닭살을 떨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점퍼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몸을 떨기 시작함과 동시에 내비게이션 화면에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아이콘이 떠올랐다.

앨런이었다.

이건 틀림없이 일 때문이리라.

장난기 가득하던 우리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나는 운전대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스터 한.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락이요?”

앨런은 숨을 쉴 틈이 필요하다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예. 고왕 건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우리를 만나고 싶답니다.”

그 시간, 불난 집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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