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96화 (96/200)

96. 그 시간, 불난 집에선

고왕 건설의 회의실은 전쟁통과 다름이 없었다.

이 회의실에 모인 슈트 차림의 패잔병들은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왕 건설은 한 차례 융단 폭격을 맞은 뒤였다.

며칠 전 급하게 열린 임시 주주총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주주들은 반발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고왕 건설은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분노는 그들이 전혀 상정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최근 들어서 주식 장에서 고왕 건설은 시퍼런 색과 단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5%··· 10%···

눈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딱 이런 것이리라.

주주들의 소중한 자산이 시시각각 곤두박질쳤으니 그 원성의 화살이 회사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고왕은 뒷돈을 주고 주총꾼을 투입하는 악수까지 뒀지만, 그런 하찮은 계책은 불붙은 기름에 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점은 웬일인지 대주주 중의 대주주인 구 회장이 주총에 참석을 하지 않을 것이랄까.

최근 거액의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한 구 회장은 현재 개인 중에서는 고왕 건설의 지분을 가장 크게 가지고 있었다.

오늘 윤일중 회장은 임원 전부를 소집했다.

긴급회의라도 해보자는 것이었지만, 당장 눈앞에 닥쳐온 현실은 거센 태풍과 같았다.

회의한답시고 입을 모아 떠든다고 해서 뚜렷한 해결책이 나올 턱이 없었다.

“SNS상에 부도설이 기하급수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고문 변호사를 통해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는 것을 검토해봐야 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지금 우리가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입니까?”

“정부에서 부동산 PF 부실을 우려 해 정책 금융 공급을 계획하고 있다는데요.”

“이 사람아!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그걸 믿고 기다리자고?”

답이 없는 것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니 말들이 많았고, 많은 말들은 혼란만 가중할 뿐이었다.

그때, 임원 중 한 사람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의 표정은 죽을죄라도 지은 듯이 어둡게 그늘이 져 있었다.

“채권단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자금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대출 연장이 어렵다고 아우성칩니다.”

윤 회장도 이미 귀 따갑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칠 듯이 폭등한 건설 원자재 가격, 금리 인상, 그리고 테마파크 채무 불이행에 따른 건설업계 전체의 자금 경색까지.

맞을 수 있는 악재란 악재는 모두 정통으로 맞게 된 고왕 건설이었다.

사정은 업계 전반에 매한가지라 이미 자생 능력이 부족한 지방 시공사 40여 곳이 부도를 내고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그들 중에는 고왕 건설로부터 일감을 받는 회사들도 있었다.

그로 인해 고왕 건설의 사업들은 일정은 밀리게 되었고, 자연히 자금이 제대로 돌지 않았다.

벌려놓은 일들이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피가 제대로 돌지 않으니 고왕의 몸뚱이는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다른 대형 건설사들은 계열사를 통한 순환출자로 이 상황을 버틸 총알 마련에 여념이 없었지만, 건설 하나에만 몰방하다시피 한 고왕 그룹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유동성 위기.

고왕 건설의 현 상태를 진단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연 매출 6조 8천억에 영업이익 5,900억.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르는 악재 속에서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정도의 영업이익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현금 흐름이었다.

단기차입금이야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만은, 우발 부채가 추산 5조 원.

이곳저곳을 쑤셔보아도 돈을 뱉어내라는 곳만 있지, 빌려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임시주총에서 유증 카드를 슬쩍 내밀어보려고 했지만, 그 말을 꺼냈다간 당장 주주들이 몽둥이라도 들고 단상으로 뛰쳐 올라올 기세였다.

“회장님. 뼈를 깎는 심정으로 리조트 사업을 정리하시지요. 그거라도 매각해서 지주회사는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보면 코로나 시국이 지나가고 여행 수요가 폭발하는 지금이 리조트 매각에는 적기입니다.”

임원 중 한 사람이 윤 회장에게 읍참마속의 계를 제안했다.

실속 없이 오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안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윤일중 회장은 그 소리를 듣고 펄쩍 뛰었다.

“안돼! 리조트 사업은 안돼!”

“회장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거 팔아서 몇 푼이나 받는다고. 언 발에 오줌 누기야. 그 소리는 꺼내지도 말아.”

그 모습을 보며 회의장 한쪽에서 한숨을 내쉬는 남자가 있었다.

이재석 고왕 건설 부사장.

사실상 고왕 그룹의 고만고만한 계열사들이 별 볼 일 없는 잔챙이 같은 것들이란걸 고려하면 그룹 전체로 따져도 윤 회장을 이은 두 번째 실력자라는 걸 뜻했다.

물론 그래봐야 월급쟁이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윤 회장이 회사를 떠나도 그 자리는 자식 중 누군가가 물려 받을 테니.

‘제기랄.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재석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현장 밥을 강조하는 고왕 건설 특유의 선 굵은 사내 문화와 다르게 정치질에 능한 타입이었다.

평사원으로 출발해 부사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당연히 일에 대한 감각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비결은 업무능력보다는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부르는 별명으로 정의될 수 있으리라.

이재석은 ‘장부남’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장기가 부족한 남자.

이재석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모두 닳아서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윤일중 회장은 이재석이 표면상으로 보여주는 충성심에 아주 흡족해하며 그를 총애했다.

물론 이재석 역시 뒤에서 자기를 험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야심이 부족한 패배자들의 질투라고 여겼다.

여하튼 그는 윤 회장이 리조트 매각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그 방안에 대해 고려조차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재 고왕 리조트의 사장은 윤 회장의 첫째 아들.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윤 회장이 리조트 사업을 접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실상 고왕 리조트는 첫째 아들의 진두지휘 아래 윤 회장의 비자금 창구로 운용되고 있었다.

매출은 실제로 벌어들인 것보다 적게, 운영비는 크게 늘려 장부에 기재했다.

관광업계가 하나같이 코로나로 시름 하며 칼 같은 감축 바람이 불던 때도 고왕 리조트의 인건비는 오히려 증가했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작된 장부로 만들어진 차액이 어디로 흘러 들어갔겠는가?

굳이 더 떠들어봐야 입만 아플 일이다.

무능한 회장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한세월을 보냈다.

윤일중 회장은 여자 엉덩이를 두들기는데 청춘을 다 보냈고, 늙어서는 재계의 마당발을 자처하며 사교모임이나 들락거리기 바빴다.

그런 회장을 대신해 회사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처리해온 이재석이다.

이제야 그 지난했던 세월이 보상받나 싶었는데 이런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아니, 보상이 다 뭔가.

여차하면 고왕 건설, 그리고 윤 회장 일가와 함께 묶여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지경이었다.

“일단 기다려보자고. 구기욱 회장이 아직 조용하잖아. 조 상무. 구 회장이 쥐고 있는 지분이 얼마지?”

윤일중 회장은 회사의 재산을 책임지고 있는 조 상무에게 말을 걸었다.

“13.3%입니다.”

“그래. 설마하니 그 양반이 회사 망하는 거 가만히 두고 보겠어? 자기도 돈 다 날리는 셈인데. 가진 재력이 어마어마하니 구 회장 줄을 타면 답이 나올 거라고.”

윤일중 회장은 무능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인과관계를 벗어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상력의 부족.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매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 구 회장은 당연히 자기 편이며, 자신을 위해서라도 분명히 고왕 건설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 저 소리.’

평생을 어떻게든 되겠거니 무사태평인 윤 회장 때문에 이재석은 속에서 천불이 끓는 것 같았다.

그는 윤 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일전에 구 회장 쪽에서 만남을 거절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로 연락이 있습니까.”

“부사장이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 양반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막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기다려보자고. 괜히 설익은 밥뚜껑 열어서 망치지 말고.”

여기서 말 한마디를 더 붙였다간 초상집에서 깽판을 치는 격이라는 걸 잘 아는 이재석이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그 구 회장이라는 사람은 좀 이상했다.

윤 회장의 말마따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주가 방어를 위해서라도 진작에 무슨 액션을 취하지 않았겠는가?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라는 건 윤 회장의 바람과 달리 딴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아··· 그리고 회장님. 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 상무가 입을 열었다.

하━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가뜩이나 심란한데 나쁜 일이면 나중으로 미루자고.”

윤 회장이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말했다.

“그게···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미 회장님께 보고 올렸었습니다. 최근에 투자 회사 하나가 지분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5% 규정을 넘어서 대주주 공시가 난 참입니다.”

일순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대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세력의 등장.

그 세력은 주가를 지지해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회사를 먹어 치우려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자신들의 밥벌이와도 직결이 되어 있는 문제이기에 임원들은 일제히 입을 닫고 조용히 귀만 열어두었다.

“BH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 회사입니다. 이렇다 할 이력 자체가 없는 신생 회사입니다. 뭐 굳이 특이하다고 할 것이 있다면···”

정적 속에서 유난히 조 상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회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앨런 오닐. 그 사람이 OI를 퇴사하고 BH 인베스트먼트의 COO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크흠━

윤일중 회장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사실 윤일중 회장은 앨런에 대해 감정이 상한 터였다.

앨런 오닐, 그리고 OI는 자금 투자를 해줄 것처럼 밑밥을 깔다가 발을 쓱 빼버렸었다.

희망 고문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OI가 빠져버림으로 고왕 건설은 괜히 좋지 않은 뒷말만 들어야 했다.

“그 BH 인베스트먼트, 국내 자본이야?”

“예.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앨런 오닐 그 친구, 월스트리트의 한 마리 늑대에 불과해. 거기다가 검은 머리 외국인이고. 굳이 이 좁은 땅에서 뭘 할 이유가 없는 양반이라 이거야. 분명히 뒤에서 돈을 대는 쩐주가 있을 거야.”

“일단은 대표이사로 등재된 사람의 이름은 확인했습니다. 한영수라고 하더군요.”

“한영수···”

분명히 얼굴을 맞대고 대화까지 나눈 적이 있음에도 윤 회장은 한영수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당시에 한영수를 그저 최화란이 키우는 젊은 사채 업자 중의 하나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일단은···”

이재석이었다.

“대주주 공시까지 난 판국에 일단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목적이 뭔지,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봐야겠지요.”

이견이 필요 없는 정론이었기에 윤 회장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부사장 말이 맞아. 연락해봐.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자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자고.”

흥정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