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금의환향 (1)
“여기가 오빠가 말하던 바로 그 언덕이군요.”
나는 지금 고윤아와 함께 자애 보육원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고윤아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 특유의 말투도 구어체로 다소간 바뀌어 있었다.
고윤아가 딱딱한 말투를 쓰는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평생 몸에 배어 있던 습관을 나를 위해 고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 하고 싶었지만, 그 노력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고윤아는 신부님을 만나러 보육원에 다녀오겠다는 내 말에 자신도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영수 님··· 아니, 오빠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라니 저도 뵙고 싶습니다.”
··· 그리고 오빠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했으니까.
고윤아는 귓불을 붉히며 작게 뒷말을 했다.
여하튼, 그렇게 나는 내 어린 시절의 그리움과 원망이 담겨있는 언덕에 고윤아와 함께 섰다.
신부님은 어린 나에게 항상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무리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꽃은 피기 마련이라며.
··· 이젠 나도 그 무언가가 되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와 고윤아는 보육원의 작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아직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서 뛰놀았겠군요. 어린 한영수가.”
고윤아는 느리게 걸으며 눈으로는 자애 보육원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잘 안 놀았어. 사실 어렸을 때 나는 그렇게 밝은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 나이에 맞지 않게 항상 심각했었지.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정말 그랬다.
나의 사춘기는 또래들보다 아주 빨리 찾아왔었다.
망막에 무언가 씌워져 있기라도 한 듯, 어린 나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보였다.
그런 내 흐린 눈을 바로 뜨게 해준 사람이 바로 신부님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다며 나를 다독이셨다.
만약 내가 신부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애 보육원이 아닌 다른 곳에 버려졌다면.
생각만 해도 쓴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몇몇 친구들과 지금쯤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는 이라니··· 말이 좀 안 맞습니다.”
고윤아가 둥근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장난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데요. 설마 모르고 있었습니까?”
말을 마친 고윤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하하하━
“사돈 남 말한다는 소리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진지한 게 바로 고윤아 변호사님, 당신이거든요?”
“··· 그런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심각한 커플이군요.”
고윤아는 내 팔을 붙잡아 팔짱을 껴왔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았습니까? 어린 시절에 그렇게 고민하던 것 말이에요.”
“찾았지. 아마 윤아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거 아닐까?”
내 말에 고윤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팔짱을 재깍 풀더니 그 손으로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회장 자리에 오르더니 아주 능구렁이가 다 됐네요.”
나는 짐짓 어깨를 감싸며 아야야··· 엄살을 부렸다.
··· 세상에 태어난 이유.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난 결코 ‘실수’가 잉태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얼마든지 이 세상에 나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
“영수, 이놈아!”
원장실에 들어가자 신부님은 크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계시던 신부님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부둥켜안으셨다.
내 등을 토닥이는 신부님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듯했다.
오늘따라 당신은 나를 유난히 환대하셨는데 신부님의 눈을 따라가니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신부님은 사뭇 감개무량하다는 듯, 고윤아를 바라보고 계셨다.
이놈이 드디어 만나는 사람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구나, 하는 그런 표정이랄까?
“이분은 누구시니. 어서 소개해주지 않고.”
신부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윤아는 가슴 위쪽에 한 손을 얹고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윤아라고 합니다.”
“허허! 나는 차호영 바오로라고 해요.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해요. 영수가 손님을 데려오는 것은 처음인데···”
신부님의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꽃이 졌다.
당신께서는 고윤아의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눈으로 어서 내게 더 설명해보라 재촉하셨다.
“윤아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 출신이고··· 지금은 제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고, 이거 귀한 분이 누추한 곳에 오셨구나.”
··· 그래서 그게 전부냐?
신부님의 눈은 여전히 만족을 못 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데려온 손님의 정체에 대해 목마름을 호소하셨다.
노(老) 신부님의 조급함을 가라앉혀드리기 위해 나는 기꺼이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드렸다.
“그리고, 제가 교제하고 있는 친구예요. 심성이 참 바른 사람이라 믿고 의지하고 있어요.”
허허허━
기다렸던 답을 듣자 신부님의 눈가 주름은 한껏 더 깊어졌다.
당신의 얼굴에 세월의 깊이는 진해졌지만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아이와 같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졌다가 문득 이대로 신부님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실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 사실 거야.
평생을 선하게 사셨으니까.
억지로 고집을 부려서라도 큰 병원에 한 번 모시고 가서 검진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나. 이리로 앉아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감사합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윤아에게 자리를 권하며 손수 의자를 빼주셨다.
“변호사라는 훌륭한 직업도 가지고 있으니 많이 배우신 분일 텐데··· 우리 영수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어쩌죠?”
아무리 세속에 초연한 신부님일지라도 유명 로펌이라는 말과 고윤아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능히 짐작 가시는 것이 있을 터.
신부님은 부족한 자식을 장가보내는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떠듬떠듬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 이제 그럴듯한 대기업의 오너이고, 조 단위 자산가거든요!
“아닙니다. 신부님께서 영수 님···”
신부님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 고윤아가 날 부르는 특별한 호칭이 익숙하게 들리시진 않으셨으리라.
윤아는 그걸 눈치채고 옅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영수 오빠에게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값진 것을 많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형편이 정말 어려운 분들이셨지만, 당신들의 삶으로 학교나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담담한 고윤아의 목소리에는 구김살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저게 내가 사랑하는 고윤아의 모습이지.
신부님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시며 말없이 묵주를 손으로 매만지셨다.
얼마간 우리 셋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신부님은 고윤아가 퍽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고윤아가 말을 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올라오셨으며, 법률적인 자문을 여쭙기까지 하셨다.
그러게 얼마간 환담이 계속되던 중.
불쑥 신부님의 말이 나를 향했다.
“영수야··· 선재 장학회 말이다. 너랑 연관이 있는 거지.”
장학회의 이름이 나오자 고윤아는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장학재단을 하나 맡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자애 보육원을 잊을 수가 있을까.
매달 오백만 원을 보육원에 성금으로 지원토록 재단에 지시했었다.
너무 큰 돈은 신부님의 성품에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하니 다만 한창 크는 아이들의 밥값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애초에 선재 장학회의 운영 목적이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을 돕는 것이니 취지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신부님 그게···”
신부님은 내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셨다.
“너 설마하니 네 생부께서 남겨준 돈을 흥청망청 쓰고 있는 것은 아니냐? 이미 넌 큰돈을 보육원에 기부했어. 내 앞으로는 이러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을 텐데.”
“신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신부님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내 손을 잡으셨다.
“보육원은 이 늙은 신부의 사역이야.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큰돈이라고 한들, 이리 선심만 베풀면 널 위해 쓸 것이 남겠니.”
자꾸만 내 입을 막으려고 하시는 신부님에게 항변하듯 나는 입을 열었다.
“아이고, 신부님 제 말씀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그동안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나는 차근차근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렸다.
500억을 상속받았다는 말에 눈을 질끈 감고 하느님을 연신 찾으시던 신부님이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나오자 열린 입을 다물지조차 못하셨다.
“··· 그렇게 저는 이제 사람들에게 회장님이라고 불려요. 이런 말 불경스러운 거 알지만, 이제 보육원을 위해 그 정도 돕는 거는 어렵지 않아요. 신부님과 이곳을 생각하는 제 마음이라고 여기시고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영수, 네가 정말 아파트를 짓는 그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단 말이야?”
“아파트뿐이겠어요?”
“이 애의 말이 정말 맞소?”
신부님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고윤아에게도 한 번 더 되물으셨다.
“예. 신부님. 오너의 부정으로 많은 사람이 손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영수 오빠가 그들을 구했습니다.”
차 신부님은 눈을 감으셨다.
묵주 알을 매만지는 손가락의 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당신의 눈은 수십 년은 젊어진 듯이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영수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신부님께서 제가 행복해져야 세상이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일단 먼저 제가 행복해지려고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행복해지게 만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말을 하지는 않겠다. 네가 가진 힘으로 세상에 유익한 일만을 하겠다고 하느님 앞에 약속 할 수 있느냐?”
“신부님. 누구보다도 절 잘 아시잖아요. 예. 집 떠난 탕아의 약속도 그분이 받아주신다면요.”
나의 짧은 답에 마침내 신부님의 눈에 자애가 다시 깃들기 시작했다.
“··· 하느님은 언제나 널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 늙은 신부도 널 향한 그분의 마음과 똑같다.”
그때였다.
원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아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예쁘장한 얼굴의 아이였다.
“그래. 잘 다녀왔느냐. 여기 영수 아저씨 알지? 어서 영수 아저씨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 안녕하세요.”
아이는 수줍게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가 아이의 몸동작에 따라 찰랑였다.
“그래, 안녕. 너 이름이 수아였지?”
수아는 내가 제 이름을 말하자 불에 덴 듯 몸을 움찔했다.
아이의 반응을 보며 나는 가슴 한쪽이 저미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명을 받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수아는 곧 몸을 돌려 원장실을 나가려고 했고, 애틋하게 아이의 뒤를 바라보던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이가 메고 있는 책가방 정 중앙에는 노란색 쪽지가 하나 붙어있었다.
“수아야, 잠깐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쪽지에 적힌 글씨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 저는 엄마, 아빠 없는 고아입니다.
금의환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