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혼자 걷지 말고, 함께 걸으세요
오래전 충무로의 유명 배우가 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아주 멋진 소감을 남긴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 배우답지 않은 겸손함과 소탈한 비유가 퍽 인상 깊었기에 아직도 그의 말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 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정말 맛있게 밥상을 차려놓으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박수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정말 죄송합니다.
도하 호텔 건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딱 저 멋진 수상 소감과 똑같은 것이었다.
선발대가 모두 무사함에 안도함이 첫 번째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력으로 기회를 만들어낸 그들에게 감사함이 두 번째였다.
선발대는 불과 귀국을 일주일 남겨놓고, 카타르 총리이자 내무부 장관과 면담하는 큰 성과를 냈다.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고왕 건설의 이름을 크게 알린 것은 거기에 붙은 덤 같은 것.
좋은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왕 건설의 직원들이 카타르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 눈치 빠른 사람들은 곧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를 연상했고, 우리 쪽에서 아무런 공식 발표가 없었음에도 주가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내 자산가치 역시 덩달아 크게 불어난 것은 당연지사.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기민하게 호텔의 위기를 눈치를 챈 김영남 부장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김영남 부장과 오준호 대리, 회장님께서 직접 TF팀에 합류시키시지 않았습니까.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이종현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카타르에 선발대를 보내놓고 나보다 더 근심이 많았던 그다.
이종현 사장은 선발대의 미진한 성과를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을 했다.
한국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도 카타르로 출국을 해야 했었다고 한탄하며.
하지만 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한 카타르 대사관을 드나들며 어떻게든 연줄을 하나라도 늘려보려고 했던 그의 노력을 나는 알고 있다.
심지어 이종현 사장은 머리를 숙이고 경쟁사의 지인들을 통해 길을 열려는 열의까지 보였다.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태상 건설의 과거 동료들에게까지도 연락할 기세였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야 속 편하게 보고만 듣고 있었던걸요.”
이종현 사장은 내 말을 듣고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인사가 만사입니다. 조직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입니다. 사람을 써야 할 곳에 쓰는 것.”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었다.
“이제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명함 정도는 내밀어 볼 수 있겠군요.”
“이런 말은 좀 그럴지 모르지만, 하늘이 도왔습니다. 우리에게만 꼭 좋은 일만도 아니지요. 비극을 미리 막은 셈이니.”
“아니요.”
물론 하늘이 사람에게 운을 내려줄 수는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찬스가 몇 번쯤은 찾아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데도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회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거나 행동할 수 없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푸념하듯 내가 그때 그랬어야 하는데··· 라고 문득 깨달았을 때, 이미 운이라는 놈은 저만치 달아나버린 후다.
“하늘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선발대도 사장님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호텔 건이 아니었더라도 우리의 정성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종현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새겨듣겠습니다.”
이런.
너무 진지하게 생각을 파고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어버렸다.
이종현 사장은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주었고.
그의 연륜과 인품이 느낄 수 있는 단면이었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봐야 나보다 훨씬 훌륭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종현 사장 앞에서는 번데기를 놓고 주름 잡는 격.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습니다. 나쁜 뜻은 없었지만, 혹여라도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하하하━
이종현 사장의 미소는 큰 웃음으로 번졌다.
“회장님. 저는 인간적으로 회장님이 좋습니다. 한 회장님의 단단한 신념이요.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런 경지에 올랐다니 10년 후, 20년 후가 더 기대된 달까요. 물론 그때는 저는 이 자리에 없겠지만요.”
“혹시··· 그렇다면 장영복 회장님과 비교하자면 어떻습니까.”
나의 말에 이종현 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미숙하지요.”
솔직하게 말해준 이종현 사장에게 오히려 감사함을 느꼈다.
이 솔직함은 내가 좋다는 그의 말이 회장이라는 직함을 향한 아첨이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방증이니까.
그저 내 귀에 아름답게 들릴 말만 하고 싶었다면 끝까지 했을 테니.
그래.
난 뭘 기대하고 저런 질문을 한 것일까.
“하지만···”
이종현 사장의 말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회장님에게는 장영복 회장님에게는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장 회장님께서는 앞에서 모두를 이끄는 분이었습니다. 커다란 불과 같았죠. 그래서 저와 같은 불나방들은 자연히 그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앞서 걷는 길이 순탄하기만 했을까요? 감히 고인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면 분명 고독하셨을 겁니다.”
나를 바라보는 이종현 사장의 눈빛은 훌쩍 커버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처럼 자애로웠다.
“한 회장님은 그분과 다릅니다. 저 사람과 동행하면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인간적인 매력. 예, 굳이 말하자면 나란히 같이 걷고 싶어지는 사람입니다. 혼자 앞서나가면 외롭습니다. 하지만 함께 걸으면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회장님, 부디 앞으로도 더 멀리 나가세요.”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말이었다.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야말로 새겨듣겠습니다.”
그때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나와 이종현 사장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회장님. 세종시 방문 일정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행 기사가 대기 중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사장님, 저는 점심 식사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종현 사장도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맛있는 것을 드시려고 세종시까지 가십니까.”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겁니다. 기재부 차관을 좀 만나고 오겠습니다. 다들 수주 한번 따보겠다고 열심이신데, 제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나요. 저도 움직일 수 있는 건 다 움직여보겠습니다.”
* * *
“직접 여기까지 내려오셨는데 음식 대접이 소박해서 죄송스럽습니다.”
유호성 차관이 머쓱하게 말했다.
“아니요. 제가 오늘 아침을 건너뛰었는데, 설렁탕 속 든든하게 채우기에는 딱 좋습니다.”
한번 만나 뵀으면 한다는 나의 의사에 유호성 차관은 당분간은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를 하기라도 할까 봐 부동산 정책을 세우는 일에 골머리가 썩고 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그런 그에게 나는 점심시간이라도 좋으니 내가 세종시로 가겠다고 청을 했고, 유 차관은 그것마저 물리치지는 않았다.
“요즘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최대한 공공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하기는 했는데, 부동산이라는 게 워낙에 예민한 문제이다 보니··· 쉽지가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에 만났을 때보다 유 차관은 다소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그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렇겠지요. 부동산을 가진 사람은 한숨을 내쉬고, 없는 사람은 눈치만 보고 있는 게 요즘 아닙니까. 정부도 고민이 많겠습니다.”
설렁탕 국물을 한 숟갈 뜨다 말고 유호성 차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지요. 정부가 정책으로 가격에 손을 대었다간, 그 결과물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하기야,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지겠습니까. 그나저나···”
유 차관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카타르 소식은 들었습니다. 고왕 건설의 직원들이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더군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불행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마냥 좋아할 수도 없고··· 현지에 나간 직원들에게 고마우면서도 기분이 참 그렇습니다.”
“어디요! 얼마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입니까.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대통령께서도 뉴스를 보고 저런 게 국위 선양이라고 관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좋은 말씀을 하셨답니다. 한영수 회장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셨다더군요.”
허.
대통령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니···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컨소시엄이 끝나기 무섭게 선발대를 도하에 보내다니··· 한 회장님의 추진력에는 두 손을 들어야겠군요.”
“예.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 때문에 고왕 건설을 인수한 것이니까요.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차관님. 관련해서 제가 귀동냥할 이야기라도 없겠습니까?”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선물 보따리에서 뭐라도 좀 풀어달라.
나는 그런 마음으로 유호성 차관을 바라보았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유 차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라도 한 번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예정되었던 대로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방한합니다. 사실 극비리에 이미 수행원들은 입국해있습니다. 카타르에서 항공기로 직접 왕자의 편의를 위한 가재도구들을 챙겨서요.”
“대통령님과 회담은 언제입니까.”
숟가락을 쥔 채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다음 달 3일입니다. 이제 2주 정도 남았네요.”
“그럼 기업인들과의 만남은···”
“예. 그것도 명단이 짜졌습니다.”
유호성 차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한 회장님,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오겠습니다. 더 끌었다가는 절 다 태워버리겠는걸요. 얼른 말하겠습니다. 고왕 건설,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아━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됐구나.
또 한고비를 넘겼구나.
“약속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관님.”
“실상 제가 뭘 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메드 빈 알리 왕자가 콕 찍었으니까요. 고왕 건설의 관계자를 만나고 싶다고. 아마 도하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겠지요.”
기다렸던 바람이 슬슬 불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돛을 활짝 펼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일이 이렇게 풀렸다고 한 회장님도 저와의 약속을 물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도시 재건 사업 말입니다. B 시의 시민들이 1군 건설사가 재건 사업을 맡았다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고 하던데요.”
“차관님. 정부에 연줄이나 대보겠다고 차관님을 만났던 게 아닙니다. 저는 차관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한 겁니다. 그리고 거래는 신뢰가 최우선이지요. B 시의 도시 재건 사업이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저희 고왕 말고도 참석하는 기업은···”
“전에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재계 순위 5위권 안의 총수들이 자리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태상도 있겠군요. 참석자는 장은수 회장입니까?”
유호성 차관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기구나.
내가 장은수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게 될 자리가.
“이거 탕이 다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한 회장님도 공복이라지만, 저도 요즘 제대로 끼니 챙기기가 어렵습니다. 이거 뭐, 식사라기보다는 주유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장은수에 관해 물은 연유를 모를 터인 유호성 차관은 대수롭지 않게 깍두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얄궂은 운명이여.
결국 이렇게 나는 장영복 회장의 모든 자식과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전초전을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