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LK 그룹 김윤제 회장 (1)
“저··· 회장님.”
회장실의 문을 열고 비서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비서실에서 일하는 직원 중 하나인 그녀의 이름은 김하늘.
언제나 웃는 낯으로 그녀를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김 비서였는데, 왜인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왜인지 유난스럽게 긴장한 것 같기도 하다.
“예. 김 비서님. 안색이 안 좋네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 회장님을 찾는 전화가 와서.”
“그래요? 바로 연결해주시면 되지, 왜···”
“그게··· 연락하신 분이 누군지 먼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
회장이 아니라 복사기가 된 것 같은 요즘이었다.
전자결재를 하고 있음에도 사인을, 그것도 직접 해야 할 서류들이 어찌나 많은지 손가락에 굳은살이라도 밸 것만 같은 요즘이었다.
그나저나 대관절 누가 나를 찾았기에 김 비서의 안색이 저럴까?
카타르의 왕자도 불시에 날 찾아오는 판국에 더 놀랄 게 있을까 싶었다.
“누구시죠?”
“김윤제 회장님이십니다. LK그룹의.”
··· 허?
긴장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김윤제 회장이라니.
어쩌면 비서실에서 몇 번 그의 이름을 되물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조만간 시간 한 번 내주시지요. 또 뵙겠습니다.
일전에 김윤제 회장과 스쳐 지나갈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는 인사치레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화 연결해주세요.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겠네요.”
“예. 회장님.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곧이어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가 따르릉 벨 소리를 울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한영수입니다.”
“한 회장님,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미안합니다.”
김윤제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격의 없는 말투로 마치 날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말하는 그.
“전화 한 번 드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연락처도 안 물어봤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회사로 연락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태상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두 번째 브랜드 LK.
그 LK의 총수가 나와 전화가 하고 싶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말씀하시지요.”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한 회장님 말이요. 인물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목소리까지 감미로워. 같은 남자로서 질투가 안 날 수 없단 말이지.”
하하하━
수화기 건너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윤제 회장의 두툼한 입술이 떠올랐다.
성대의 마찰과 그 입술의 달싹거림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저 소리.
그 웃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 나는 짐작할 수 없었기에 마냥 김윤제 회장을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아니, 정말 진심입니다. 난 궁금할 지경이라니까. 한 회장님이 왜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숨기는지. 한 회장도 알고 있죠? 요즘은 거짓의 시대라는 것. SNS를 보세요. 가짜들이 판을 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짜배기가 모습을 드러내 봐.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을 하겠어요.”
“글쎄요. 저는 제가 남들의 우상이 될 만큼 특출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회장님 말씀이 민망하기만 합니다. 더욱이 SNS 같은 것은 해본 적도, 관심도 없는 편이구요.”
“이런··· 불필요한 겸손까지!”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재벌이라고 다 똑같은 재벌들이 아닌가.
김윤제 회장은 장 씨 남매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다소 경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뭐, 좋습니다. 그나저나 전화로 이렇게 실없는 이야기 할 거는 아니고··· 한번 얼굴 좀 봤으면 하는데. 어때요, 시간 좀 있습니까?”
“시간이요. 항상 부족한 게 시간이지만, 누구와 쓰느냐에 따라 또 만들 수 있는 게 시간이지요.”
하하━
김윤제 회장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거참 명언입니다. 그래요. 우리 한 번 만납시다.”
“예. 편하신 시간과 장소만 알려주시지요.”
“··· 한 회장님. 혹시 야구 좋아합니까?”
* * *
“좌중간 적시타! 그렇지!”
김윤제 회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를 질렀다.
LK 야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환호하는 그는 영락없는 야구팬의 그 모습이었다.
여기는 서울 LK 야구단의 홈구장인 초이 파크.
한국 야구와 LK 구단의 레전드 투수인 최민수를 헌정하기 기리기 위해 그의 성을 붙인 이 야구장은 MLB의 그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쾌적한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나와 김윤제 둘이 야구를 관람하고 있는 VIP룸은 더욱더.
여기가 야구장인지, 최고급 전용기의 실내를 커다랗게 확장해 놓은 곳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김윤제 회장의 야구 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 재계에서 SNS상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기로 유명한 이가 둘이 있는데, 바로 장은우 사장과 김윤제 회장이었다.
특히 김윤제 회장의 피드의 절반 이상은 LK 야구단과 관련된 사진들이었다.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LK가 우승을 하고 선수단이 경기장에서 김 회장을 헹가래 쳐주는 장면.
그것이 김윤제 회장 SNS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어떤 이들은 김윤제 회장이 그룹의 사업보다 구단주 활동에 더 진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김 회장의 환호를 불러일으켜 낸, 누상의 주자를 싹쓸이하는 안타를 쳐낸 타자는 FA 역대 최고액을 경신하며 올 시즌부터 LK에 합류한 선수였다.
한국 야구 시장에 맞지 않는 오버페이라고 말이 많았지만, 김윤제 회장이 저 선수를 잡는 데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은 굳이 쉬쉬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오늘도 한국종 선수가 3타점을 적립하는구만. 케네디 스코어! 그래! 이게, 야구지.”
7회까지 상대 팀에 끌려다니던 LK팀이 일순 안타를 집중적으로 몰아쳐 순식간에 역전에 성공하자 김윤제 회장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회장님. 케네디 스코어라는 게 뭡니까?”
사실 내가 야구에 큰 흥미가 없는 것만큼이나 궁금하지 않은 주제였다.
하지만 나는 김 회장이 좋아하는 화두를 던져주기 위해 일부러 순진한 얼굴을 하고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꺼내게 만들어 대화의 길을 트는 나의 버릇은 김윤제 회장을 상대로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야구광은 신이 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뽐냈다.
“지금 우리가 8대7로 이기고 있지요? 그 점수 차가 야구에서 제일 재미있는 스코어라고 합디다. 존 F. 케네디가 야구는 8대7이 가장 재밌다고 말했다는 게 어원이랍디다. 뭐, 어디까지나 낭설이라는 소리도 있다만···”
김윤제 회장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들어 이루 베이스를 밟고 포효하고 있는 선수를 가리켰다.
“우리 한국종 선수 말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 많더니 이것 보라지. 시범 경기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시즌 들어와서도 계속 불방망이 아닙니까. 저런 선수에게는 얼마도 아깝지 않지.”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회장님은 야구를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야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인생이 보여요. 잠깐만요··· 아이고!”
김윤제 회장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한국영 선수 다음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날린 타구가 아쉽게도 중견수의 글러브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아웃으로 공격과 수비가 교대되었고, 열광적인 응원을 하던 김 회장도 그 틈을 타 잠시 평정을 찾았다.
“한 점만 더 벌리지, 이거 아쉬운데··· 자자, 한 회장님. 한잔합시다.”
김윤제 회장은 나와 건배하고 맥주를 한입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크━ 이 맛이지. 그나저나, 한 회장님은 야구 잘 모르시나?”
“규칙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관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네요. 우현수 선수 사인볼이 아주 귀하다고 하던데, 하나 있던 거 남 그냥 줘버린 적도 있거든요.”
“우현수 선수 것이면 정말 귀하지요. 그 친구 사인 해주지 않기로 아주 유명한데. 한국에서도 그러더니 미국 가서도 똑같고. 참 한결같아.”
“회장님 정도면 원하시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요.”
“아니지요. 그런 건 의미가 없어요. 똑같은 팬의 입장으로 받는 사인볼이 진짜 가치가 있지.”
진정한 스포츠 팬이군.
하기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번에 아메드 빈 알리 왕자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때도 김 회장이 다른 회장들에게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야구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는 오늘 실제로 야구장에 온 것이 처음입니다.”
“그래요? 이거, 내가 한 회장님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하나 추가해드렸군. 뿌듯합니다.”
“예. 이렇게 놓은 곳에서 녹색 그라운드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것도 당연히 좋지만, 저길 좀 봐요.”
나의 눈동자가 김윤제 회장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관중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풍선 막대를 흔들며 큰 소리로 응원을 하는 관객들.
어떤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치어리더를 따라 열심히 율동을 하고 있었다.
먼 거리라서 한 명, 한 명의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즐거워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야구장에 오면 다들 행복해해요. 나는 그걸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 어렸을 때,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야구장에 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지 뭡니까. 여기는 마법 동산 같은 곳이구나. 저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고, 같은 동작을 하는 게 어찌나 대단해 보였던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내가 야구와 사랑에 빠진 건.”
“보통 기업의 오너들이 프로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건 마케팅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을 보니 진심에서 성의가 나온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군요.”
“뭐··· 돈 먹는 하마라고 생각하는 양반들도 있지요. 어쨌든 나는 행운아는 맞는 거 같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직접 굴려볼 수 있다니. 남들이야 게임 속에서만 가능한 일 아닙니까.”
하하하━
김윤제 회장은 시원하게 웃었다.
“한 회장님도 생각 있으면 스포츠 구단 한번 경영해 보세요.”
“저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스폰을 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LK, 혹은 다른 대기업들에 비하면 저희야 작은 기업이니까요.”
“물론 돈이 많이 들기는 하지요. 하지만, 한 회장님이 말한 것처럼 또 홍보에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 이름으로 된 야구단이나 축구단 하나쯤 있어야 진짜 대기업으로 인정해주는 풍토가 있기도 하고··· 어쨌든 한 회장, 고왕을 그 정도 사이즈로 키울 욕심 아닙니까.”
입가에 미소는 여전했지만, 김윤제 회장의 눈이 순간 번쩍 빛났다.
지금 경기는 7회 말.
드디어 그와 나의 본론인가.
이제부터 대화의 양상이 달라질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충고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할 큰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거기에 집중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 일이 무사히 정리되면 한번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나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가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을지, 왜 나를 보자고 했는지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은 하고 있던 참이었다.
“··· 큰일이라는 건 역시나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를 말하는 거겠지요?”
김윤제 회장은 맥주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방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김윤제 회장에게서 순수한 야구팬으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LK 그룹 김윤제 회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