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시멘트 대란 (2)
세상에는 종종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마치 누군가가 이미 설계를 마쳐놓은 도박판처럼.
그 설계자의 존재를 모르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그런 일들을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운명’이라고.
지금 이 상황도 꼭 마찬가지였다.
한영수가 시멘트 대란에 눈을 돌렸을 때, 공교롭게도 장은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은수가 그저 단순히 권위적인 정신만을 가지고 있는 경영자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실상 시멘트가 아무리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태상 건설과 같은 거대 기업이 위기를 느낄 리가 없다.
하지만 장은수는 자신의 사업에 아주 작은 걸림돌이라도 눈에 밟히는 것을 용납지 못했다.
0.1%의 불안함이라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집요함.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반드시 꺾고 지나간다는 그 습성이 바로 장은수의 무서움이기도 했다.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일까?
한영수와 장은수, 서로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문제 인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은 전혀 달랐다.
마치 거울에 비친 상이 실제가 아닌 반대를 보여주듯이.
“아니. 회장님··· 우리보고 담합이니, 생산량을 임의로 조절하니 말이 많은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나라에서 레미콘 품질 기준을 높이니까, 자연스럽게 시멘트 수요가 높아진 것 아닙니까. 거기다가 유연탄 가격까지 폭등하고 있는데··· 땅 파서 장사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레미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레미콘 업체들은 시멘트 품귀를 핑계로 건설업체를 상대로 단가 올려치기 하면서 정작 우리한테는 같은 값으로 물건을 받으려고 하니, 이거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장은수 앞에서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국내 시멘트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3대 업체의 대표들.
한영수가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면, 반대로 장은수는 그들을 불러들였다.
“공정거래를 하라면서 나라에서 과징금으로 자꾸 협박을 하는데,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장은수는 잠시 그들을 훑어보고 한쪽 입술을 비죽이 올렸다.
그의 눈이 서늘해 좌중은 괜히 무슨 죄라도 진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공정이라··· 참 듣기 좋은 말이지요.”
대표들은 뚫렸던 입을 꾹 다물고 귀만 열어두었다.
건설 업계에서 장은수가 가진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아니, 장차 태상이라는 초거대 기업의 총수가 될 남자 아닌가.
물량을 가지고 장난질을 쳐봐야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건 여기에 모인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회장님. 저희도 정말 최선을 다해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
장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저런··· 여러분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에요. 공정 말입니다. 정말 실재하는 것이 맞습니까? 인간이 정말로 공정했던 시절이 있었던가요?”
“··· 예?”
“역사를 놓고 보면 인간이 굶주림에서 벗어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수 계층뿐이었지요. 문자 그대로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말입니다.”
대표들은 갑자기 왜 역사까지 들먹이며 장은수가 거창하게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제 굶주림이 아니라 비만 때문에 죽어요.”
“그건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총알보다 무서운 게 패스트 푸드지요.”
누군가의 재치 있는 말에 와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은수 역시 슬쩍 웃으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로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배가 불러지니까 착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공정이니, 평등이니··· 인간의 역사는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흘러간 적이 있습니까? 그건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거예요. 사슴이 호랑이를 잡아먹을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반대로 사슴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고 해서 그걸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할까요? 저는 공정하다는 말. 그건 완전히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히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는 언사.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게감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지는 법이다.
이제야 슬슬 장은수의 의도를 깨달은 대표들이 입을 벌리고 아━ 하며 탄성을 뱉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한 진리라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열광적으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지금 시멘트 품귀 현상이 여러분들의 말처럼 불가항력적인 일인지··· 아니, 설령 어떤 인위적인 개입이 있을지라도 저는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장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는 회의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잠시 유해졌던 분위기가 다시금 싸늘해졌다.
“만약 우리 태상 건설의 사업에 현 사태가 조금이라도 지장을 준다면 저 역시 여러분에게 공정과 거리가 멀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질서 그대로 말입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대표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을 뱉었다.
“아무렴요. 다른 데 물건이 못 나가도 태상 건설과 계약을 맺고 있는 업체가 최우선이지요.”
“저희는 태상의 현장에 들어가는 믹서 트럭은 대기도 안 시킵니다.”
비로소 장은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저··· 그런데 회장님.”
그때, 조심스럽게 대표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회장님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이 자리 말입니다. 보도 자료를 하나만 내도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장은수는 대단한 자비라도 베풀 듯 고개를 느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태상의 이름을 빌려 자기들에게 집중된 언론의 시선도 돌리고, 주가도 띄워보겠다? 그래··· 까짓것 호랑이 등에 한 번 태워주마.’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 쪽에서 보도문 작성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시멘트 공급 문제 해결을 위해 건설사와 관계자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그림이 썩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장은수가 원하는 협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알아서 머리를 숙여라.
그럼 개평 정도는 던져줄 테니.
“그럼, 다 같이 사진부터 한 장 찍으셔야겠군요. 하하하!”
“잠깐···”
장은수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한 대표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고왕 건설 현장에 들어가는 레미콘 업체와 거래하시는 분도 계십니까?”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랬다고, 장은수의 머릿속에 사특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 * *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우리가 직접 시멘트 업체를 찾아가 보자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내 말에 이종현 사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중간상인 레미콘 업체들과 거래하지, 시멘트 회사들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건설사 입장에서는 사실 시멘트 수급 문제는 어디까지나 레미콘 업체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라고 여기니까요.”
“글쎄요. 제가 아직 이 업계를 잘 모르니까 할 수 있었던 소리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도 은연중에 우리가 갑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청 업체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고 마냥 이종현 사장의 그런 생각을 탓할 수만도 없다.
레미콘 업체 역시도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파업을 무기로 쓴다는 기사를 분명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끝없이 서로를 향해 투쟁을 해야 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에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쨌든,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만약 밖에 비가 내린다면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비를 피해 가만히 집에만 숨어있을지, 아니면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갈지 정도는 내가 충분히 선택할 수가 있다.
지금 나는 이종현 사장과 함께 한 시멘트 업체를 방문하고 있었다.
이종현 사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장이 운영하고 있다는 그 시멘트 업체는 업계가 이합집산하는 와중에도 오랫동안 회사를 지켜온 곳이라고 했다.
뜻하지 않은 드라이브였다.
서울을 벗어나 교외로 접어든 지 벌써 두 시간째.
시멘트 회사들은 당연히 석회석을 채굴하는 광산 인근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오늘 하루를 포기하는 것쯤은 각오해야 했다.
“회장님, 그런데 ‘짬짜미’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짬짜미요··· 글쎄요. 무슨 뜻일지 짐작이 되기도 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종현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설 업계 전반에 퍼져있는 일종의 꼼수지요. 관행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개 업체들이 거래처를 나눠서 가지고, 가격과 출하량을 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관행이라는 게··· 참 뿌리 뽑기가 힘듭니다.”
“예. 시장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지요. 몇 년 전쯤에 시멘트 업계도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과징금을 꽤 세게 맞았지요. 직원 일부는 실형을 살기도 하고.”
“설마하니··· 지금 저희가 가는 업체도 그런 곳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이종현 사장이 크게 소리를 내어 시원하게 웃었다.
“여기 사장님은 굉장히 양심적인 분이십니다. 오히려 그래서 손해를 많이 보셨죠. 한때 업계 1위라고 해도 좋을 점유율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미끄러졌습니다.”
“사장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신 분입니까?”
“제가 태상 건설에서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시멘트의 수요보다 공급이 많았다는 말씀은 드렸었죠? 지금과 달리 그쪽 업계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올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업에 가장 어필할 수 있는 것이 뭐였겠습니까?”
“단가··· 였겠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 사장님과 어떻게 자리를 한번 하게 되었는데, 가격이 아니라 품질을 말씀하시더군요.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전 국민이 안전불감증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입장이 그러기가 힘들 텐데 아주 따끔하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시공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태상이 국내, 아니 세계 최고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재료를 쓰라고.”
장인정신이 있는 양반이라.
슬쩍 그와의 만남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회장님. 1km 남았습니다. 이 굽잇길만 넘어가면 목적지가 바로 보일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기사님.”
아닌 게 아니라 창문을 조금 내리자 공장에 다 왔다는 걸 알리듯, 조금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 동네가 콩이 많이 나는 곳이라 두부전골이 그렇게 기가 막히답니다.”
거짓말로라도 향기롭다고 할 수 없는 냄새에 내가 다시 창문을 올리자, 이종현 사장이 가볍게 말했다.
“아··· 두부전골요. 식물성 단백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보면 영양가 없는 일임에도 이곳까지 흔쾌히 동행해준 이종현 사장인데 당연히 식사 한 끼쯤은 같이 하는 것이 맞다.
“멀리까지 나왔는데 향토 음식이라면 당연히 먹고 가야지요.”
“네 저도 말로만 들었는데, 시간 되시면··· 아, 회장님. 저기 공장이 보이네요.”
이종현 사장이 손가락을 들어 차창 밖을 가리켰다.
그의 말처럼 웬만한 고층 아파트보다 더 높은 커다란 원통 건물이 몇 개 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 대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