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지금 협박하는 겁니다
“저 한영수입니다.”
“예. 한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전화를 다···”
내가 전화를 건 상대는 서울 지검의 김지수 검사였다.
일전에 장은우의 도박 건과 관련하여 연을 맺게 된 그.
원래도 조직 내부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했지만, 영광 산업 개발 일당을 일망타진하면서 일약 스타 검사로 도약한 김지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 검사는 우선 그 이야기부터 꺼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한 회장님의 제보 덕에 정영목, 빠르게 검거할 수 있었어요. 만약 해외로 떴으면 골치 아플 뻔했습니다.”
“일이 잘 풀렸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하, 덕분에 기자회견 한다고 TV에도 나왔지 뭡니까. 그건 그렇고···”
김지수 검사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안부를 묻겠다고 한 회장님이 저에게 전화했을 것 같지는 않고··· 할 말 있으시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허허실실.
역시나 김 검사는 내가 예전에 본 것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 안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잠깐.”
김지수 검사가 내 말을 끊었다.
“하나 확실히 선을 긋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회장님에게 빚이 없습니다. 그때, 한 회장님이 내 걸었던 조건은 약속대로 지킬 테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이번에는 제가 검사님께 빚을 하나 진 걸로. 이 빚은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김 검사는 말이 없었다.
하하하━
그렇게 잠깐의 침묵을 깬 것은 김 검사의 웃음소리였다.
“뭐··· 첫사랑과 재회를 시켜준 분의 부탁을 못 들어드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간단한 일입니다. 뭐 하나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뭘까요. 그것이.”
“XX 경찰서에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는지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구속 영장이요?”
다소 맥이 빠진다는 목소리로 김 검사가 말했다.
내가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예. 어젯밤에 있었던 교통사고입니다. 사람이 크게 다쳤어요.”
“솔직히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 좀 하고 있었는데 김빠지는걸요.”
“저한테는 지금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목소리에서 심각함을 느꼈는지, 김 검사의 말투에서 장난기가 빠졌다.
“그 정도는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이 급하십니까? 지금은 사무실 밖인데···”
“예··· 가능하다면 인적 사항도. 그리고 구속되면 어느 구치소로 가게 되는 지도요.”
“알겠습니다. 연락드리지요.”
김지수 검사는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는 확실히 현명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왕에 신세를 지워줄 생각이라면 차라리 시원하게 오케이를 말하는 것이 낫다.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 사정을 캐묻고 갖은 훈수를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자가 훨씬 더 깊은 은혜로 기억되는 법.
일단은 덤프트럭 기사부터 찾아내자.
심증을 물증으로 바꾸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 * *
이곳은 장은수가 자주 가는 바.
어쩐 일인지 고윤아가 그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독한 술을 얼음도 타지 않은 채 스트레이트 잔으로 넘겼다.
사실, 이런 곳에서 혼술이라니.
고윤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누구보다도 한영수가 그저 평범하게 살길 바라던 그녀였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놈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는 한영수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제 일처럼 뿌듯했던 고윤아지만, 늘 마음 한쪽에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녀가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벌어져 버렸다.
사실 한영수에게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계속 말했지만, 그녀도 이 사고가 보통 일이 아님을 바로 직감했다.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를 잃은 한영수 앞에서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한영수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피해 갔다는 것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또다시 한영수를 향해 어두운 손길이 다가올까 봐.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한영수는 절대로 잃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 고윤아는 이곳에 왔다.
호랑이의 아가리에 스스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한가지 고윤아에게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있었다.
장은수가 한영수에게 품은 감점이 어떤 것일지는 능히 짐작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무리수를 둘 자는 아니었다.
그것도 총수 선출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어쨌든 장은수를 정면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고윤아로서도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
그녀는 술의 힘이라도 빌려보고자 독한 술을 몇 잔 더 들이켰다.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고 변호사가 나한테 먼저 연락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장은수가 바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고윤아 옆에 자리를 잡은 그는 비리게 웃었다.
“두 번째인가? 고 변호사를 여기서 보는 것은.”
“맞습니다.”
장은수는 바텐더를 향해 손짓했다.
“내가 전에 키핑해둔 걸로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텐더는 손을 바삐 놀려 장은수 앞에 술잔을 세팅했다.
장은수는 슬쩍 고윤아 앞에 비어있는 양주잔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한잔하시겠나?”
“술은 이제 괜찮습니다.”
딱딱하게 말하는 고윤아.
장은수는 흥━ 하며 콧소리를 내었다.
“당신 말이야. 진짜 재미없는 사람인 거 알아? 좋은 술이라고 이거.”
장은수 역시 고윤아처럼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자작하고 바로 꿀꺽 들이켰다.
“그래. 우리 도도하신 고 변호사께서 왜 그리 죽상이 되어 계시는가? 어디 초상집에라도 다녀온 것 같아.”
“말씀에 뼈가 있으십니다.”
“그래? 그저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장은수는 아직 황 실장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참이었다.
하지만 고윤아가 먼저 보자고 하는 걸 보니 짐작이 되는 바가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을 최대한 천천히 음미할 생각이었다.
‘고윤아. 아버지에게 붙었었고, 이제는 사생아에게 붙어먹은 년. 그런데 참 우습지? 너랑 한배를 탄 쪽은 이상하게도 결말이 영 별로네.’
“저랑은 반대로, 회장님께서는 얼굴이 좋으십니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자니 아직 소식은 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소식이라. 정말 모를 소리만 하는군. 내가 고 변과 공유해야 할 이야기가 있던가?”
“진심으로 그런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회장님과 오랜 시간 같이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앞뒤 자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빠는 무사합니다.”
장은수는 순간 머릿속이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생아 새끼가 또 살을 피해 갔다고?’
고왕의 건설 현장으로 가는 시멘트를 묶어버리겠다는 장은수의 치사한 계획은 고왕이 자체적으로 시멘트 수급에 성공하면서 빗나가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약 황 실장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또 실패라고?’
도대체 한영수 그 새끼는 뭐란 말인가.
불사신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목숨이 아홉 개라는 꼬리가 잔뜩 달린 여우라도 된단 말인가.
거기다 고윤아가 이렇게 찾아와 당돌하게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황 실장이 무언가 꼬리를 밟혔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었다.
완벽한 악수(惡手) ··· !
이렇게 되면 1분 1초라도 황 실장을 빨리 잘라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바짓가랑이에 똥물이 튀기 전에.
장은수는 최대한 침착을 가장해 고윤아에게 말했다.
“오빠가 무사하다라. 퍽 친근한 호칭 아니야. 한영수 그 새끼랑 둘이 뭐라도 있나?”
그때, 고윤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가 말한 오빠가 한영수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차···’
생각이 많아진 나머지 불필요한 말을 해버린 장은수였다.
“어차피 아무리 파봐야 회장님에게까지 닿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철두철미하신 분이니까 분명 몇 겹으로 안전망을 쳐두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지. 나에 대한 고 변의 평가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정말로 고 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회장님. 다시는 누군가를 상하게 할 짓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은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네가 나한테 명령을 하는 건가?”
“명령이 아닙니다. 협박입니다.”
“협박··· 협박···”
그런 단어를 세상에서 처음 들어본다는 듯 장은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고윤아 변호사. 미쳤군.”
“장영복 회장님은 저를 많이 예뻐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생전에 저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장은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킬레스건임을 고윤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거침이 없었다.
“장영복 회장님께서 과연 장은수 회장님에 대해 돌아가시기 전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장은수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동시에 그는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런 시ㅂ···”
거친 욕설이 반쯤 나온 장은수를 보면서도 고윤아는 꿋꿋했다.
그녀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책을 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태상의 사람이라면 모두 제가 장영복 회장님과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을 알고 있으니, 제 글에는 분명히 무게감이 있을 겁니다. 더 편한 방법으로는 어디 가서 인터뷰를 해도 좋겠습니다.”
“너 따위가 떠드는 소리에 내가 겁이라도 먹을까 봐?”
“많이 배우신 분이니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루마니아의 독재
자 차우셰스크를 무너트린 건 어느 군중 한 명의 야유였습니다. 적어도 총수가 되시는 데 충분히 발목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고윤아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저런 짓을 저지른다면 장은수를 막자고 자신을 돌봐준 장영복 회장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란걸.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한영수를 지키고 싶었다.
만약 먼 훗날 언젠가 장영복 회장을 죽어서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각오를 하고.
“지금 저를 보는 눈이 너무 무서우십니다. 혹시 저도 어떻게 하시려는 생각입니까?”
고윤아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집어 놓았던 휴대전화를 집어 장은수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혹시라도 저를 해치려고 하실까 봐 방금 저와 장은수 회장님이 나눈 대화를 모두 녹음해 두었습니다. 변호사로서 말씀드리자면, 대화 참여자를 포함한 두 사람의 음성을 녹취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고 증거 능력이 인정됩니다.”
고윤아는 허리를 숙여 장은수에게 인사를 했다.
“회장님,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뒤돌아선 고윤아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장은수가 어떤 눈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었다.
최대한 당당하고 바른 걸음으로 바의 문을 열고 고윤아는 거리로 나갔다.
“아···”
고윤아의 입에서 힘없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바를 나서기가 무섭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보이기 시작한 실루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