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각자의 다짐
“회장님.”
처연하다.
황 실장은 비가 오는 날 동네를 배회하다 처마 하나 찾지 못하고 홀딱 젖은 떠돌이 개처럼 축 처져 있었다.
“흉한 것 덜렁이지 말고, 들어와.”
아닌 게 아니라 황 실장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는 수건 하나를 길게 늘어뜨려 그의 하초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장소가 장소이니 그랬다.
이곳은 목욕탕.
만약 이 말을 듣고 누군가 동네의 흔한 대중목욕탕을 상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
우리가 알고 있는 목욕탕과 이곳은 남과 북의 생활 수준 차이만큼이나 천지 차이였다.
일개 사우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예술적이고, 웅장한.
마치 머나먼 원정을 떠났던 황제가 로마로 돌아와 가장 먼저 피로를 풀기 위해 찾을 것 같은 곳.
제법 적당한 비유라고 할 수 있었다.
장은수가 바로 그 황제요, 황 실장은 반역을 꿈꿨던 그의 가신이라고나 할까.
장은수는 얼굴에 수건을 올린 채 온수에 자기 몸을 맡기고 있었다.
황상규 실장은 잠시 나이에 맞지 않게 성마른 장은수의 등을 보다가 발을 들어 조심스럽게 탕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은 훌륭한 물의 온도였다.
하지만 황상규 실장의 마음은 그 노곤함에도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황 실장. 내가 왜 굳이 여기서 황 실장을 보자고 했을까.”
장은수답달까.
말은 문답으로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가 그랬듯이, 문답으로 시작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을 듣고야 마는 것.
그게 장은수의 화법이었다.
황 실장은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여기라면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알몸이 될 수밖에 없는 이곳에는 휴대전화조차 들고 들어올 수 없으니까.
하지만 황 실장은 대답은 다른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자신의 영특함을 뽐내는 것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장은수는 얼굴에서 수건을 치웠다.
현대 무용의 한 동작 같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알고 있잖아. 그렇게 불쌍한 눈을 하고 내숭 떨 필요 없어.”
역시나 장은수는 황 실장의 머리 위에 있었다.
황 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무슨 말씀을 하시건 여길 나가는 순간부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온탕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황 실장의 얼굴에서 수증기가 맺혀서 생긴 굵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각오는 하고 왔지만, 지금 해저면 깊은 곳에 무거운 추를 달고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황 실장이었다.
‘아니, 기분뿐이 아니지.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황 실장이 온탕의 열기에 몽롱한 기분이 되어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마저 잊을 때쯤, 장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황 실장. 며칠 전 누가 날 찾아왔는지 알아?”
이번에는 정말 답을 몰랐다.
그래서 황 실장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윤아. 그 계집이 날 찾아왔어. 나더러 더 이상 한영수를 건들지 말라고 하더군.”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이···”
그때, 장은수가 검지를 들어 자기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니. 네가 무슨 짓을 했건 나는 알고 싶지 않아. 실패한 일이라면 더욱더.”
‘여기서 내가 네 말을 들어버리면, 나는 귀만 더럽히고 공범이 되어버리는 거니까.’
제우스의 경고에도 판도라가 상자를 열 듯,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감정이 호기심 아닌가?
그 호기심조차도 이성으로 눌러버리는 장은수의 자제력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말도 있지만, 고윤아가 그렇게 용기가 있는 쥐새끼인 줄은 처음 알았지. 날 협박하더군. 이 나를 말이야.”
장은수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독종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고윤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쩐 일일까.
장은수의 눈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고윤아를 미쳐 날뛰게 만든 그 한영수라는 놈. 마치 이 세상 전부가 그 새끼를 돕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지 않은가? 그 사생아 새끼와 맞서는 자는 모두 고꾸라지고 말잖아.”
“··· 회장님.”
“심지어 LK의 김윤제, 한영수에게 붙었다더군. 재계 최고의 여우이자 능구렁이가 그쪽에 줄을 대었다는 건 분명 한영수에게서 무언갈 보았다는 뜻이겠지.”
장은수는 고개를 반쯤 돌려 황 실장을 바라보았다.
“··· 황 실장마저도 흔들리게 만들고 말이야.”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미움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평생을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의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단할지.
그런 점에서 오늘 장은수의 모습은 이례적이긴 했지만, 신선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튀어나온 못에 슬쩍 찔렸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못의 균 때문에 신체를 잘라내야 하는 것 같은 기분.
요즈음 장은수가 시달리고 있는 감정이었다.
모두가 사생아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반대로 그는 점점 외로워지고 있었다.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는 이 고독함에 새벽녘에 몇 번이고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을 들이켜야 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야?”
“회장님.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힘이 없는 자가 떠드는 책임은 그저 공허한 말일 뿐이야. 황 실장에게 아직 그런 힘이 남아있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하나 남아있습니다.”
장은수는 실눈을 떠 황 실장을 바라보았다.
“유서를 쓰겠습니다. 제가 모두 안고 떠나겠습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제 딸··· 앞으로도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뭐라도 남기고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회장님 정말 저 개처럼 일했습니다.”
사표(辭表)가 아닌 사표(死表).
어차피 자신이 산목숨이 아니라는 판단에 내린 결심이었다.
하, 하, 하.
장은수가 웃었다.
윤기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메마른 웃음이었다.
“황 실장도 지킬 게 있는 인간이라는 건가. 가족이라···”
황 실장은 장은수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이미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왔어.’
그런데, 장은수의 입에서 황 실장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말이 나왔다.
“자살이라. 책임을 진다더니, 도망을 치려고 하는군.”
“회장님···”
“네가 지금 죽어버리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지? 이 대한민국에는 입만 살은 인간들이 천지야.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손가락 몇 번 놀리면 자기가 강자와 같은 위치라고 착각하는 버러지 같은 것들··· 반장 선거 앞두고 엿 같은 음모론만 만들어 낼 테지.”
똑━ 똑━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초에 황 실장이 한영수를 어쩔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 미국으로 가라. 개처럼 일한 새경은 챙겨줄 테니. 다시는 돌아오지 마.”
황 실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은 채 장은수를 향해 수 없이 90도로 머리를 박았다.
황 실장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영수, 네 놈이라면 아마 이렇게 했겠지. 그래, 틀림없이 이렇게 누군가를 울게 만들었을 거야. 하지만 난 너와는 달라. 내가 지금 황 실장을 살려두는 건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기 때문이야. 마지막으로 방패막이로 내세울.’
장은수는 우리를 뛰쳐나온 호랑이 한 마리를 상상했다.
인간 세계로 박차고 나온 그 호랑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황 실장을 보며 장은수는 이를 앙다물었다.
‘피할 수 없는 사냥의 시간인 거야. 이제야 알겠어. 한영수, 그 사생아 새끼를 잡아내야 내가 진정으로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을.’
* * *
삐━ 삐━
ECG 모니터는 연약하고 위태로운 비프음을 쉬지 않고 뱉어냈다.
“승우야.”
나는 병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국내에서 뇌 수술과 재활 분야에 있어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는 이 병원.
나는 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오기 무섭게 이곳의 1인실로 병상을 옮겼다.
비겁하게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 겨우 이 정도였다.
계속 병실을 지키고 있는 은주를 오늘 하룻밤은 내가 옆에 있겠다며 등을 떠밀어 집으로 보낸 참이었다.
은주는 날이 갈수록 비쩍 마르고 있었다.
이러다 그녀마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마··· 일어나봐 좀. 은주 웨딩드레스 입은 거 봐야지. 지금 네 짬뽕 기다리는 손님들도 얼마나 많다고···”
내 목소리가 승우의 의식 어딘가를 깨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웅━ 웅━
테이블에 올려놓은 나의 휴대전화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김지수 검사···”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한영수입니다.”
“회장님. 저 김 검사입니다.”
“예, 검사님.”
김 검사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 외에 아무런 배경음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어딘가 조용한 장소에서 전화를 건 것이 틀림없었다.
“회장님. 김만수. 그 사람, 사망했습니다.”
“··· 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불과 며칠 전에 면회하고 온 그가 갑자기 죽어버렸다니···
“샤워실에서 목을 매달았답니다. 일단은 자살로 추정한다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김 검사가 말했다.
어떻게 알긴.
내가 보고 왔으니까.
돈 이야기에 금세 눈알을 번뜩이던 그런 인간이 왜 자살한단 말인가.
김 검사에게 그자의 면회를 갔다 왔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지 알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지켰다.
“회장님.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이 일··· 회장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맞겠지요?”
“예.”
나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아직 들을 말이 남았는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는 구구절절한 말 따위는 지금 필요하지 않으리라.
“알겠습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쭤본 것입니다.”
김 검사와 그 후로 몇 분간 대화를 더 나누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비척이는 걸음으로 다시 병실로 들어와 승우의 병상 옆에 앉았다.
“승우야···”
그 사람 죽었단다.
꼬리 자르기를 당한 것이겠지.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 사람이 저지른 업보니까.
그런데 말이야.
저 위에 올라가면 말이야. 누군가를 다치고, 죽게 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일까?
그런 건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
여기는 영화 속이 아니잖아.
피가 흐르고 있고, 살에선 온기가 흐르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잖아.
나는 말과 마음을 바꿔가며 승우에게 대화를 걸었다.
“처음엔 그냥 즐거웠어. 나라는 한 사람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일어나니까 뭐랄까··· 그래, 우리가 처음으로 놀이동산을 갔던 때 기억해? 딱 그 기분이었어.”
내가 장영복의 아들이든, 태상이든,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말이야.
“그런데··· 당신들과 나는 상관없다고. 그저 내 길을 가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날 내버려 두지 않아. 그러다 너까지 이렇게 다치게 되었잖아. 앞으로 내가 또 뭘 잃게 될까?”
삐━ 삐━
나 그래서 결심했어.
내가 결심한 걸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장영복 회장, 얼굴도 몰랐던 내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소중한 무언갈 더 뺏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승우를 바라보았다.
믿지 못하게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태상 그룹··· 그들이 사람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 내가 집어삼켜야겠어.”
실탄 준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