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태상의 왕
밤이 순식간에 으스스해졌다.
태초부터 은밀하게 품고 있던 밤의 공포에 정원에 심어진 키 작은 조경용 나무들이 정맥처럼 뿌리를 드러내고 땅 위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당신의 태상의 왕으로 만들어주겠다.
내 입으로 내뱉은 선언은 이 밤의 분위기를 그렇게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많은 생각으로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태상을 어떻게 집어삼킬 것인가.
역시나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은 비어 있는 왕좌.
태상 그룹 총수 자리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
기껏 마음을 먹은 김에 내가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조하듯 말하자면 고작 내가 반쪽짜리라는.
이것만은 내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바뀔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장영복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 역시 태상의 총수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을 한다면?
나와 은호 형의 동맹의 고리는 끊어질 것이며, 장은수 회장 쪽에게는 세력을 끈끈하게 집결시키는 구실만 던져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스스로 외통수에 걸려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는 것은 은호 형이어야 했다.
킹메이커를 자처할 마음을 먹자, 비로소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은호 형은 심사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전적인 나의 말을 치기 어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나의 참전을 누구보다도 바란 것은 다름 아닌 그.
그는 내 기적과도 다름없는 신화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다.
능력에 대한 의심은 없으리라.
어쨌든 은호 형의 허락을 구하려고 지른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이 이야기의 끝까지 나의 열차에서 내려서는 안 되는 승객이었다.
“형님에게는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이 맞겠지요. 며칠 안으로 장영복 회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숨겼던 비밀을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은호 형은 침묵을 지켰다.
“당연히 장영복 회장님의 유산에 대해서도 제 몫을 주장할 겁니다. 섭섭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애초에 그걸 도와주겠다고 먼저 저에게 다가오셨던 건 형님이니까요.”
마침내 태상 자동차 그룹 회장의 입이 열렸다.
그는 어떤 오해라도 풀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당연한 너의 권리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의 얼마를 너에게 떼어주어야 한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어.”
“돈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장은수 회장이 가진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깎아낼 수단입니다.”
“갑작스러운 너의 태도 변화가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놀랍구나.”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은호 형에게는 하늘과 땅이 뒤집힌 듯 180도 바뀐 내 태도가 의아하기만 하겠지.
“··· 장은수 회장은 저에게서 아주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고 변 때문이야? 고윤아 변호사가 우리 집안일에 휘말려 피해를 본 것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요. 저에게 있어서 그것보다도 훨씬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해줄 수 없는 거야?”
은호 형이 걱정이 들어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은호 형이 왕이 될 거라면,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태양같이 하늘에 떠 있기만 하면 된다.
은호 형의 양심은 지금 무기가 아니라 약점이다.
당신의 형제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나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태상의 총수라는 것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침묵에 은호 형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두꺼운 손을 들어 자기 이마를 짚었다.
“일단은 저에게 알려주세요. 총수 선출을 위한 사장단 회의라는 것. 어떻게 예정되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방법은 심플하다. 주요 계열사 사장 10명으로 구성된 선출 회의가 열릴 거야. 거기서 과반의 합의로 결정이 될 거다.”
“형님을 제외하면 5표··· 가 필요하겠군요.”
“그래. 공개적인 거수로 확인할 거야. 아버지가 유언으로 명시하셨던 방법이다.”
거수 투표라.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말이 과반이지 실질적으로 몰표가 나올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사장이 용기 있게 대세를 거스르는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는 격이랄까.
자식들뿐만 아니라, 아래의 수하들마저 끝까지 헤매게 만드는 장영복 회장의 방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래서. 형님이 확보 할 수 있는 우호 표가 얼마나 됩니까.”
은호 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하기 부끄럽다만, 내 편이 돼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2표 정도야. 형이 쳐내지 못한 계열사 사장들이지.”
“제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요. 괜찮습니다.”
“··· 뭐?”
은호 형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형님까지 하면 3표, 그리고 1표 정도는 확정적으로 이쪽으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1표라고? 누굴 말하는 거지?”
“형님의 가족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장은우 사장 말입니다.”
새삼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혹은 통렬한 강펀치를 얻어맞은 복서처럼 은호 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소리 하나만 하자. 누나는 결코 너라는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야.”
나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
나는 이제 와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소리지 않냐며 돌아서던 장은우 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장은우 사장과는 모종의 일로 얼굴을 터놓은 상태입니다. 실은 제가 장은우 사장님은 저에게 빚이 있습니다.”
“영수 너는 도대체··· 손이 어디까지 뻗어있는 거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은호 형의 눈.
“누나가 대관절 너한테 무슨 빚을 졌다는 거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은우 사장님을 위해서도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니까요.”
“··· 그래. 좋다. 헌데, 네가 유산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누나 역시 자기 몫을 양보해야 한다는 소리야. 그 빚이 얼마인지는 내가 모르겠으나, 과연 뱉어내야 할 것보다 클까?”
지당한 의심이었다.
말은 빚이라고 했지만,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 장은우와 나 사이에 간신히 쌓인 우호의 감정은 재산싸움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십상이리라.
하지만 아까 은호 형에게 말했듯이, 나는 어떤 욕심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장은우 사장이 나에게 내놓아야 할 것 이상을 돌려주면 그만이다.
그것이 장은호 회장이 그녀에게 제 편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주기로 한 것보다 더 크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그 부분은 전적으로 저한테 맡겨주세요. 자, 이제 네 표입니다. 두 표만 더 확보하면 과반이군요.”
나는 놀라운 마술이라도 펼쳤다는 것처럼 은호 형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모습에 은호 형은 고개를 툭 떨구고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이 힘든 일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말만 들었을 때는 다 쉬워 보이는 법이지요.”
“그래.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말조차도 어렵게 하는 걸 능력이라고 착각하고는 하지. 그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영수, 너는 확실히 특별한 아이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뭐지? 네 대범함의 끝이 어디냔 말이야.”
“장은수 회장의 권위를 무너트려야지요.”
“권위?”
“네. 모두가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믿는 것을 실패하게 할 겁니다. 우선 태상 건설이 지대한 공을 들이고 있는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 그걸 망가트릴 겁니다.”
은호 형이 여러모로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형을, 장은수 회장이라는 사람과 태상 건설을 얕봐서는 안 된다. 너희와 거기가 소화할 수 있는 파이의 수준 차이는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가 없어.”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는 태상이 가져갈 파이를 빼앗아 올 겁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미 LK그룹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이야 순전히 자기들도 숟가락 좀 들이밀고 침 좀 발라보자는 속셈이겠지만···”
“허, LK가 움직였다고?”
“김윤제 회장이 직접 요청을 해왔습니다. 자기들이 키를 잡겠다고 난리를 치지만 않는다면 배에 못 태워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에 저희와 협업할 기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누구···
이제는 내게 질문하는 것도 지친다는 듯, 은호 형은 말없이 눈만 굴렸다.
애초에 퀴즈쇼를 할 생각도, 선생님이 될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태상 자동차 그룹입니다. 고왕 건설과 LK, 그리고 태상 자동차가 함께 한다면 해볼 만한 그림이 나오지요.”
은호 형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거야?”
“불가능할 이유가 없지요. 에메랄드 시티는 미래형 도시를 추구합니다. LK의 선도적인 인공지능 기술과 태상 자동차의 전기차··· 더욱이 태상 자동차는 3레벨 자율주행의 양산형 출시를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스마트 모빌리티 사업 측면에서 카타르에서 큰 환영을 받을 겁니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그룹 차원에서 반발이 엄청날 거야. 태상 자동차에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거라고.”
은호 형이 비명처럼 소리를 쥐어 짜내었다.
“어차피 같은 태상의 이름 아래 있다고 해서 장은수 회장이 형님을 에메랄드 프로젝트에 참여시켜줄 것 같습니까?”
“···”
은호 형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했다.
배신자가 되는 것도, 단순히 총수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룹 전체를 생각하는 그의 속마음도 방금 내가 한 말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아직 그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님이 총수가 되시고 나서 인수하시면 됩니다.”
“인수?”
“고왕 건설 말입니다. 태상건설과 합병을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은호 형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가 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은호 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확실히.”
생각이 정리가 된 듯 은호 형이 머리를 끄덕였다.
“에메랄드 시티 프로젝트는 초장기 이벤트야. 적절한 시기에 합병의 논의된다면, 그룹의 파이를 빼앗는 게 아닌 것이 되지···”
“물론 비용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 회사의 주가가 정말 많이 올랐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고왕 건설 전 임직원의 완전 고용을 조건으로 달 겁니다. 하지만 가치는 있지요. 형님과 저, 그리고 태상 그룹 전체까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너··· 영수, 너도 만족할 수 있는 결과···”
은호 형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그럼 자연스럽게 네가··· 태상 건설의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되겠구나.”
이제야 은호 형이 내 이야기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500억을 상속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