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78화 (170/200)

178. 드라마가 있어요

“회장님께서 심려가 깊으시겠어요.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한영수가 그 장영복 회장님의 아들이었다니.”

장은수는 가만히 붉은 입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머! 이거 제가 회장님 앞에서 말실수를 했네요. 아무렴요. 첩의 자식··· 아니, 그것도 안 되지요.”

최화란은 장은수를 향해 요란스러운 손동작을 보였지만, 장은수는 거기에서 어떠한 진심도 느낄 수 없었다.

한영수가 대한민국을 향해 폭탄선언을 한 지 2주가 지났다.

대중들은 젊은 사생아의 등장에 열광했다.

누군가는 한영수의 비극적인 출생에 안타까움을 보였고, 다른 누군가는 한영수의 놀라운 성공 신화에 감탄을 보냈다.

어떤 운동 유튜버의 영상 속에 한영수가 찍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곤, 그 영상의 조회 수는 무려 300만까지 역주행 떡상을 하기도 했다.

장은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멍청한 것’들은 한영수의 외모가 영화배우 못지않다며, 장영복 회장이 남긴 진정한 유산이라고 장난스럽게 떠들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들에의 내면에는 한가지 요소가 있었다.

대중들은 한영수를 자신과 동일시 시키고 있었다.

자신과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삶을 살던 젊은이가 한순간에 인생을 바꿔 가는 사건.

거기서 그들은 일종의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현상들은 장은수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대중들이 확대 생산해내는 이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를 정도로 장은수는 무지하거나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위기감의 근원은 지금 이 시간에도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을 수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영수.

장은호는 알고 있었다.

결코 한영수가 관심이나 받자고 이런 큰일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는 걸.

그래서 오늘 장은수는 최화란을 찾아왔다.

자신도 한영수의 돌발행동에 대응할 전략을 찾아야 했다.

‘한영수, 제 놈도 인간인 이상 분명히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걸 찾아내기만 한다면···’

장은수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한영수를 사생아 새끼라는 멸칭으로 부르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이 사채업자로부터 무언가 작은 소스라도 얻어내면 상황이 단숨에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장은수는 품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잘나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락을 찍는 것은 언제나 인기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이야말로 한영수를 파멸시키기에 오히려 적절한 시기 아니겠는가.

최화란을 만나보니 그녀는 장은수의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였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최화란은 장은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이 의뭉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최 사장은 투자금을 댔는데도 한영수에게 내몰림을 당했다고?”

“네. 차 여사라고 아시죠? 저에게는 스승이에요. 스승님의 부탁 때문에 밑에서 소일거리나 좀 맡겼는데 일솜씨는 제법이라 계속 옆에 두었었죠. 그러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버렸지 뭐예요.”

최화란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차 여사 생각만 하면 장은수는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그 뻣뻣한 늙은이를 도대체 한영수가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

차 여사만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으리라.

“메이저로 올라오자 불안 요소는 잘라냈다··· 확실히 그 양반의 자식이라고···”

“예?”

“아, 아니요.”

“저 온갖 더러운 꼴 많이 당했지만, 이번만큼 비참한 적은 없었답니다. 이 최화란이가 단물만 쪽 빨릴 거라고는. 한영수가 그런 꿍꿍이인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톡, 톡━

장은수는 건반을 치듯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명백히 신경질적인 움직임이었다.

최화란의 눈동자는 장은수의 손가락을 따라 위, 아래로 움직였다.

“뭐하나 물읍시다.”

“예. 회장님. 뭐든지 말씀하세요. 이 년이야 감히 누구 앞이라고 여쭙는 것에 대답 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어요?”

“그럼 최 사장은 왜 태상 백화점의 지분을 욕심 낸 거요?”

장은수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시미 칼이 펄떡펄떡 뛰는 횟감을 해체하는 것 같은 서슬 퍼런 눈빛!

‘이게 말로만 듣던 장은수라는 인간이군···’

속된 말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최화란이였지만, 그녀는 등허리 조금 아래쯤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선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최화란은 능글맞게 말했다.

“어머···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저도 모래알 정도지만 태상 그룹의 주주예요. 그거 깨끗한 돈으로 제가 사랑하는 태상 백화점에 투자한 것뿐인걸요.”

최화란의 말에도 장은수의 얇은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난처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던 최화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 솔직히 한영수 때문이에요.”

“··· 한영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영수. 시작은 고작해야 제 밑에서 심부름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 저렇게 잘나가는 것 보세요. 저 화란이, 욕심 정말 많아요. 질투가 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죠. 저도 양지로 좀 나가보고 싶었어요. 이거면 이유가 될까요?”

“···”

“누구보다도 회장님이시라면 더 잘 이해하실 것 같은데요? 한영수, 그 애··· 사람을 뭔가 이상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재주가 있잖아요.”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린다.

장은수는 최화란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최 사장은 욕심이 많으시다고?”

“예. 그 욕심이 아니었으면 어디 제 이름 따위가 회장님의 귀까지 들어갔을까요?”

장은수는 몸을 뒤로 눕혀 소파에 기댔다.

“최 사장이랑은 대화가 좀 될 것 같군. 난 사람을 안 믿어요. 차라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믿지.”

“욕심을 채워주는 동안은 같은 배를 탄다는 말씀이시지요?”

장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만들어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럼 제가 오늘 회장님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게 될 거라고 기대해봐도 좋을까요?”

최화란의 붉은 입술이 교태를 부렸다.

“최 사장이 하기에 달렸겠지. 혹시 압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최 사장이 정말로 양지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지.”

“한영수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죠? 뭐··· 한영수에 대한 칭찬이야 지금 세상 사람들이 지겹도록 떠들고 있으니 그게 궁금하시진 않을 테고···”

장은수가 턱 끝을 까닥거렸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떠들어보라는 제스처였다.

“그런데 회장님.”

최화란의 눈이 장은수 못지않게 가늘어졌다.

“지금··· 이거 회장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요?”

“오늘 초면이라 나를 잘 모르는 모양이오. 나는 그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아. 최 사장은 그저 나에게 줄 것을 주고, 받아 갈 것을 받아 갈 생각만 하는 게 이로울 텐데.”

장은수가 은연중에 엄포를 내비쳤지만, 어쩐 일인지 최화란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깔깔 웃었다.

“회장님. 이게 얼마나 값이 있는 건지 알아야 이 년이 받을 것도 계산기를 두들겨 볼 수 있지요. 그럼 저 욕심 좀 내려놓을게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제가 앞으로도 계속 회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도록 허락만 해주시겠어요?”

“··· 날 돕겠다?”

장은호는 최화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눈썹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말씀 올린 그대로예요. 회장님이 보시기에는 하찮은 일이겠지만 제가 감히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요.”

“회장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조용히 처리해야 할 돈들이 있겠지요? 세상에 드러내기 곤란한 그런 것들이요. 저에게 조금이라도 맡겨보시겠어요? 이 년이 회장님 마음에 쏙 들도록 몇 바퀴 돌려서 내놓아 보일 테니까요. 써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앞으로도 지저분한 뒤처리는 제가 봐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가져가겠다?”

“부스러기도 부스러기 나름이지요. 회장님 정도 스케일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저희 식구들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텐데요.”

톡, 톡, 톡, 톡.

다시 장은수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계추 똑딱이듯 의미 없는 소리가 공간을 얼마나 채웠을까.

“걸작이군.”

장은수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장은수는 끅끅대며 웃기 시작했다.

최화란은 방긋대며 그런 장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태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화란은 잔뜩 긴장한 채로 장은수의 반응을 염탐하고 있었다.

“··· 그게 한영수가 준 대본인가?”

웃음소리가 멎고 장은수는 최화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순간 흔들리는 최화란의 동공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덫을 쳐서 날 잡아보겠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는데 아쉽겠는걸? 윤일중 회장을 칠 때도 이따위 조잡한 수작질을 했나?”

안면근육을 씰룩거리며 장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간 이글거리는 눈으로 최화란을 바라보던 장은수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뭐 하나 묻자. 한영수가 그렇다 치고, 너 따위가 날 상대로 장난질을 치면 모가지가 몇 개여도 남아나지 않을걸?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장은수의 공세에도 여전히 최화란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장은수라도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테이블 밑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회장님. 바쁜 시간을 내셔서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회장님께 도움이 될 말을 하나만 올릴까요?”

“어디 떠들어봐.”

“회장님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한영수 이야기에요. 왜 그 애의 곁에 자꾸 사람들이 모이는 걸까요?”

최화란은 장은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영수에게는 드라마가 있어요.”

“··· 미쳤군.”

* * *

“회장님. 출발하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사··· 아니, 오늘은 그냥 집으로 향하지.”

장은수의 머릿속에 최화란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드라마가 있다고? 그깟 싸구려 사연 따위가 무슨 힘이 있는데?’

장은수는 슈트 안쪽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성급한 그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여 연락처에서 애인의 번호를 찾았다.

이런 날에는 차라리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뒹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장은수의 휴대전화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의 상대방은 태상 금융의 전기형 사장이었다.

전기형 사장은 일찍이 장은수가 태상 건설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심복이었던 자다.

황 실장이 장은수의 오른팔이었다면, 전기형 사장은 왼팔 정도랄까.

황 실장은 명령에 싫다, 좋다 없이 따랐기에 옆에서 계속 부릴 생각으로 남겨두었지만, 셈속이 빠르고 타고난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는 전기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무섭게 태상 금융에 박아버린 장은수였다.

돈주머니 역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사장단 회의에서 바람잡이까지 해야 하는, 꽤 중책을 맡은 전기형 사장이었다.

“회장님, 전기형입니다.”

어쩐 일인지 전기형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느껴지는 장은수였다.

“뭡니까.”

심기가 어지러운 장은수는 그 조급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장님께 꼭 보고드려야 할 사안이 있어서··· 그 한영수 말입니다.”

또 한영수···!

하마터면 장은수는 욕지거리와 함께 휴대전화를 집어던질 뻔했다.

“큰일이 났습니다. 그 한영수가 대표로 있는 BH 인베스트먼트 말입니다. 그쪽에서 태상 금융의 회사채를 미친 듯이 사들이고 있습니다.”

툭━

휴대전화가 시트 위에 떨어졌다.

장은수가 집어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힘이 풀린 장은수의 손아귀에서 자유를 꿈꾸듯 스르르 떨어졌을 뿐이다.

공격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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