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차도살인
“2배라. 장은수 회장이 충분히 노발대발할 만하군요.”
“워··· 그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절 튀겨서 프라이드 치킨이라도 만들 기세더군요.”
앨런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어쨌든 미스터 한의 예측이 이번에도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그쪽에서는 이제 우리를 bully 정도로 여길 겁니다. 풋옵션을 무기로 협박해서 한 몫을 챙기려는.”
“그리고 이 상황은 채권을 상환할 현금만 만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겠지요.”
장은수와 앨런 사이에 오고 갔을 대화가 선하게 보였다.
분노를 터트리고 돌아갔다지만, 아마도 장은수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일이 단순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깟 6천억, 어떻게든 만들면 그만이다.
오히려 우리가 상환을 하게 되면 채권의 액면가보다 비싸게 주고 산 너희들이 큰 손실만 입게 되는 것이지.
아마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감히 주제 모르고 돈으로 자신에게 덤벼들었다는 것에 조소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나의 목적이었다.
장은수를 판단의 오류에 빠트리게 만드는 것.
나는 태상 금융의 채권을 돈으로 상환받을 생각이 없었다.
애초부터 인위적으로 태상 금융을 무너트리고 그 위기에 배팅할 의도가 없었다는 소리이다.
BH 인베스트의 이름으로 긁어모은 채권.
그것들은 대부분은 전환사채였다.
여기까지 말을 하면 누구라도 감이 올 것이다.
고왕 건설을 인수하면서 얻은 교훈을 어디 그냥 흘려보내서야 되겠는가.
나는 태상 금융의 회사채를 몽땅 지분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장은수를 의도적으로 ‘사채’에 집중하도록 만든 시점에 나는 다른 글자를 보고 있었다.
‘전환’이라는 단어를.
“애초부터 우리가 돈 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뒤통수가 얼얼하겠군요.”
“끝까지 우리의 의도는 숨겨야 합니다. 저쪽에서 현금을 만들겠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게 해야지요. 전환권을 행사하면 우리가 가지게 될 지분은 어느정도입니까?”
“16%입니다. 물론 저쪽에서도 대응하겠지만, 어쩌면 최대 주주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순환 출자로 지분 관계가 지저분한 것이 이 경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겠네요.”
“계속 물 밑에서 태상 금융의 주식을 모아주세요. 아주 나중에야 깨닫게 되겠지요. 앨런이 2배를 불렀을 때 채권을 사들여야 했다는 것을.”
··· 2배?
3배, 아니 4배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장은수는 이렇게 쉽게 태상으로 침입하도록 문을 열어주었으면 안 된다.
“아, 그리고 장 회장이 다녀간 뒤로 태상 금융의 전기형 사장에게 또 연락이 왔었습니다. 대장이 체면을 잔뜩 구겼으니 다시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고··· 총알받이를 보낸 것이겠지요.”
“우리가 만남을 피할 이유야 없지요. 계속 채권을 두고 흥정을 할 것처럼 냄새만 흘리세요.”
“All right, boss. 그나저나 전기형 사장은 어쩌지요? 그 사람 자기 보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사정이야 어쨌든, 사장단 회의가 있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쳐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혹여라도 전기형 사장에게 어떤 작업도 하지 마세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장은수 회장이 직접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장 회장은 믿음보다 의심이 몇 배로 강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전기형 사장에 대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 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혼자서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게 만들다, 결국 그가 직접 전 사장을 잘라내도록 만들겠다?”
“예. 바로 그겁니다.”
지금 전기형 사장을 내몰고 은호 형 쪽의 사람을 심어봤자 고작해야 1표를 더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적의 결속력을 다져줄 뿐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하지만 황 실장이라는 자에 이어 전기형 사장까지 장은수가 제 손으로 내몰게 만들면 만인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곁에는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사장단 일원의 민심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차도살인.
측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력 전체를 흔들어놓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하하하, 자기 덫에 자기가 걸려드는 셈이군요. 이거 어떨 때 보면 진짜 악당은 미스터 한 같습니다.”
- 괴물과 싸울 때, 너 역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앨런의 말에 문득 신부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아무런 악의 없이 하는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앨런, 그럼 제가 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만남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한 번 더 악당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강남의 한 프라이빗 다이닝 룸.
한 끼 식사가 누군가의 한 달 월급에 달하는 이곳.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안다고 해도 와볼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다.
재벌가와 정치인의 은밀한 거래가 오가거나, 대한민국 최고 스타의 밀회 장소가 되기도 하는 곳.
실상 이곳의 손님들은 비싼 값에 걸맞은 음식을 바라는 것이 아니오, 그저 그 돈으로 숨겨야 하는 비밀을 사고 있는 것이었다.
“제법이네. 이제 제법 재벌 태가 나는걸? 여기서 날 다 보자고 하고.”
“이런 데 취미 없습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하기야, 너와 내가 만난다는 걸 기자들이 알게 되면 들개들처럼 달려들겠지. 아니 하이에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짜증 나는 족속들이야.”
내 앞의 여자가 선택한 메뉴는 양식이었다.
그녀는 자기 입술처럼 붉은 속살을 가진 스테이크를 교양있는 솜씨로 먹기 좋게 잘라냈다.
장은우.
나의 배다른 오누이는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하긴, 날 만났을 때 그녀는 인생 최대의 암초에 부딪혀 있었으니까.
“사고를 거하게 쳤던데? 다음은 뭐야. 인제 와서 가족이 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한바탕 굿판이라도 열어보려고?”
장은우가 다시 입을 연 것은 20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채 3분의 1도 먹지 않았을 때였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찾을 것을 찾아야지요. 내부에서 절 돕겠다는 사람도 있고.”
장은우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널 도와? 그것도 태상 내부에서? 누가 그런 배신을 각오해?”
“배신이라는 말은 좀 그렇네요. 은호 형이 절 도울 겁니다.”
“··· 은호 형.”
새삼 낯선 이름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장은우는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 말을 제 입으로 되풀이했다.
“음흉하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야. 소름 돋아. 언제부터였어? 너희 둘?”
“언제였는지보다는, 왜인지가 중요하겠지요.”
“날 바보 취급하지 마. 은호가 왜 널 찾았는지는 뻔히 보이니까. 그런데 이거 어쩌지?”
딱딱하게 굳은 장은우의 얼굴은 제 오빠의 냉소적인 표정과 닮아 있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아버지의 유산에 손을 내밀었다는 건 내 몫을 나눠줘야 한다는 거야. 아쉬워. 사실 나, 네가 마음에 들었었거든. 그런데 이러면 판이 깨지는 거지. 적의 적은 나의 동지야. 당연히 나는 은수 오빠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어.”
“제가 사장님을 도와드렸던 건 까맣게 잊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거야. 널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네가 말했어. 네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그 부탁이 결코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거라면서.”
“제가 최화란 사장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태상 백화점 주식, 사장님께 돌려드릴게요.“
“··· 뭐?”
“재물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는 증표랄까요.”
장은우는 나의 저의를 확인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저에게 내놓아야 할 유류분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게 안 된다고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벌충을 해드리겠습니다. 사장님에게 손해는 없을 거라는 소리예요.”
“그 어떤 달콤한 거짓말보다도 믿기 어려운 말이네. 최소한 조 단위가 될 그걸 포기하겠다고?”
나는 즉답을 하지 않고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그리고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다소 싸늘하게 말했다.
“우습네요. 믿지 않으면 사장님에게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겠지.
장은우는 입을 앙 다물었다.
“제가 왜 은호 형과 짬짜미했는지 짐작을 하신다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 은호 형을 태상의 총수 자리에 앉힐 생각입니다.”
“...”
“그래서 지금 사장님과의 인연이 저에겐 돈보다 더 소중합니다.”
“... 사장단 회의 때 은호에게 한 표를 달라? 그래서 네가 얻는 것이 뭐지? 은호가 자기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약속하기라도 한 거야?”
“제가 얻을 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하지 못하실 거고요.”
“순진한 생각이야. 내가 은호 쪽에 선다고 쳐. 나머지 사장단 일원들은? 그들 중에서 은호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태상이라는 이 기업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알고는 있어?”
“사장님. 설탕으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 장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자동차는요? 혹은 TV 같은 가전제품은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화학에 대해서는 잘 몰라.”
“화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태상 그룹은 아주 오래전에 작은 설탕공장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커져서 건설업을 하고, 지금의 태상까지 오게 되었다고.”
굳이 태상의 역사에 대해 떠들어서 장은우를 감동을 주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 작은 설탕공장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반대로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고 해도 분명히 작은 허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오히려 몸집이 너무 커져 버렸기에 틀림없이 빈틈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반드시 그걸 찾아낼 겁니다.”
나는 뜨거운 시선을 장은우에게 못 박고 입을 열었다.
“뭘 받기로 했습니까. 장은수 회장에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대가로.”
“··· 호텔, 호텔 체인을 받기로 했어.”
장은우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자기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호텔 체인이라. 확실히 사장님과 잘 어울리는 사업이긴 하군요. 하지만 욕심이 보통이 아닌 장은수 회장이 흔쾌히 내놓았다는 건 그만큼 실속은 없다는 소리겠지요.”
눈치를 살피니 내 말이 꼭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랄까.
호텔 체인 사업 하나쯤은, 오늘 내가 장은우에게 제안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태상 총수 자리 말입니다. 왜 당연하다는 듯이, 형제 둘의 다툼이 되었을까요. 지금 제 앞에 또 다른 장영복 회장님의 적통이 있는데.”
“지금 날 말하는 거야? 난 노인네들에 둘러싸여서 도장이나 찍는 자리 재미없어.”
“거짓말.”
장은우를 향해 딱 잘라 단언했다.
미적지근한 말에서 외려 그녀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장영복 회장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꼬리보다는 머리가 되길 원할 것이다.
다만 그 세가 약해 대권에 도전하는 대신 영리하게 실익을 챙기려고 하는 것뿐이고.
“이쪽에 서세요. 제가 예전에 베풀었던 도움 따위는 모두 잊어도 좋습니다. 은호 형이 총수가 된다면 형을 설득해서 꼭 이뤄드리겠습니다. 장은우 사장님이 원하는 것, 어쩌면 본인조차 몰랐을지도 모르는 소망을요.”
장은우의 두 동공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태상 백화점을 계열 분리 시켜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호텔 체인을 포함해서요. 더 이상 두 형제의 그늘 아래 숨어 있지 마세요. 당당하게 한 그룹을 이끄시는 겁니다.”
괴물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