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설계자
“··· 저, 한영수 회장님 맞죠?”
한 여자가 나와 은호 형의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과연 저것이 옷이라는 물건의 기능적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편해 보이는, 하지만 공작새의 깃털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운동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가 저 드레스를 소화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일상에서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지.
인조미랄까, 운동과 식단 뿐 아니라 현대 의학에도 자기를 가꾸는데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을 것이 틀림없는 여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초면이었다.
“예. 제가 한영수가 맞습니다만. 실례지만,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여자는 내게 정체를 밝히는 대신 은호 형을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두루뭉술한 여자의 말에도 어쩐 일인지 은호 형은 반갑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 말하는 겁니까? 일부로 숨긴 적 없습니다. 아버님은 잘 계시고요?”
“아빠야 늘 똑같으시지요. 그나저나···”
별이라도 박힌 듯 반짝이는 눈을 은호 형에게서 돌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은호 형과 악수를 끝내고 잠시 자기 클러치 백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명함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조금 특이한 명함이었다.
명함이란 게 뭔가.
누군가에게 이름이 뭔지, 뭘 하는지, 아주 기초적인 정보를 전해주는 물건이 아닌가.
그런데 이 명함에는 달랑 휴대전화 번호뿐이었다.
이것만으로 이 여자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렇게 당돌하게 구는 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아요. 언제 한번 시간 나실 때 연락해 주시겠어요? 문자 메시지라도 좋아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어.”
여자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리더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 뭐야, 저 여자는.
혹시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재벌들만 상대하는 그렇고, 그런 여자인가?
“누굽니까? 형님이랑은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은호 형은 나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뭐에요.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주세요.”
“대산 그룹 회장의 막내딸, 이름은 이민주. 나이는 아마 20대 후반쯤 되었을 거야. 저 친구, 아주 맹랑한 구석이 있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은호 형이 짧게 말했다.
아···
여자의 정체는 나의 상상과는 아득하게 멀었다.
대산 그룹이라면 재계 순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
대산의 회장이 재벌가에서 소문난 딸부잣집이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다.
은호 형은 오늘 나를 무작정 이곳에 데려왔다.
좋았건 싫었건 장은수 회장과 술잔을 나눴다는 말에 자극을 받기라도 한 걸까.
그는 특별한 사람들만 출입하는 것이 틀림없는 고급스러운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어차피 이젠 더 우리 관계를 숨길 필요 없잖아. 밖에서 제대로 한잔해보자. 오늘은 특별히 와이프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니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손을 잡아끌던 은호 형의 말이었다.
“영수야. 소위 말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
한참을 더 즐거워하던 은호 형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보기를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 질문에 많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프라이버시야. 여기 음식값, 그리고 술값도. 세상의 시세 따위는 관심 밖이라는 듯 터무니없는 가격들이잖아.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사는 거야.”
과연 그랬다.
태상 자동차 그룹의 회장과 이제는 제법 유명 인사가 된 내가 들어섰음에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정원 같은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들의 일행들만 존재한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슬쩍 ‘저기 좀 봐, 그 사람이잖아.’ 따위의 귓속말이야 사람이니까 할 수밖에 없겠지만, 분명한 건 이민주라는 저 여자처럼 대놓고 사교적인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서로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일종의 에티켓인 셈이지. 여기선 말이야. 그런데 영수, 네가 인물이 정말 좋긴 한가 보다.”
또 한 번 하하 웃는 은호 형.
그의 말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저 대산 그룹의 딸이라는 사람은 오직 나와 인사를 하겠다고 이곳의 규칙을 깨는 모험을 했다는 것.
나는 입맛을 다시며 명함을 슈트 안쪽 주머니에 무심하게 챙겨 넣었다.
“어? 명함 챙기는 거냐? 고윤아 변호사가 알게 되면 참 많이 섭섭해하겠는걸?”
“단순한 습관입니다. 습관. 영업사원 시절 몸에 밴.”
“그나저나, 말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고 변호사랑은 잘 지내고 있지?”
“예. 우리 둘은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고윤아가 장은수 회장을 찾아갔던 이야기를 은호 형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듣자 장난기가 가득하던 은호 형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고윤아 변호사는 정말 용감한 여자지.”
“과분한 여자예요. 저에게는.”
“아니야.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 사실 태상에 있던 시절 고윤아 변호사를 얼음 공주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어. 젊은 남자 직원들 멋모르고 그녀에게 대시했다가 참 많이도 까였었지.”
문득 자신에게 고백해오는 남자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딱딱하게 말하며 허리를 숙일 윤아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참 놀랐지 뭐야. 고윤아 변호사가 영수 너를 바라보는 눈을 보고 말이야. 왠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애절해 보이기도 하고··· 고 변과 그렇게 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그렇게 풍부한 감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
“그랬나요.”
“영수, 너는 참 인복이 좋아.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그게 네가 가진 진짜 힘이 아닌가 싶다.”
입을 닫고 잠시 생각에 잠긴 은호 형.
그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는 목소리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네가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마치 표지판 같았다.
한 여자의 등장에 샛길로 빠졌던 이야기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내게 사람이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는 것과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
언뜻 단절되어 있는 것 같은 두 말은 사실 하나의 문장을 인공적으로 나눈 것에 불과했다.
분명히 은호 형이 나에게 어떤 임무를 부탁하고 싶은 것일 텐데.
왜일까.
나는 그 임무가 궁금하기 이전에 불현듯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잠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 그리움의 이유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아, 그렇구나···
궁금증은 금세 해갈이 되었다.
아까 여자가 주고 간 명함과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라는 은호 형의 말.
전혀 서로 상관없는 이 두 사건이 합쳐져 나도 모르게 어떤 이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었다.
복희 할머니.
복희 할머니의 명함을 내게 건네줄 때도 은호 형은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명함은 마치 지금 대산의 막내딸이 주고 간 그것과 비슷하게 오직 주소만이 적혀있었다.
마치 잊고 있었던 음악을 오랜만에 들으면 그 음악을 한창 듣던 시절이 떠오르듯, 나의 무의식이 시나브로 할머니를 연상해버린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절은 내 인생 전체와 비교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순간 동안 당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 요놈, 개호주야.
아직도 어디선가 당신께서 날 이렇게 부를 것만 같은데.
할머니는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 영수야.”
은호 형의 목소리가 날 다시 현실로 불러내었다.
“듣고 있니?”
“아··· 예, 형님. 잠시 다른 생각을··· 그래서 누굽니까? 제가 알아야 할 사람이.”
“사장단의 일원 중 한 명이다. 아카데메이아의 신형복 사장.”
“예?”
뜻밖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태상의 계열사의 이름이 나왔다.
당연히 태상 전자나 태상 기획같이 그룹 내에서 손꼽는 매출을 자랑하는 회사와 그 회사의 사장이 호명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카데메이아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원 교육이나 인재 양성을 담당할 뿐인 그 회사가 사장단에서 대단한 입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욱이, 아카데메이아의 사장 신형복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은퇴 시점을 한참 넘긴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래.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거기냐 싶겠지.”
내 속마음을 훤히 안다는 듯이 은호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누구나 알듯이 이윤의 추구이다.
그런데 아카데메이아는 그런 기업의 전통적인 목표 추구와는 거리가 먼 회사.
매출 순위로 따진다면 태상의 계열사에서 아마도 바닥을 기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신형복 사장, 그분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연세가 꽤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올해로 딱 일흔이지.”
“진작에 퇴직하고도 남을 연세군요. 그것보다도 그 연배시라면 틀림없이 장영복 회장의 측근 중 한 명이었을 것 아닙니까?”
장영복 회장의 별세 이후 장은수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선친의 색깔 지우기였다.
무슨 요행인지 신형복 사장은 그 풍파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장은수의 성격상 실권을 쥐여주었을 리 없다.
“잘 물어보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를 두고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말하는 걸까? 반대로 생각해보자. 작은 계열사에 불과한 아카데메이아, 그리고 신형복 사장이 어떻게 사장단에 포함될 수 있었는지. 아니, 근본적으로 형 밑에서 그가 왜 살아남게 되었는지 말이야.”
아직 질문의 답은 요원했다.
저렇게까지 은호 형이 말하는 것을 보니 신형복 사장에게 뭔가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무언가가 대체 어떤 것일지는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힌트를 하나 더 줄까? 사실 신형복 사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진작에 사표를 냈었어. 모시던 주군이 떠났으니 가신도 물러나는 것이 맞다는 심정이랄까? 그런데 그런 그를 부득불 붙잡은 것이 은수 형이야, 몇 년만 더 후배들을 양성해달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야.”
주군이라는 표현까지 썼다는 건 장영복 회장의 생전에 신형복 사장이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소리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틀림없이 신형복 사장의 존재는 장은수에게 눈에 가시와 다름없었을 터.
당연히 장은수 회장과 신형복 사장 사이에 유달리 특별한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는 건···
“신형복 사장이 뭔가를 알고 있군요. 장은수 회장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빙고.”
은호 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형복 사장 말이야. 나는 그 시절을 잘 모르지만 젊은 시절 대단한 천재였다고 하더군. 너도 말했지만, 태상 그룹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어떻게 할 수 없어.”
“형님이 말했던 이중, 삼중의 보호장치.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래. 다름아닌 그 보호장치의 설계자가 바로 신형복 사장이야. 태상 그룹의 순환 출자의 밑바탕을 만들어낸.”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설계를 만든 사람이라면···”
“그걸 깨는 방법도 알기 마련이지.”
나와 은호 형은 거의 동시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형복 사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