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신형복 사장 (2)
오랜만이라.
도깨비놀음처럼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허연 눈썹으로 나이를 증명하고 있는 노인의 말은 모순을 품고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최소한 상대와 두 번은 얼굴을 맞대보았어야 한다는 조건이 말이다.
물론 신형복 사장은 내가 누구인지 쯤이야 알고 있으리라.
장영복 회장의 꾀주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일찌감치 장 회장과 공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사이는 ‘오랜만이다’라는 말이 오고 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고약한 상상을 하자면 신형복 사장의 치매증까지도 의심해볼 수 있었지만, 또렷하고 명료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병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신형복 사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자 어쩐 일인지 신 사장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사 앞에선 강도처럼 수상쩍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나에게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인 것처럼.
아아···
떳떳함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태도를 보자 내 머릿속에서 현실성 있는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나를 만난 적이 있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나를.
“저를 만난 적이 있으시군요. 아마도 제가 말조차 못 하는 갓난아이였을 때였겠지요. 장영복 회장님에게 버려지기 전에 말입니다.”
“... 그래. 상투적인 인사말 한마디에 거기까지 추측해내다니 직관이 보통이 아니군. 자네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의 말이 모두 헛된 것이 아닌가 보아. 자네 말 그대로야. 핏덩이이던 자네를 내가 품에 안아 들었던 적이 있었지.”
신형복 사장은 선선히 나의 가설이 옳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신형복 사장은 내 가설을 넘어서는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 자애 보육원. 자네를 그곳에 두고 간 것도 나였네. 부친을 원망할 필요 없어. 그 모든 일을 계획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니까.”
순간 나는 모든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 회장님. 아이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3년 전의 일.
신형복은 낯선 보스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장영복 회장은 한여름 태양 아래 얼음처럼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상실의 고통이라.
한동안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달뜬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던 장영복 회장.
상실의 후폭풍은 그 얼굴을 마치 송장과 다를 것 없이 만들어버렸다.
신형복 사장이 갓 태어나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장 회장에게 다가갔을 때 장 회장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꾹 감아버렸다.
1980년대.
아직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재벌가에서 사생아가 하나 나왔다고 해도 얼마든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으리라.
아니, 오히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더 많았으리라.
그런데도 장영복 회장은 아이를 거둬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이를 볼 때면 장영복의 표정은 말 그대로 널뛰기를 뛰었다.
세상을 불태우기라도 할 것 같은 야차의 얼굴이 되었다가, 곧 가장 슬픈 연기를 하는 비극 배우의 그것이 되곤 했다.
이런 감정 기복은 장영복 회장이 아이를 볼 때마다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신형복은 양심을 버리고 보스에 대한 충정을 선택했다.
그는 장영복 회장의 고통을 제 손으로 덜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신형복은 굳게 믿고 있었다.
장 회장이 여기서 이런 일로 쓰러지면 안 된다고.
장영복 회장은 아직 세상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남자라고.
하지만 아무리 태상과 장 회장이 우선이라고 마음을 다잡아보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생글생글 웃는 아이의 모습은 신형복에게는 일종의 저주에 가까웠다.
아이를 보육원 앞에 내려놓고 돌아 나올 때 기구한 아이의 운명에 눈물이 찔끔 났던 것도 같다.
그 죄책감 때문일까?
신형복은 개인적으로 자애 보육원에 후원을 몇 차례 하기도 했다.
장 회장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아이의 모습을 멀찍이서 몇 번인가 지켜보기도 했다.
그것도 딱 한영수가 성인이 되던 때까지였다.
그 후 십수 년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한영수라는 이름은 봉인이 되었었다.
그렇게 살아서 아이에게 용서받는 것보다 죽어서 죗값을 받는 것이 빠를 거라고 생각하던 때,
한영수가 봉인을 거세게 찢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장난처럼 신형복 사장은 한영수와 이렇게 마주 앉게 된 것이었다.
‘인제 와서 내가 말 몇 마디로 자네에게 용서를 바랄 수 없겠지.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야.’
신형복 사장은 모든 일을 알게 된 한영수가 자신을 향해 가혹한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무저항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감정을 벗겨내고 담담하게 한영수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어디 물리적인 폭행뿐이겠는가?
한영수는 더 이상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돈이 곧 힘을 의미하는 자본주의 사회.
한영수는 이미 제 또래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자신에게 한영수가 단죄를 내리겠다면 모두 순순히 받아들일 결심인 신형복 사장이었다.
그때였다.
“... 국 식습니다. 마저 식사하시지요.”
한영수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이글거리는 눈과 달리 한영수의 목소리는 철저히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그 순간 신형복은 한영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신입사원들 앞에서 떠들었던 바로 그 종류의 두려움이!
순간, 믿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환각처럼 신형복 사장의 눈에 한영수와 젊은 시절 장영복 사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장했던 장영복 회장의 모습이 지금 한영수에게서 보였다.
‘그래. 그렇구나···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란 말인가. 은수, 은호 형제에게 없는 것이 저쪽에 간 거야. 바로 버림받은 아이에게 말이야.’
*
순간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안돼.
침착해지자.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 들끓는 감정을 표출해봐야 나에게 무슨 득이 된단 말인가?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저 이의 턱에 주먹을 꽂고 욕설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내 속이 편해지겠는가?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그래. 내가 오늘 여기에 왜 왔는지만 생각하자.
악연도 때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저 신형복 사장이 사람이라면 분명 나에 대해 크건, 작건 죄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태상의 설계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비밀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가 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가 있었다.
“... 국이 식습니다. 마저 드시지요.”
어쩐 일일까.
내 말을 듣자 신형복 사장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그뿐 아니라 수저를 쥔 채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던 그의 오른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지금 끝장났다는 기가 막힌 소식을 접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네··· 내가 밉지 않은가? 내가 자네의 인생을 가시밭길에 몰아넣었네. 모든 불행의 시작점이 바로 나란 말일세.”
“밉습니다. 머릿속의 핏줄이 모두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럼 나에게 침이라도 뱉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 와서 미움과 증오를 하나 더 추가해봐야 제 삶이 좋아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허허··· 허허허···
노인의 입에서 폭발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나의 귀에 그 웃음소리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고통에서 나오는 신음처럼 들렸다.
신형복 사장의 웃음은 얼마간 계속되었고, 저러다 각혈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 나는 진작에 은퇴를 해야 했던 몸이야. 손주 재롱이나 볼 나이에 아직도 회사에 매여있는 것이 축복인지, 비극인지 아주 헷갈려. 한때는 내 인생보다 이 회사가 중요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런 것을 놓지 못하면 그것은 노욕에 불과하지.”
물을 뿌리면 먼지가 바닥에 가라앉듯 신형복 사장에게서 웃음기가 걷어졌다.
“장은수 회장이 자기 아버지의 사람들을 칼같이 내치면서도 제 발로 나가겠다는 나를 붙잡아둔 것은 단 오직 한가지 이유뿐이었겠지. 내가 아직 쓸모가 남아있기 때문 아니겠나.”
잠시 신형복 사장의 눈에서 불이 흘러나왔다.
“그 쓸모, 내가 자네에게 풀도록 하지. 그래, 자네에게 빚을 제대로 갚으라고 이 회사가 아직도 나를 놓아주지 않은 거야. 이렇게라도 내가 용서를 빌면 되겠는가?”
“저 서른셋입니다. 해가 33번 바뀐 시간이니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용서가 쉽겠습니까? 그래도 잊어보려고는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다만 내 마음 편해지자고 용서를 입에 담은 것은 아니네. 그것만은 알아주게나. 자네가 은호와 편을 잡은 것은 알고 있어. 대관절 뭘 원하나?”
“저는 장은호 회장을 총수 자리에 올릴 겁니다. 왜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말하기에는 아주 긴 사연이 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사장단에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한 표가 있지. 손 한번 들고 내리는 거야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내 그리하지.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겠나? 은호가 사장단에서 제 형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치세. 그럼 과연 장은수가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날까?”
나는 즉답할 수 없었다.
“태상 금융에 손을 댄 건 굉장히 영리한 접근이었네. 하지만 해묵은 장부들을 뒤져 꼬리를 잡기에는 총수 선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자네가 정말 장은수를 무너트리고 싶다면 정말 손을 대야 할 곳은 따로 있지 않은가?”
“태상 건설···”
신형복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몸집이 태상 건설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태상 금융을 요리하는 데도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은 총수 선거까지 태상 그룹의 모체를 흔들 방법은 요원 하기만 했다.
혹시 이 태상의 설계자에게는 마법 같은 비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솔직히 태상 건설을 생각하면 컴컴한 밤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장님··· 아니 어르신께서는 뭔가 길을 알고 계십니까?”
“그럴 테지.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이 지분구조가 빡빡하니까. 하지만 방법이야 왜 없겠는가. 다만···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있네.”
“부탁이라··· 조금 전에 어르신께서는 저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이건 자네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이야기가 될 테니까. 은호에게 확답을 받게. 태상의 3대 총수는 양보하겠지만, 4대 총수는 자네가 하겠다고 말이야.”
또 이 이야기인가.
절로 씁쓸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은호 형을 돕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는 이 태상과의 인연을 영원히 끊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르신의 계획이었다고 해도 장영복 회장의 묵인 아래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 버림받은 아이가 태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신형복 사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호 형이라면 태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기업인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알려주십시오. 제가 태상 건설을 파고들 수 있는 그 방법을 말입니다.”
한참을 국밥 안을 들여다보던 신형복 사장.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숨겨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