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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을 상속받았다-193화 (193/200)

193. 버림받은 자와 내쫓긴 자

“끄응···”

보행 보조기를 밀며 승우가 힘겹게 걸음을 조금씩 떼었다.

원래 승우는 타고난 골격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체중을 15kg 가깝게 잃었고, 환자복 하의가 위태롭게 펄럭거릴 지경이었다.

보통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몇 발짝이지만, 지금의 승우에게는 아주 고된 노동이나 다름없는 그것.

승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은주가 옆에서 수건으로 연신 그 땀을 닦아주고 있었고, 나와 윤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승우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 후.”

은주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으며 승우가 신음을 토했다.

크게 다쳤던 부위가 부위인 만큼, 승우는 아직 말도 어눌하고 제 몸을 혼자 가누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래도 항상 최선을 다하는 녀석의 모습이 어디 가랴.

승우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재활에 한참 열심이었다.

담당 의사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환자가 계속 이렇게 의지를 보여준다면 사고가 나기 이전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영수야, 나···”

“왜? 옥상 가서 바람 좀 쐴까?”

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야, 잠깐만 은주랑 있을래? 난 승우랑 올라갔다 올게.”

나는 담요를 하나 집어 옆구리에 끼고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바람이 춥다. 벌써 겨울이 코 앞이네.”

옥상으로 올라와 승우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은주한테 이야기 들었어.”

“이야기? 무슨 이야기.”

“··· 이야기.”

승우는 문장이 잘 안 떠오르는 듯 같은 단어만 연신 반복해서 말하며 답답해했다.

그렇게 한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승우가 한숨처럼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 병원비, 병원비 말이야. 네가 다 내주었다고. ··· 바보가 된 것 같아 ··· 말이 왜, 왜, 이렇게 잘 나오지 않지.”

나는 승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조금씩, 조금씩 다시 회복해가는 거야. 그리고 병원비는 그런 거는 제발 신경 쓰지 마. 그런데 너 있잖아. 저번에 은주한테 화냈다며? 그러지 마라. 은주가 너 의식 없을 때 옆에서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아파서··· 재활 너무 아파서··· 너무 힘들어. 알겠어. 안 그럴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승우를 보자 누가 심장을 칼로 후벼파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왔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승우를 뒤에서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영수야.”

“응?”

“싸움, 너 지금 싸움 하는 거지?”

싸움이라.

아마도 승우는 나와 태상과의 전쟁을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표현한 것 같았다.

승우의 회복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내 근황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일이 보통이 아니니, 기어코 승우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

“어렸을 때 그랬잖아. 영수, 너는 어떻게든 시비를 피하려고 했지만 한번 싸움이 있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았어.”

“그랬나? 골목대장은 너였지. 애들이 우리 보육원 아이들 무시하거나 괴롭히면 절대 가만히 안 있었잖아. 승우, 네가 코피 터트린 애들이 한둘이냐.”

“··· 코피.”

승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영수 너도 몇 번 내 주먹에 코피 터진 적 있었지?”

“몇 번은 무슨, 딱 한 번이야. 그리고 그때 먼저 운 건 너다?”

그때, 내 손 위로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승우가 자기 손을 내 손 위로 겹쳐왔다.

“··· 이겨. 영수야, 이겨. 어차피 시작한 싸움이라면 도망치지 마. 우리는 차돌처럼 단단하게 자랐잖아. 그렇지?”

순간 눈앞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원래 울보는 승우 녀석이었는데, 이젠 승우를 볼 때마다 내가 그런다.

“그래. 이길게. 그 대신 승우 너도 약속해. 너도 끝까지 힘을 내기로. 우리 같이 이기자.”

* * *

“승우 씨가 의식 차린 건 말할 것도 없지만, 난 일단 은주 씨가 얼굴이 좋아져서 이제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은주 씨 저러다 쓰러지는 것 아닌가, 얼마나 걱정이 되었다고요.”

“그래. 힘든 일을 겪었으니 두 사람의 사이는 앞으로 더 끈끈해지겠지··· 그런데 윤아야, 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던 윤아가 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흑요석처럼 검게 반짝이는 고윤아의 눈동자.

그 보석 같은 눈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장영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 장영민?”

모르는구나.

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윤아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년의 장영복 회장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 아닌가?

나의 존재에 대해 윤아에게 밝혔듯이, 자기 동생에 대해서도 몇 마디쯤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말을 하는 투와 행동으로 봐서는 고윤아 역시 장영민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한 인간을 이렇게 완벽하게 지워버릴 수가 있다니.

“그게 누굴까요?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

”장영복 회장의 배다른 동생이라네.”

“··· 예?”

펄쩍 뛸 듯이 놀란 고윤아가 토끼 눈을 떴다.

“나름대로 회장님과 흉금을 주고받은 사이라고 생각해요. 사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식들에 대한 말까지도 종종 하시곤 했으니까··· 그런데, 동생이 있다는 말씀은 단 한 번도 없으셨어요. 아니, 설령 회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장씨 가문 중의··· 한 명이라는 소리잖아요.”

“그러게. 속 썩이는 자식, 호적에서 파낸다고 말들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없는 사람을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야.”

“그런데 오빠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형복 사장을 만났어.”

“아···”

신형복 사장의 이름이 나오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윤아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장영민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해. 그 어떤 코미디 프로도 이것보다 우습진 않을 거야. 태상이 버린 아이가 태상으로부터 지워진 사람을 만난다니 말이야.”

“필요한 일인 거죠? 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지금 오빠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거겠죠?”

쓸쓸한 얼굴로 고윤아가 말했다.

“윤아야. 장은수 회장을 따로 만났었다며.”

“...”

“어렵고 무서웠을 텐데 날 위해 용기를 냈구나.”

“승우 씨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 오빠를 잃게 될까 봐 겁이 났어요. 그 두려움에 비하면 장은수 회장을 만나는 것쯤은 열 번, 백번도 할 수 있어요.”

- 고윤아 변호사는 참 강한 사람이지.

은호 형의 말은 정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벌써 두 명을 우리 쪽으로 돌려 세워놨어. 총수 선출 때 은호 형 손을 들어줄 사람 말이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레이스의 끝이 보이는 거야.”

윤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나는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장영민이라는 사람이 회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회사가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야. 그리고 태상 물산은 태상 건설의 지분 5%를 가지고 있고. 그 지분만 손에 넣는다면 태상 건설 내에서 장은수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어.”

빨간색 신호등에 맞춰 나는 정지선 앞에서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있잖아. 윤아야. 네가 날 만나러 왔던 그 날부터 난 운명이라는 놈에게 계속 시험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리라는 예감도.”

고윤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든지 그런 거창한 이유 따위 없어.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게 끝나면···”

정지 신호에 핸들에서 양손이 자유로워진 나는 고윤아를 향해 수어를 보냈다.

- 나와 함께 떠나주겠니?

내 어설픈 수어를 보자 비로소 고윤아의 얼굴에 웃음이 올라왔다.

“틀렸어요.”

고윤아는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손동작을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둥근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세상 어디라도 오빠가 가는 곳이면 나는 따라갈 거에요.”

*

“안녕하세요. 연락드렸던 한영수입니다.”

“...”

장영민은 병실에 누운 채로 경계심 가득한 눈을 번뜩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나는 침상 옆 보호자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장영민의 턱이 아래로 슬쩍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 의자 위에 몸을 맡겼다.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왜? 내가 죽으면 거기에도 뭐 돌아가는 것이 있어? 그래서 살았나, 죽었나 보러 오기라도 한 거야?”

다분히 냉소적인 말투였다.

장영민은 방탕하게 보낸 세월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의사에게 들어보니 간에서 시작된 암세포의 증식은 이미 장기 곳곳에 퍼져, 수술은 고사하고 항암치료조차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물론 자업자득이긴 하나, 가족은 고사하고 친족에게도 버림받은 그가 홀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회장은 무슨··· 얼어 죽을.”

“아시겠지만, 저와 회장님은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입니다. 회장님께 어떤 제안을 하려고 온 것은 맞지만, 그건 회장님의 건강 상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네가 장영복. 그 인간의 자식이라고?”

“유전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거라면, 맞습니다.”

클클클━

그때 갑자기 장영민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링거가 꽂힌 메마르고 바짝 마른 손이 그의 배 위에서 꿈틀대며 춤을 췄다.

“그래.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거봐, 결국에는 지도 고작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으면서···”

그렇게 한동안 음산하게 웃던 장영민.

누가 갑자기 멈춤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 만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 확실히 닮았어. 그 눈이며··· 고집스러운 입이며··· 정실에게서 낳은 새끼들보다도 훨씬 더 그 인간을 닮았구만.”

장영민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나에게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안? 지금 나한테 제안이라고 했어? 이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는 인간이 장영복, 그 인간이야. 그런데 그 새끼를 똑 닮은 그쪽이 하는 제안을 얼씨구나 하고 들어줄 것 같아?”

장영민의 눈은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육체는 병마에 스러져가고 있을지언정 눈에서만은 불똥이 튀었다.

불을 끄는 것은 물.

나는 장영민에게 찬물을 한번 끼얹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잘되었군요.”

“··· 뭐?”

“회장님과 저는 대화가 아주 잘 통할 것 같다는 소리입니다.”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 장영민이 입을 쭉 내밀었다.

그 탓에 가뜩이나 살 없는 볼이 더욱 홀쭉 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장영복 회장님의 전설에 대해 박수를 보내기 바빴습니다. 그들에게 장영복 회장님은 세종대왕, 아니면 이순신 장군과 맞먹는 위인이라도 되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들이 장영복 회장님에게 박수를 보내도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어요.”

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장영민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회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선 저희는 이미 동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어디까지나 딱 절반만 진심이었다.

하지만 내 진심이 어디까지이건 간에 장영민은 방금 내 말이 꽤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양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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