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0억을 상속받았다-194화 (194/200)

194. 어떤 형제

이것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 까.”

이곳의 서울의 한 호텔 스위트룸.

이 스위트룸은 장영민이 아예 전세를 내고 장기 투숙하고 있는 곳이었다.

장영복 회장은 범 같은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을 세차게 문을 두들겨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장영복 회장의 낮은 목소리에 수행 비서는 즉시 프런트에서 받아온 마스터키로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스위트룸을 들어서자마자 장영복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룸 안에서는 지독한 향락의 냄새가 풍겼다.

즐길 때야 천상의 향기이지만, 날이 새고 나면 썩은 비린내가 풍기는.

구두도 벗지 않은 채로 장영복 회장은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눈에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한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침입자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정신을 놓고 자고 있었다.

장영복 회장은 여자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신인 탤런트로 이제 막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고 최근 태상 물상의 CF를 찍은 여자이기도 했다.

“··· 이런 쌍것들이.”

꽉 깨문 장영복 회장의 이 사이로 욕설이 새어 나왔다.

장영민은 결혼한 지 햇수로 아직 채 이 년도 되지 않는다.

제 집보다 밖에서 더 자는 날이 많았던 장영민을 두고 혼자 속을 끓이던 그의 아내는 마침내 참다 참다 장영복에게 눈물로 호소를 해왔다.

그리하여 이곳에 장영복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장영복 회장은 거침없이 비단 같은 이불을 손으로 획 채 버렸다.

“··· 어머!”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여자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가 두 손으로 은밀한 부위만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장영복은 침대 옆에 떨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그녀에게 휙 집어 던졌다.

보통 남자라면 곁눈질로라도 이 아름다운 여자의 나신을 훔쳐볼 법도 한데, 장영복 회장은 못 볼 꼴이라도 보았다는 듯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이봐.”

“예, 회장님.”

“저 여자, 당장 차에 태워서 적당한 데다가 떨궈. 돈도 좀 집어주고, 입단속도 시키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장영복의 수행 비서는 옷을 겨우 반쯤 걸친 여자를 거의 반강제로 침대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호텔 방에는 단 두 명, 형제만이 남게 되었다.

“장영민, 옷 걸쳐.”

“아···”

장영복은 팔짱을 낀 채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장영민은 까치집 같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으며 남은 손으로 자기 속옷을 주워 들었다.

“형님이 여길 왜 왔소?”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장영민은 도전적인 눈을 하고 장영복을 향해 말했다.

“긴말할 거 없어. 집으로 돌아가.”

“싫소. 나한테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지 마요.”

“어른답게 굴어라.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른···?”

장영민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른이라고 했소? 자기 것도 못 지키는 게 무슨 어른이요. 눈 멀쩡하게 뜬 채로 다 빼앗기고 있는데··· 신형복, 그 종놈이 감히···”

“함부로 말하지 마. 너보다 훨씬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건 넌 나의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다. 미우나 고우나 말이지. 내가 약속한다. 잠시 맡아두는 거야.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그때 다시 돌려주마.”

이 악물고 악다구니를 쓰는 장영민에 비해 장영복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다.

장영민이 갑자기 흥━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퍽이나 그러시겠소. 날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게 누군데.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했다고··· 근데 그거 아오? 형님 같은 사람 그늘 밑에서 사는 기분을! 그걸 어찌 알겠어. 대단하신 장영복 총수께서!”

순간 꿋꿋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장영복의 눈에서 노기가 넘실대었다.

“이런 모지랭이 같은 새끼···”

장영복은 오른팔을 들어 장영민의 뺨을 후려갈겼다.

“너 하나 담그려면, 판검사들을 사서 감방에 처넣는 게 훨씬 편한 방법이야. 아니면 남은 생을 정신병원에서 살게 해줄까?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내는 이유를 짐작을 못 하겠어? 그늘? 네가 내 그늘 밑에 살아?”

장영복의 불같은 기세에 장영민은 제 뺨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한테는 무수한 기회가 있었어. 아버지 옆에 새어머니가 멀쩡히 살아계셨는데 당신이 널 배제할 수 있었을 것 같아?”

“형님은··· 형님은 아무것도 모르오.”

장영민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뭐가 그리 서러웠을까.

그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늘 형님과 비교당하고, 못난 인간 취급받는 내 기분을 아냔 말이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다 알아. 사람들이 뒤에서 형보다 나은 아우 정말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거···”

장영복은 팔짱을 낀 채로 장영민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한참을 장영민이 울도록 내버려 둔 뒤,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착각하지 마라. 지금 내 자리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야. 난 매일 죽을 만큼 일했다. 한번 지면 모든 걸 잃는다는 각오로 매일을 살아왔어. 넌 아직 젊다. 나약한 소리 집어치우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장영민을 두고 장영복은 등을 돌렸다.

* * *

“그래서, 네가··· 내 복수를··· 대신 해주겠다, 이거야? 네 제안을 들어주면?”

장영민의 말의 반에는 기침 소리가 섞여 있었다.

“회장님이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장영복 그 인간보다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지만 아직 신형복은 살아 있잖아! 장영복의 종놈!”

“신형복 사장은 이제 회사에 미련이 없습니다. 어차피 조용히 사라질 사람입니다. 만약에 어떤 물리적인 보복을 저에게 기대하시는 거라면, 그건 제가 해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썩 꺼져.”

장영민은 비쩍 마른 손을 내 앞에서 몇 번 흔들었댔다.

“저를 이렇게 내쫓으시면 회장님은 기회를 잃으시는 건데요.”

“기회? 내가 뭐가 아쉬워서. 허튼소리 할 생각도 하지 마.”

“저를 통해서 최소한 대리만족은 하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기침 소리가 뚝 멎었다.

“3대 총수 선출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잘 아실 겁니다. 회장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절 도와주시면 회장님 손으로 다음 총수를 뽑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만큼 기막힌 반전의 드라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입은 걸걸했지만, 장영민의 눈은 그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 은수인가, 은호인가.”

“동생 쪽입니다.”

장영민은 입을 달싹거리며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렸다.

“그래··· 장은수, 그 버릇없는 놈은 제 아비의 조문도 내가 못 하게 막았었지. 선산까지 갔는데 날 병균 취급하며 내쫓고 말이야···”

또 그런 사연이 있었나?

장은수.

도대체 당신은 어디까지 독을 뿌리고 다닌 건지.

그런데, 그렇게 장영복 회장이 원수처럼 밉다면서 장례식은 참석하려 한 것인가?

왕래가 끊긴 지 족히 30, 40년은 되었을 텐데 단순히 동기간에 예의상 갔다고는 설명이 안 된다.

어쩌면 장영민에게는 미움이니, 복수니 그런 감정 말고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것이 아닐까?

“보면 알겠지만.”

장영민의 볼이 씰룩거렸다.

“나는 얼마 못 살아. 내가 죽어봐야 내가 가진 것들은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 마누라나, 장영복의 자식 놈들에게나 돌아가겠지. 무덤 속에서도 그 꼴은 못 보지. 그래, 마지막으로 내가 분탕질 한 판 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이지?”

“틀리진 않습니다.”

“아주 말투까지 그 인간을 빼다 박았구만···”

잠시 이죽거리던 장영민.

“그래서 내게서 뭘 가져가려고?”

“회장님의 회사인 선진 유통. 그 회사를 제가 인수하고 싶습니다.”

“깡통뿐인 그 회사를 가져서 뭐 하게?”

“태상 물산의 최대 주주가 바로 선진 유통이더군요.”

“··· 다 알고 왔구만.”

장영민은 반쯤 세웠던 몸을 침상에 깊이 눕혔다.

그는 얼마간 병실의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듣기 거북하실지 모르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회장님과 저 사이에 같은 피가 어느 정도는 흐르고 있다는 거겠죠. 그렇다고 그 혈연을 내세워 맨입으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달라는 만큼 주겠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돈, 그까짓 돈···”

장영민이 마치 질린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그의 심경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끝자락에 와 있는 그에게 돈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내 변호사 연락처를 알려주지. 거기랑 이야기해.”

의외로 담백하게 장영민은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총수 선출, 그거 언제야?”

“반년도 채 안 남았습니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구만··· 그래, 내가 그거는 보고 가야지···”

한때는 태상의 왕자였지만,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

회한에 젖기라도 한 걸까?

장영민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회장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말해.”

“지금 회장님은 슬퍼 보입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실까요? 복수가 아니지요? 회장님이 정말로 원하는 것 말입니다. 회장님은 장영복 회장··· 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이제는 인정받고 싶어도 받을 길이 없으니 더더욱 감정이 사무친 것이리라.

“아무리 제 말이 회장님의 귀에 솔깃했더라도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주시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버지와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긴말 없이 제 제안을 받아주신 겁니까?”

장영민은 말이 없었다.

아주 오래, 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한 시간 동안 나와 그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 형님 말이야.”

마침내 무겁게 장영민이 입을 뗐다.

“어찌나 사람 마음을 그리도 잘 꿰뚫어 보던지. 그 양반 앞에 서면 항상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어. 내 치부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 같은. 그래서 더 망나니짓을 했는지도 모르지. 아아··· 나는 왜 그리도 인생을 허망하게 낭비한 것일까.”

장영민은 고개를 모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까지 아비와 똑같구만. 자네가 지금 한 말.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왔던 내 진심인데. 이봐, 내가 제안에 조건을 하나 더 붙여도 되겠는가?”

“말씀하세요.”

“아까 네가 말한 대로 같잖은 혈연관계를 들먹이는 것 같아 염치없는 거 알아. 하지만 말이야···”

굉장히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 걸까.

목울대만 꿈틀거리며 장영민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만약 세상을 떠나면 네가 내 제사상 좀 차려다오. 그래 줄 수 있겠지?”

장영민에게서 더 이상 독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그는 그저 병들고 나약한 노인에 불과했다.

원망으로 가득 찼던 삶을 이제야 겨우 내려놓은.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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