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157화>
‘어머니?’
살다 살다 어머니 소리도 들어 보네.
성지한은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흐…… 넌 눈도 없냐? 우리 머리가 어딜 봐서 어머니야!”
가슴이 꿰뚫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는 칼레인.
“쟤는 수컷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같이 합치려고 하는 거지!”
“들은 대로 시끄러운 녀석이구나.”
화아아아-
목검에서 녹색의 빛이 번쩍이더니.
칼레인의 몸에 빛으로 이루어진 줄기가 뻗어 나갔다.
녹빛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로브.
그 안에서, 왕의 유령이 새어 나왔지만.
-오오. 이 힘은!
-드디어, 안식이 찾아오는구나!
-정화된다……!
목검에서 나온 녹색의 기운에 의해, 유령은 빠르게 소멸했다.
“거참, 그 검…… 성가시네!”
펑!
칼레인의 로브가 폭발함과 동시에 유령이 쏟아져 나오자, 하이 엘프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몸을 뒤로 뺐다.
“잘도 그 안에 원혼을 욱여넣었구나!”
슈우우우-
로브가 완전히 사라지고, 유령이 쏟아져 나오면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구름처럼 뭉쳐진 귀신이 거인의 형상을 그려 냄과 동시에 압도적인 흑마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과연, 성좌의 분신이라 할 만큼 강렬한 존재감.
“원혼이라니! 다들 자발적으로 날 도와주는 왕들인걸~ 그치?”
하나 지닌 존재감과는 달리, 경박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인형아. 너 먼저 찢어 버리고, 머리랑 합체해야겠다!”
한편 하이 엘프는 칼레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성지한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적의 제압에 실패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한껏 예를 차리는 하이 엘프.
‘왜 내가 어머니라 불리는 거지?’
[음…… 저 하이 엘프, 널 ‘세계수의 뿌리’로 착각하는 것 같군. 엘프가 어머니라 칭하는 건 세계수의 뿌리밖에 없다.]
‘뿌리?’
[각 행성의 엘프 조직을 컨트롤하는 왕과 같은 존재다. 그들은 세계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세계수 연합을 각자의 행성에서 이끌어 나간다.]
‘그 정도면 꽤 중요한 존재로군.’
[그럼에도 널 뿌리로 착각하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흠…… 저번에 생명의 씨앗에서 얻은 기운 때문인가?’
성지한은 몸 한쪽에 갈무리했던 기운을 서서히 퍼뜨렸다.
[하! 몸에 생명의 정수만 남겨 두었구나. 하이 엘프쯤 되면 본능적으로 이걸 알 테니, 이 정도면 뿌리로 착각할 만하다. 아니, 잠깐! 주인……? 뿌리 아닌 거 맞지?]
성지한이 저장해 둔 기운이 얼마나 정순했는지 아리엘마저도 긴가민가하더니, 성지한 본인이 맞는지 인증을 요구했다.
[‘세계수는 우주 쓰레기고 태양에 처넣어야 한다.’ 라고 말해 봐.]
‘세계수는 우주 쓰레기고 태양에 처넣어야 한다.’
[음…… 주인 맞군. 실례했다. 하도 기운이 뿌리와 흡사해서 말이야.]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아리엘의 목소리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팁을 알려 주자면…… 하이 엘프에게 뿌리인 척할 거면, 어설프게 말하지 말고 그냥 고개만 끄덕여라. 그럼 쟤들이 알아서 해석해 줄 거다.]
‘좋아.’
[약간 태도가 어색해도, 생명의 정수를 은은히 뿜어내면 전혀 의심하지 못할 거야.]
“저자를 죽이기 위해선, 검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허락해 주십시오!”
성지한은 아리엘의 코치대로, 허락을 구하는 하이 엘프에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 생명의 정수를 슬쩍 오른손에 뿜어내자, 무표정한 하이 엘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아! 이렇게 바로 허락해 주실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뚝!
그러고는 하이 엘프는 자신의 목검을 반으로 부러뜨리더니, 부러진 반쪽 검을 땅바닥에 내다 꽂았다.
그러자 부러진 검의 파편이 땅에 흡수되는가 싶더니.
쿠르르르-!
땅바닥에서 빛의 줄기가 치솟으며 무지갯빛의 꽃들이 피어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꽃의 정원 같았지만.
“태양의 화원. 만개!”
투둑. 투둑.
하이엘프의 말이 끝나자, 꽃의 중심에 균열이 발생했다.
그리고.
슈우우우!
꽃의 틈새 사이로 강한 흡인력이 생겨나며, 거인의 형태를 이루던 칼레인의 유령이 하나둘씩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식! 안식이다……!
-먹어 줘! 나도!
꽃에 흡수되어 기뻐하는 왕의 유령들.
칼레인의 육신은, 사방에 피어오른 꽃에 속수무책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거인의 형상이 빠르게 크기를 줄여 나갔다.
특히 칼레인의 왼쪽 팔을 이루던 유령은 순식간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뭐야. 이렇게 쉽게?’
둘의 싸움을 보다가 언제든 끼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성지한이 허탈할 정도로, 죽은 별의 성좌 칼레인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저 꽃이 그리 강한 건가?’
[태양의 화원은 엘프가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네가 생명의 정수를 지니고 있어서 적의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싱겁게 끝나겠군.’
[음…… 아무리 그래도 성좌의 분신이 너무 대책 없이 당하는구나. 죽은 별의 성좌면 성좌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력한 존재인데.]
스으으으-
칼레인의 사지가 꽃에 먹혀 말끔히 사라지고.
그의 몸통과, 머리만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커다래진 몸통과 머리마저도 연결 부위의 유령이 죄다 흡수되어서 땅에 떨어지자, 어둠으로 가려진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 갔다.
“……머리야. 너.”
번뜩-
성지한 근처로 굴러 간 칼레인의 머리.
어둠으로 가려진 얼굴에서, 붉은빛의 안광이 번쩍였다.
“너. 정말 할망구한테 먹힌 거니……?”
그 빛은 눈동자처럼 뒤룩뒤룩 움직이더니, 이내 성지한의 오른손에 있던 생명의 정수에 꽂혔다.
“내가 어떻게 찾은 머리인데…….”
붉은빛의 안광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 갔다.
어느새 꽃에 의해 몸통마저 먹히고, 머리만 남은 칼레인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깔렸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
쩌적- 쩌저적-!
칼레인의 얼굴을 가리던 어둠에 빛이 새어 나오고.
[죽어라.]
성좌가 죽음을 명했다.
* * *
픽! 픽!
무지갯빛의 꽃들이 모조리 생기를 잃고 시들기 시작했다.
깨진 어둠 속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죽음의 기운.
기존의 흑마력을 한 차원 넘어서는, 검붉은빛이 성지한에게도 뻗어 오고 있었다.
‘이거, 장난 아닌데?’
이제까진 성좌답지 않게 가벼운 모습만 보여 주던 그였지만, 지금 보이는 힘은 그가 왜 죽은 별의 성좌로 불리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읏! 어, 어머니. 피하셔야……!”
칼레인 근처에 있던 하이 엘프는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바퀴벌레보다도 더한 재생력으로도 죽음의 권능은 이겨 내지 못한 것일까.
TOP 25까지 올라왔던 하이 엘프는 너무나도 쉽게 죽어 버리고 말았다.
[주인. 죽음의 권능이 예상외로 너무 강하다! 하이 엘프도 죽었는데 원래 정체를 드러내는 게 어떻겠나.]
‘드러내면 뭐. 머리 하라고?’
[죽는 것보단 머리가 낫지 않겠나?]
‘아니. 죽는 게 백번 낫다.’ 성지한은 일단 거리를 벌렸다.
그가 목표로 한 방향은 뒤편.
“뭐. 뭐야 이거? 뭔 난리야?”
“뇌신에게서 살아남았더니…… 아니!”
조금 전 추가로 소환된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차피 한 명만 더 죽으면 끝이니까.’
굳이 저 위험천만한 죽음의 권능에 맞서 싸울 필요야 없지.
이번 게임의 목표 중 하나는 5인 생존.
그 하이 엘프도 죽여 버리는 저 권능을, 다른 플레이어라고 견디겠는가.
그리 생각한 성지한은 칼레인의 권능을 너희도 맞아보라는 식으로 플레이어들을 향해 날아갔지만.
[세계수여. 그런 잔꾀가 통하겠느냐.]
번쩍!
검붉은빛, 죽음의 권능은 5인의 플레이어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권능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끼고는 전율했다.
“뭐. 뭐야. 이게 그 죽음의 권능이야? 이걸 어떻게 막아?”
“저거 부캐 맞아?”
“……무신 다음 가는 우주의 재앙이 죽은 별이라더니. 분신이 어떻게 이런 힘을 쓰지? 더러워서 성좌 해먹겠나.”
방랑하는 무신 다음으로,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죽은 별의 성좌.
성좌의 분신들은 그의 힘을 이번에 체감하며, 힘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꼈다.
물론 지금 발휘된 죽음의 권능 자체야 분신의 것이니, 성좌의 본체가 오면 막아설 수 있었지만.
저걸 칼레인의 본체가 사용한다면, 도저히 막을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저놈 본체가 저거 쓰면 난 바로 즉사다.’
‘성좌 되기 전에 별에서 떵떵거릴 때가 좋았는데…….’
‘스페이스 리그로 오니 뭐 이리 괴물들이 많아.’
죽은 별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기로 다짐한 성좌의 분신들은 성지한 쪽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얼른 저놈이 죽어야지 5인으로 게임이 끝나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죽음의 권능이 아직 그에게 닿지는 못했지만.
결국 시간문제였다.
‘빨리 죽어라!’
그렇게 5인의 성좌 분신들이 모두 성지한의 죽음을 기원할 때.
“안 되겠군.”
성지한은 도주를 포기했다.
어차피 시간 끌어 봤자, 나머지 플레이어가 죽을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정체 밝히려고?]
“아니. 맞서야지.”
밝혀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저 역겨운 놈의 머리로 살 바에야,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는 게 낫다.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지만…….’
승급전 참여 전, 사류무사의 영감이 발휘되어 무혼을 상승시켜 줬던 한 무공.
그때만 해도 개조했다기에는 무리가 있는 무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사류의 영감이 터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성지한은 피식 웃으며, 창과 이클립스를 바꿔 들었다.
생명의 정수가 깃든 오른손에, 암검을 든 것이다.
[주인? 난 이 기운과 상극이다. 이건 우리의 원수 세계수의 힘…… 서로 섞이면 효율이 안 나와.]
‘좀만 참아 봐.’
[……난 미리 경고했다.]
성지한은 그 경고를 무시하듯, 생명의 정수를 이클립스에 가득 담았다.
암검에 녹색의 빛이 깃들며, 검의 크기가 작아졌지만.
그래도 두 힘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성지한은 그 상태에서, 검과 창을 교차하여 휘둘렀다.
무명신공無名神功
멸신결滅神訣
철혈십자鐵血十字
두두두두-!
신전의 대리석 벽이 순식간에 뜯겨 나가며, 거대한 십자를 만들어 냈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순백의 십자가.
원래는 대지에 새겨지던 철혈십자가, 이번에는 허공에서 만들어지며 성지한을 막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백색 십자가에 생명의 정수가 깃들자.
슈우우웅!
초록색의 보호막이 성지한의 몸을 감쌌다.
[이거…… 즉사기 아니었나?]
‘방어용으로 한번 써먹어 보려고.’
[그게 한다고 마음먹는다고…… 돼?]
‘난 되던데.’
[……헐.]
번뜩!
검붉은빛이 십자가에 닿았다.
그럼에도 칼레인은 성지한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기운은 그 어디에도 속박을 받지 않았기에, 막는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죽음을…….]
퉁!
죽음의 기운은 십자가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철혈십자.
인간을 즉사시키는 즉사기.
위력은 절륜하지만, 고정된 위치가 아니고선 사용하기가 애매한 스킬이라 성지한은 이를 어떻게든 개조하려고 했다.
‘그래서 십자가를 띄우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막상 십자가를 허공에 띄우니, 이걸 창으로 뚫을 수가 없었다.
땅바닥과는 달리 너무나도 단단하여, 즉사는커녕 무슨 철벽으로 자리매김해서 더 연구가 필요했던 상황.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그 철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부서지지 않는 철혈십자는, 죽음의 권능에 강하게 대항했으니까.
퉁! 퉁!
죽음의 빛이 계속 튕겨 나가자.
[자. 잠깐! 이거…… 너…… 설마!]
착 가라앉았던 칼레인의 목소리가, 서서히 밝아져 갔다.
끝에 가서는, 평소처럼 하이톤이 나오려고까지 했다.
자기의 권능이 막혔는데도,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
[너. 너! 머리 맞지? 그 할망구라면 자기 힘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라고! 맞지?! 머리야아아아아!!]
성지한은 미친 듯이 소리치는 칼레인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봉황기를 머리 위로 던졌다.
무명신공無名神功
천뢰신결天雷神訣
천주심판天主審判
지지지직-!
칼레인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빛의 창이 떨어졌다.
평소와는 달리, 적뢰를 동반한 천주심판에 칼레인의 머리가 그대로 꿰뚫리며 화르르륵 불타올랐다.
[머리이야아아아아아! 역시 믿고 있었다구우우우!!]
“아오 저 자식. 시끄러워 죽겠네.”
[여윽시 우리 머리다!! 더 욕해 줘어어엇!!]
칼레인은 그렇게, 소멸해 가는 와중에서도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보자 머리야! 이히히히히히…….]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라진 칼레인과 함께.
[플레이어가 5인 남았습니다.]
[승급전이 종료됩니다.]
승급전이 종료되었다.
“후우.”
어떻게든 살았나.
성지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
[신왕좌의 주인, ‘뇌신’이 당신에게 흥미를 보입니다.]
[그가 당신을 후원하는 성좌가 되고 싶어 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