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레벨로 회귀한 무신-314화 (314/583)

<2레벨로 회귀한 무신 314화>

[미, 믿을 수 없다……!]

스으으으.

성지한의 왼팔에서, 그림자기운이 강렬히 뿜어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그의 팔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아리엘.

‘좀 기다려 봐.’

성지한은 그녀를 일단 억누르며, 대정령에게 질문했다.

“그림자여왕이 성좌 연구소의 연구 대상인가?”

[아닙니다. 그녀는 공허 처리 업무를 수행할 제물입니다.]

‘공허처리라…….’

성지한은 대정령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공허 처리.

그 단어를 듣자,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반가면을 쓴 고엘프였다.

-선배가 죽은 덕에, 제가 이 공허처리장을 이었으니까요.

-선배…….

-평소 잘난 척은 그렇게 하더니, 행성 개척 맵에서 당신에게 터져 버린. 그 모자란 선배 말이죠.

세계수 엘프의 대출창구의 지점장이었던 그는.

뇌신과 같이 공멸한 고엘프를 선배라고 지칭하며, 가면에 대해 물어보는 성지한에게 이리 답했다.

-그 가면을 공허처리장이라고 하나? 그건 부서졌는데.

-이건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이야 하나 더 만들면 그만이지요.

공허처리장을 쓰레기통이라고 일컬었던 고엘프.

그럼 공허 처리 업무도, 딱히 좋은 건 아니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일단 살펴봐야겠군.’

성지한은 대정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림자여왕이 수감된 곳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번쩍……!

대정령 하나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거대한 빛의 포탈이 대신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지한이 그 안으로 발을 디밀자.

거기서 비로소, ‘지하구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장소가 드러났다.

‘공허의 기운이 가득하군.’

어두컴컴한 커다란 공동.

보랏빛만이 미약하게 빛을 발하는 이곳은.

바닥부터, 반쯤은 녹아내린 채 늪지대처럼 흐물흐물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씬 풍겨 오는 공허의 기운.

성지한이 주변을 살펴보자.

곧 공허의 늪지대 정 가운데에, 온몸이 사슬로 묶여 있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 여왕님……!]

성좌 그림자여왕.

그녀는 겉보기에는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리엘과 거의 똑같이 생긴 외모였다.

하나 멀쩡한 건 얼굴뿐.

얼굴 아래 몸뚱어리는 정상이 아니어서.

회색빛의 신체가 보라색 불길에 타오르다가, 다시 재생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리엘이 더 이상은 못 참고 성지한의 팔에서 나오려고 할 때.

[172번째 공허 처리를 시작합니다.]

천장에서, 자동으로 번역된 언어가 들려왔다.

그러자.

꿈틀. 꿈틀.

그림자여왕을 묶은 사슬이 혈관처럼 박동하며.

그녀의 몸에 공허의 힘을 주입했다.

그러자.

화르르르……!

좀 약해지나 싶던, 보라색의 불길은 다시 힘을 받고.

그림자여왕의 몸을 다시 녹여 버리고 있었다.

‘넋이 나갔군.’

입을 헤 벌린 채, 멍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던 그림자여왕은.

그 강렬한 불길에 몸만 잠시 움찔할 뿐,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왕님!”

그걸 보고 결국 성지한의 팔에서 튀어나오는 아리엘.

그녀는 여왕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팡!

“큭……!”

뛰어들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생겨난 흰색의 보호막이 그녀를 튕겨 냈다.

그리고.

스으으…….

흰색의 보호막은, 곧 빛이 뭉쳐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저건…… 반가면인가.’

고엘프들이 쓰던 흰색의 반가면.

그것이 반투명한 형태로, 성지한의 앞을 가로막더니.

꿈틀.

가면의 입가 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고객님.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대출창구 지점장인가?”

[예,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성지한을 반가운 목소리로 맞이하는 지점장.

거대한 가면의 눈이 아리엘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폐기물 처리 중이니, 함부로 안에 들어가지 마시지요.]

“폐기물이라…… 공허를 말함인가?”

[맞습니다. 당신께 죽은 선배가 평소 분리수거를 게을리해서요. 제가 밀린 일을 좀 하고 있죠. 분리수거함도 수거하고, 공허도 처리하고.]

꿈틀. 꿈틀.

가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움직이는 사슬.

화르르륵!

그림자여왕의 몸이 금세 보랏빛 불길에 타올랐다.

‘그림자여왕…… 무신에게 죽은 줄 알았더니. 저번 고엘프가 죽으며 역사가 뒤틀린 건가.’

혼원신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암영신결.

그것은 그림자여왕이 지니고 있던 권능과 매우 비슷했다.

방랑하는 무신이 지닌, 상대의 힘을 빼앗는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저번 생에서 그림자여왕은 무신에게 죽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하지만, 저번 고엘프가 뇌신과 함께 폭사하고.

지점장이 저 백색의 가면 ‘공허처리장’을 이어받으면서 역사가 뒤바뀐 것 같았다.

전대의 고엘프와는 달리, 지점장은 일을 성실히 처리했던 것이다.

한편.

화르르륵……!

그림자여왕은 이제 몸뿐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고 가면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이런. 고객님 덕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힘 조절을 못 했네요. 우리 수거함, 어떻게 여기까지 키워 냈는데 말이에요.]

“그림자여왕이…… 수거함인가?”

[예, 그림자 주제에 성좌까지 간 특등급 물건이죠. 저희의 각별한 지원이 있긴 했지만.]

“……지원?”

가면에 튕긴 채,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리엘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희가 무슨 지원을! 우리 쉐도우 엘프는, 여왕님의 인도하에 자유를 쟁취했다……!”

[하찮은 그림자야. 그건 너희가 쟁취한 게 아닌, 우리가 허락한 자유다.]

“뭐…….”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실패작의 원혼 따위로 진짜에게 거역할 수 있겠느냐.]

성지한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지점장은 고압적인 자세로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너희가 반란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우연의 우연이 겹치며, 일이 겨우 성공했지. 그 후 세력을 키울 때도 그렇다. 어떻게 여왕은 그렇게 그림자가 많은 행성만 골라 쳐들어갔으며, 배틀넷의 리그에서도 세계수 엘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항했을까? 이러한 과정이 모두 다 운이었을까?]

“……정말 너희가, 이걸 다 의도한 거라고?”

[그래. 쉐도우 엘프의 세력화도 성좌 연구소가 진행한 하나의 프로젝트에 불과했지. 모든 건, 쉐도우 엘프를 성좌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공허의 수용 한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씨익.

반쪽 가면은 웃음을 지었다.

[결과는 꽤 만족스럽게 나왔다. 쉐도우 엘프는 이제부터 몇 번이고, 자유를 쟁취하고 성좌를 탄생시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이렇게 쓰레기통이 되겠지.]

“……그럴 리가 없어. 믿을 수 없다.”

[그런가? 그림자여왕은 이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것 같은데.]

스으윽.

가면이 투명해지며, 회복한 그림자여왕의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아리엘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외모.

[세력이 안정화되자, 너 같은 자신의 ‘분신’을 사방에 깔아 놨잖으냐.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도록 말이지.]

“…….”

[아니, 이미 갈아탔나? 네가 여왕의 본체일지도 모르겠군. 꽤 강한 힘을 지닌 걸 보니.]

“……내 힘은, 주인이 강해서 그런 거다. 나는 어디까지나 여왕의 분신일 뿐이다.”

[그래? 그러면 새로운 분리수거함으로 제격이군. 하찮은 그림자야. 우리가 성좌로 만들어 줄 테니, 이쪽으로 오거라.]

“하…… 나도 여왕님처럼 저런 최후를 맞이하라고?”

[그동안은 영예를 누리지 않았느냐. 최후만 비참할 뿐이지.]

표정이 굳어진 아리엘은, 성지한을 바라보았다.

“……주인, 빠져나가자. 여기 더 있으면 안 된다.”

“여왕은 저 상태로 내버려 두고?”

“여왕님은…… 이미 끝이 났다. 우리까지 죽을 순 없지.”

자기가 먼저 돌진하더니, 지점장의 말에서 무언갈 감지한 건지 이제는 빨리 도망치자는 아리엘.

하나.

[후후, 고객님. 제가 왜 이렇게 그림자 따위의 사정을 길게 이야기했겠습니까?]

다시 존대로 돌아온 지점장 가면은 성지한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당신이 이곳까지 들어오게 된 경위를 급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세계수의 기운을 지녀, 대정령들이 관리소장으로 착각했다고 하는군요.]

“근데?”

[세계수의 기운을 온전히 품다니, 반가워요. 언젠가는 그러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영원’을 지니다니…… 저희와 동족이 될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동족이라…… 고엘프를 말하는 건가?”

[고엘프라…… 그건 외부자가 저희를 칭하는 용어일 뿐. 정확히는, ‘이그드라실의 일족’이랍니다.]

스으으으.

가면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갔다.

[이그드라실이시여.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 새로운 일족을 맞이해 주십시오.]

번쩍!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무리.

가면이 있던 자리에서는 곧, 하나의 형상을 보여 주었다.

‘……무지갯빛의 나무인가.’

홀로그램 영상 같이 떠오른 빛의 나무.

그것은, 무지갯빛으로 색이 변하면서 영롱한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저게…… 이그드라실…….”

성지한에게 도망치자고 하던 아리엘은 그걸 보고는 넋을 잃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아.”

멍한 눈으로 전방만 응시하던 그림자여왕의 입에서도.

처음으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지 형상일 뿐이지만.

모습만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생명의 기운을 내보이는 무지갯빛의 나무 이그드라실.

‘저게 세계수 연합의 정점, 이그드라실인가? 차원이 다르긴 하군.’

성지한이 이를 보고 덤덤히 그리 판단하고 있을 때.

[그럼, 이제부터 일을 도와주세요.]

이그드라실의 형상이 사라지며, 지점장의 가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스으으윽…….

그와 똑같이 생긴 반가면이 허공에서 만들어지더니.

성지한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반가면 쓰고 쓰레기 처리부터 먼저 하세요, 후배님.]

탁.

성지한은 날아오는 가면을 손으로 쥐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네 후배냐?”

*   *   *

[…….]

성지한의 대답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가면은.

[당신…… 아까. 이그드라실을 영접하지 않았나요……?]

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아, 아까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나무?”

[그, 그래요! 그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아, 반짝거리는 게 좀 이쁘게 생겼다고 생각했지. 생명력도 팔팔하고 말이야.”

[이뻐……?]

“응.”

[가, 감히 이그드라실께 그딴 평가를 내려요…….]

“이쁜 건 칭찬 아니냐?”

성지한은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반가면을 신기한 듯이 만지작거렸다.

그걸 보고는, 사태를 파악한 지점장은 경악했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영원을 지닌 자가…… 이그드라실께 경배를 하지 않을 수 있죠? 당신 안에, 세계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있으면 이그드라실에게 복종하나 보지?”

[당연합니다!]

“전혀 그런 기분이 안 드는데?”

성지한은 그리 이야기하면서.

툭. 툭.

지점장의 반가면을 두드렸다.

“근데 너, 약해졌다?”

[……이그드라실의 모습을 잠시 로딩한 것 만으로, 충분히 무리를 했습니다. 고객님이 후배님이 돼서, 제 일을 도와줄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군요.]

“흐음.”

툭. 툭.

그 말을 들으면서, 앞을 가로막는 가면을 좀 더 세게 두드리는 성지한.

조금 전 이그드라실의 형상을 띄운 게 그만큼 힘의 소모가 컸던 것일까.

단순한 두드림 만으로도, 반가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점장이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걸 부수다간, 공허가 연구소까지 역류하게 될 겁니다!]

“그래?”

[……예, 설마 부술 생각은 아니겠지요? 경고합니다. 여기서 멈추십시오. 그 손! 그만 두드리세요!]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반가면.

그와 비례해서.

“근데 말이야. 난 왜 니네들이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을까?”

이를 두드리는, 성지한의 손도 강해졌다.

쾅!

완전히 금이 간 반가면.

[이 미친……!]

경악한 지점장의 음성과 함께.

슈우우우!

갈라진 틈새에서, 안에 격리되어 있던 공허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허를 지닌 성지한이라고 해도, 흡수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양.

‘이거, 바로 써먹어 봐야겠군.’

성지한은 지점장이 준 반가면을 들었다.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