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15화>
한편.
=대정령의 포탈에 들어선 후, 성지한 선수의 모습이 계속 보이질 않는군요.
=새하얀 화면만이 계속 뜨고 있어요. 혹시 대정령의 포탈이, 성지한 선수를 이상한 곳으로 보낸 게 아닐까요?
=뭐 이런 건, 성지한 선수를 중계할 때면 종종 있는 일입니다만…….
중계진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한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경기 화면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지한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경기에서는, 카메라가 꺼지는 상황이 간혹 나왔으니까.
-이번엔 또 뭔 일이여 ㅋㅋㅋ
-포탈 너머에 비밀스러운 사건이 벌어지는 건가…….
-혹시 함정에 빠진 거 아님?
-대정령 애들 무릎 꿇는 거 보면 그런 거 같진 않은데
시청자들도 이제는 익숙한 태도로 채팅을 치고 있을 무렵.
=어, 화면이 바뀝니다…….
=새하얀 화면이, 금방 시커멓게 물드는군요!
=혹시 성지한 선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중계진은 갑작스레 바뀐 화면을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새하얗게 뜨기만 하던 배틀튜브의 화면.
거기서 거대한 반가면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금이 가면서, 안에서 보랏빛의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가면 그 남자 엘프가 쓰던 거 아닌가?
-그런 거 같은데? 저게 여기서 뜨네.
-아니, 화면이 금방 또 보라색으로 바뀜;;
가면 나올 때만 해도 다시 시청할 수 있겠다 싶더니.
금이 가면서 또다시 보라색으로 뒤바뀐 화면.
그래도 아까 보다는, 저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뭐가 뭔지 인식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번 경기, 결국 볼 수 없겠다고 포기하고 있을 때.
스으으…….
=아…….
=서, 성지한 선수. 모습을 드러냅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군요. 반가면입니까?
=저게 보랏빛 연기를 흡수하고 있어요!
운무가 서서히 옅어지며, 가면을 손에 들고 있는 성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가면. 꽤 쓸 만하네.’
공허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가면은, 작은 크기에 비해 흡수량이 상당했다.
성지한이 지금 문제없이 수용할 수 있는 공허의 양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있었다.
‘공허의 수용 한도가 더 늘어날 때까지, 이걸 임시 창고처럼 써먹으면 되겠군.’
지금 성지한의 최대 공허 수용 한도는 200.
여기서 만약에 대기에 떠도는 공허를 흡수하게 된다면, 금방 200이 찰 것 같았지만.
‘공허를 내 몸으로 직접 흡수하기 시작했다간, 걷잡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 번 문을 열어 줬다가, 몰려오는 공허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치가 금방 200이 넘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공허의 의지에 귀속되겠지.
성지한은 그 대신, 가면에 공허를 넣어 두고 안전히 이를 뽑아 먹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나는 잘 노리지 않는군.’
이렇게 공허가 가득해진 세상에서, 성지한이 순조롭게 버틸 수 있던 건.
지점장이 주었던 반가면의 효과도 크진 했지만, 공허가 그를 1순위로 노리지 않는 게 더 컸다.
지하공간을 이루는 벽조차 모조리 녹여 버리고, 늪지대처럼 흐물흐물해져 있던 바닥은, 이미 싹 다 사라진 상황이었지만.
정작 성지한의 육체는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공허.
간혹가다 그에게 다가오는 공허의 기운도 있긴 했지만, 이건 일단 가면 선에서 흡수가 가능했다.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진 않다.’
어쨌거나 공허는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가면이 흡수할 수 있는 저장 공간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계속 머무를 순 없지.
성지한은 속박된 그림자여왕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불길에 타오르던 그녀는, 공허를 가둔 벽이 부서지고 나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상황이 나아져서.
몸이 어느 정도 재생한 상태였다.
하지만.
꿈틀. 꿈틀.
그녀를 속박한 사슬이 움직이자, 또다시 공허의 불길이 붙는 상황.
‘일단 속박을 풀어야겠군.’
성지한은 봉황기를 들어, 그녀를 묶은 사슬을 향해 적뢰를 쏘아냈다.
하지만.
치이이익…….
잠시 전류만 펄떡일 뿐, 끄떡도 없는 사슬.
“단단하네.”
이 무지막지한 양의 공허를 공급하는 물건이라 그런지.
사슬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소멸 코드를 작성하는 정도가 아니면 부수지 못할 단단함.
하지만 소멸 코드를 쓰기에는, 사슬의 개수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하나하나에 다 작성하기에는 힘이 부족했으니까.
“이건 쉽지 않겠어.”
[주, 주인…… 물러날 것인가?]
“여왕에게 유언 들을 시간은 주지.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그 시간까지 한번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
[……알겠다.]
공허가 쏟아질 때 성지한의 팔 안으로 다시 회수된 아리엘은.
성지한의 냉정한 판단에 침울한 목소리로 납득했다.
[나, 잠시 나와도 되겠나…….]
“내 주변의 공허는 제어 중이다. 나오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야.”
[고마워.]
스으윽.
성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팔에서 나온 아리엘.
그녀가 다가가자, 그림자여왕의 공허한 눈에 살짝 빛이 돌아왔다.
“……아리엘?”
“예, 여왕님.”
“이상하네. 네가 나왔는데…… 왜 세상은 그대로지?”
그림자여왕은 생기가 없는 얼굴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번 환상은, 많이 어설프구나.”
“환상…… 이라니. 이건 환상이 아닙니다.”
“간수! 뭐 하고 있지? 약이 덜 들어갔어. 약, 약을 더 주입해라!”
“여왕님! 여긴 현실이에요.”
아리엘이 그녀의 몸을 두 손으로 붙잡았지만.
스으으으…….
순식간에 여왕의 몸에서 공허가 일렁이며, 그녀를 밀어내었다.
“간수! 뭐 하는 거지? 이번 환각, 어설퍼! 이런 어설픈 환각으로 고통을 잊으라는 거냐? 이 상태면 공허 처리에도 문제가 생길 텐데? 빨리 약을…… 약을 먹여!”
그러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그림자여왕.
그녀는 현 상황을 확실하게 환상으로 치부하는 눈치였다.
아니.
어떻게든,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여왕님…….”
“후, 후후. 이곳이 외부자에게 뚫릴 리가 없잖니. 세계수 연합의 심부에 위치한, 오물 처리장이 말이야. 이딴 환상을 믿으란 말이야? 아, 그래…… 너도 잡혀 왔니, 아리엘? 그럼 그렇지.”
“…….”
“어쩔 수 없단다. 세계수는 이길 수 없어. 안 그렇겠니? 우리는 세계수의 오물, 공허를 처리하는 변기에 불과한걸. 하, 하하. 쉐도우 엘프가 만들어진 진의가 그렇단다.”
변기.
자신을 그렇게 취급하며, 그림자여왕은 얼굴을 미약하게 일그러뜨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이번 환각은…… 즐겁지 않아. 이래선 저, 공허 처리하지 못하고 먹힐 거예요. 뭐 해요. 간수? 빨리, 약 주세요. 주사 놔줘요. 아니면 못 버틴다고……!”
소리를 빼액 지르며 발광하는 그림자여왕.
아리엘은 눈에 광기가 서린 여왕의 모습을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왕님…… 저와 혼을 바꾸시겠습니까?”
“네…… 몸으로 갈아타라고…….”
“네, 저는 당신의 분신. 본체와의 영혼 교환,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러기 위한 스페어 아니었습니까?”
혼을 바꾸면 자신이 저 사슬에 갇히게 될 텐데도, 주저함이 없는 아리엘.
하나.
“안 해.”
그림자여왕은 그 말에 즉시 거부 의사를 표했다.
“것보다. 아직도 이딴 게 현실이라고 주장할 거면, 차라리 날 죽여. 새로운 환각 보러 갈 거야. 여긴 안 즐거워.”
“…….”
“아, 혹시…… 니네들. 이런 거야? 아리엘의 몸으로 갈아타서, 그 쉐도우 엘프도 성좌급으로 육성하라는 거니? 변기는 이 몸 하나면 됐지, 또 만들긴 싫어. 몸 바꾸란 소리는 그만하고, 약이나 바꿔!”
“그렇습니까.”
여왕의 거부에, 아리엘은 입술을 깨물더니 성지한에게 말했다.
“주인. 혹시 여왕님께, 안식을 드릴 수 있겠나.”
“죽이라고?”
“……그래.”
“그래! 죽여! 죽이라고! 죽이고 새로운 환각을……!”
죽인다는 말에, 오히려 여왕은 이를 반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맛이 갔군.”
“세계수 엘프 측이, 공허 처리를 위해 여왕님께 강한 환각제를 쓴 모양이다…… 여왕님, 이런 분이 아니셨는데…….”
“흠. 사슬 풀 방법, 시도나 해 볼까 했는데. 저 상태면 풀어 줘도 소용없으려나.”
“……풀 방법이 있어?”
아리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까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고 했을 땐, 솔직히 포기했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사슬을 끊을 방법을 찾았다고?
“확실한 건 아니다. 그냥 시험을 해 볼 만한 거지.”
“……그래도. 시험이라도 가능할까?”
“너한테 좀 무리가 갈 수도 있어.”
“나? 나는 얼마든지 괜찮다.”
“그럼, 다시 검으로 와.”
스으으…….
성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왼손에서 암검 이클립스로 변한 아리엘.
“아리엘 없어졌네. 드디어 바뀌니? 이 환각.”
아리엘이 사라지자 입가에 미소를 지은 여왕의 앞에서.
“네 환상은 무조건 끝날 거니 걱정 마라. 여기서 풀리지 않는다면, 바로 죽여 줄 테니까.”
성지한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들어, 얼굴에 썼다.
* * *
‘역시, 가면 안의 공허…… 엄청난 양이군.’
파아앗!
반가면을 쓰자마자, 그 안에 담긴 엄청난 양의 공허가 느껴졌다.
가면 안에 갇혀 있어 성지한의 육신으로 넘어오질 못하는 거지.
그것이 깨지기라도 하면, 공허 수용 한도 200은 금방 채울 법한 양이었다.
그리고.
스물. 스물.
가면을 쓰자마자, 얼굴을 통해 들어오는 공허의 기운.
[스탯 ‘공허’가 1 오릅니다.]
시스템 메시지 창에서는 단지 가면을 쓴 것만으로도 공허가 올랐다.
이렇게 계속 쓰고 있다가는, 금방 수용 한도를 초과할 상황.
‘빨리 해야겠군.’
스으으……!
암검 이클립스의 색이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변해간다.
원래 성지한이 체내에 지니고 있던 공허의 기운과, 가면의 힘이 혼합되어 순식간에 증폭되는 검의 힘.
그 힘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부풀었지만.
‘자하신공으로, 잠깐은 붙잡아 둘 수 있어.’
동방삭이 창시한 무공 자하신공.
그것은 공허를 다루는 데 있어서, 신공이라는 칭호가 부족함 없었다.
가면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무지막지한 양의 공허를.
잠깐이나마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슈우우우…….
최종적으로는 대기로 퍼진 공허마저, 이클립스에 모이자.
성지한은 자하기를 폭발시켰다.
혼원신공混元神功
암영신결暗影神訣
암영신검暗影神劍
파아아앗!
이클립스에서 순식간에 치솟는 거대한 검기.
그것은 공허의 기운을 형상화한, 자하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
이클립스에서 폭발하는 공허를 보고, 흐리멍텅하던 여왕의 눈에 잠시 초점이 돌아올 때.
치이이이익……!
그녀를 묶고 있던 사슬을, 자하기가 대번에 베었다.
처음에는 검기에 잠시 저항하나 싶던 사슬은 곧 커다랗게 부풀며.
펑!
막대한 양의 공허를 토해 내면서 하나둘씩 끊어졌다.
툭. 툭.
그렇게 사슬이 끊기며, 몸이 순식간에 회복하는 그림자여왕.
성지한은 그녀의 모습 위로,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스탯 ‘공허’가 3 오릅니다.]
‘이거 많이는 못 쓰겠군.’
가면을 쓴 상태로 공허를 쓰자, 사용 가능한 힘이 엄청나게 증폭되었지만.
그만큼 빠르게 오르는 스탯.
스탯이 공짜로 오르는 거야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게 공허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200이라는 한계를, 아직은 넘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성지한은 여왕의 주박이 끊기자 가면을 바로 벗어던지고는.
“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고 있는 여왕에게 물었다.
“그래서, 변기로 죽을래? 나갈래?”
“그 검…….”
“왜?”
“어떻게…… 했지?”
암영신결의 암영신검, 이거 원래 그림자여왕 거였지.
성지한은 이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알고 싶음 살든가.”
“……나갈래.”
“가자. 그럼.”
스윽.
성지한은 그림자여왕의 허리를 옆구리에 끼고는.
“잠깐…… 나 혼자서도 가능해……!”
“시간 없다.”
휙!
그대로 지하공간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