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327화>
“누나를 풀어 준다니…… 원하는 게 뭐지?”
[일단,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
성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으윽.
곧바로 아레나의 주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양복에 검정 중절모를 쓴 상대는.
저번과 같이, 얼굴이 여전히 우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강해진 성지한으로서도, 감히 한계를 측정할 수 없는 상대.
‘롱기누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군.’
방금 전 쓰러뜨린 성좌, 롱기누스를 기준으로 놓고 봐도.
아레나의 주인은 격이 다른 강함을 자랑했다.
이 정도면, 대성좌 급인가.
성지한이 눈앞의 상대를 보며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아레나의 주인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성좌와의 전투, 잘 보았습니다. 세계수 연합의 공허처리장을 적절히 사용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더군요.”
“싸우는 걸 봤나?”
“예. 공허처리장을 사용하셔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슈우우우…….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하얀 반가면.
아레나의 주인은 자신의 얼굴, 우주의 반을 가린 가면을 툭툭 두드렸다.
“공허처리장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세계수 연합의, 더 나아가 이그드라실의 발명품입니다. 이것은 꽤 효과를 발휘해서, 공허에서 세계수 연합을 지켜보는 데 애를 먹고 있지요.”
“공허처리장이 그 정도인가?”
“예. 저희도 나름대로 대응은 하고 있지만, 세계수 연합도 매번 공허처리장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만들어진 공허처리장은 외부로 유출이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루키님께서 얻으셨더군요.”
성지한은 그 말에, 인벤토리에서 반가면을 꺼냈다.
“결국, 이게 거래대상이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거기에.”
스으윽.
아레나의 주인이 시선을 창대로 돌렸다.
“‘코드 매개체’까지 넘겨주시면 공허의 마녀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공허에 물들지 않은, 원래의 인간 모습으로요.”
“코드 매개체?”
“예.”
“시스템에선 혈족의 창이라고 뜨더니. 넌 다르게 부르는군.”
“혈족의 창이라. 길가메시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나 보군요…….”
번쩍.
아레나의 두 눈 역할을 하는, 우주 속 흰 별이 금방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무섭게 피어오르는 공허.
단지 눈 색이 바뀌었을 뿐인데, 아레나의 주인은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레나의 주인…… 예전에 그가 대성좌와 비견할 만한 힘을 지녔단 소문을 들었을 땐, 허황된 것인 줄 알았는데.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아레나의 주인이 지닌 힘을 대성좌급이라고 평가하는 그림자여왕.
‘배틀넷은 올라갈수록 강한 놈 천지군.’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힘자랑은 그만하고.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이 매개체를 길가메시에게 넘긴 거지?”
“그에 대해선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루키께서 현 매개체의 주인이니, 완전히 무관계자라 할 수는 없겠군요. 가능한 한에서, 정보를 드리죠.”
스으으윽.
아레나의 주인의 얼굴이 뒤바뀌더니, 하나의 화면을 띄웠다.
거기서 나온 것은 행성 지구였다.
“행성 지구는, 생명이 싹틀 잠재력이 충만한 곳. 이러한 장소는, 세계수 연합에서 세계수를 심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지구도 이러한 케이스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고엘프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지구로 파견된 세계수 엘프 측 실험소장이, 지구의 세계수와 자신을 융합시킨 사고를 쳤다고.”
이미 실험이 진행된 세계라면서, 진입하지 못했던 고엘프.
그가 죽고 난 후, 대출창구에서 만난 본부장은 성지한에게 이때의 일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세계수를 건드린 사고에 격분한 연합의 조사단이 지구에 파견되었지만, 특급 에러 발생이란 메시지만 남긴 채 실종되었다고.
“허…… 그쪽에선 사고라고 합니까?”
성지한의 이야기를 들은 아레나의 주인은, 본부장이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는
“저희는 100퍼센트 연합이 의도된 일로 파악했습니다만.”
“세계수 연합이 의도했다고?”
“예. 하나 실험 결과 자신의 손에서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가 나오자,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거지요.”
화면이 뒤바뀌고.
그 안에선, 나무와 몸이 기이하게 합쳐진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존재입니다. 저희는 목신족木神族이라고 불렀죠.”
“목신족…….”
“예. 이들은 공허의 제약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공허의 내부 방침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교묘한 방법으로 저희의 규제를 피하고 있었지요. 저희 쪽에서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대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개입하기로 했죠.”
“대리자라…… 그가 설마, 길가메시였나?”
“예.”
스으으윽.
화면에서 목신족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길가메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공허와 세계수 연합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아, 목신족과 오랜 전쟁을 펼쳤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코드 매개체도, 제가 그에게 준 물건…… 그것은 불멸의 재생력을 지니고 있는 목신족을 완전히 소멸시킬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당연히 저에게 반납할 물건이었지요.”
“한데, 반납하지 않은 건가.”
“예. 길가메시는 저와 한 약속뿐만이 아니라, 세계수 연합과의 약속도 모두 어겼습니다. 그리고, 무신이 나타났지요…….”
휙. 휙.
성지한은 혈족의 창을 돌려보았다.
소멸 코드를 작성해서, 원거리에서도 날릴 수 있게 해 주는 코드 매개체.
‘반납하기 아깝긴 하군.’
근접해서 한 땀 한 땀 코드 쓰는 거랑.
멀리서 투창하는 거랑은, 효용성 측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거래 대상으로 누나가 걸려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주질 않았겠지.
하지만.
‘상대가 누나라면, 어쩔 수 없지.’
두 아이템보다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건, 가족이었다.
“좋다. 거래하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네가 먼저 누나를 되돌려.”
“제가 먼저…… 말입니까?”
“그래. 네가 물건 받고 사라지면, 나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저는 ‘아레나의 주인’입니다. 아레나를 걸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됐어. 그런 맹세 필요 없으니까 누나나 먼저 돌려줘라.”
“…….”
성지한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는 아레나의 주인.
그림자여왕은 성지한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레나의 주인이 맹세까지 한다는 데,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아레나의 주인 정도면 공허에서도 서열 20위 안에 드는 강자일 텐데 말이야.]
‘20위 강자가 들고 튀면 어쩔 건데.’
[그건…….]
‘오히려 강자니까 먹튀하기 더 쉽지.’
성지한이 비록 오랜 세월 배틀넷에 있어 본 건 아니었지만.
있으면서 느낀 점은, ‘이 세계에선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즉시 돌려 드리지요.”
그리고 성지한의 태도가 완강한 걸 본 아레나의 주인은, 선선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비스의 주인’이여.”
슈우우우웅……!
수련장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허의 운무.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엄청나서, 반가면을 썼을 때 흘러왔던 것과 비견할 만했다.
그리고, 운무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붉은 포탈.
아레나의 주인은 그 안에 대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상급자로서 명합니다. 공허의 마녀를 제게 건네주십시오.”
어비스의 주인보다, 아레나 쪽이 확실히 상급자인 건가.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붉은 포탈에서 누나인 성지아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
하지만.
[싫다.]
그 안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 *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싫다고 했다.]
“상급자의 명을, 불복할 셈인가?”
언제나 존댓말 일색이던 아레나의 주인에게서 처음으로 반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반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내뿜는 기세.
공허의 수련장 내부의 공간이.
아레나의 주인이 뿜어내는 공허에 일그러져 갔다.
[아까 네가 맹세를 무시해서 화난 거에, 저놈이 기름을 부은 거 같구나. 아레나의 주인…… 무시무시한 힘이군. 아레나를 문제없이 운영할 만하구나.]
‘야. 내 말이 맞지? 배틀넷에선 무조건 선불이라니까.’
[거참. 이번 건에 한해선 부인할 수가 없구나…….]
성지한이 그렇게 그림자여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렇다. 불복한다.]
쿠르르르……!
그 말에 무너지는 공허의 수련장.
아레나의 주인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다가.
스윽.
성지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의 모습을 한두 눈과 입 모양을 하고 있는 초승달.
하나 지금의 초승달은 이리저리 꼬인 채,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직접 어비스를 부수고, 꺼내 오겠습니다.”
억지로 화를 눌러 참으며, 성지한에게는 존대를 하는 아레나의 주인이었지만.
[네가 쳐들어오면, 난 공허의 마녀를 먹어치울 것이다.]
“이 새끼가!”
포탈에서 어비스의 주인이 그리 말하자, 분노를 표출했다.
“하극상을 진압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슉!
그리 말하며 포탈 안으로 스윽 들어간 아레나의 주인.
붉은 포탈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휭! 휭!
그 안에서 공허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한 방에 제압당할 줄 알았더니…… 나름 재주가 있나보군.]
“그럼 실패할지도 모르겠네.”
성지한은 포탈 쪽을 바라보며, 코드 매개체를 휭휭 돌리다가.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창이나 테스트 해 보기로 했다.
‘여기다 코드 작성하면 되는 건가.’
치이이익.
롱기누스의 데이터에서 봤던 것처럼, 창대 위에다가 소멸 코드를 작성해 본 성지한.
“오.”
모든 걸 소멸시키는 코드가 작성되었음에도, 혈족의 창은 멀쩡한 상태였다.
다만.
‘창끝에 소멸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는군…… 10초 후면 폭발한다.’
창촉이 없는 혈족의 창.
끝을 대신하는 게, 바로 소멸의 힘인 것 같았다.
10초간은 소멸의 기운이 일렁이다가, 타깃에 꽂히면 그 존재를 소멸시키는 건가.
“엔키두.”
성지한은 과녁으로 엔키두를 소환하고, 혈족의 창을 멀리서 던져 보았다.
푹!
창이 꽂히자마자, 먼지처럼 사라지는 엔키두.
그리고 상대를 소멸시킨 창대는, 빛을 한 번 번쩍이더니 성지한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거 쓸 만하네.’
소멸 코드의 활용 방안이, 이러면 무궁무진해지는데.
성지한은 흔들리는 포탈 안을 바라보았다.
일이 잘돼서 누나가 돌아오는 게 최고의 결과긴 하지만.
이 창도 써 보니 욕심이 좀 나긴 했다.
‘그래도, 누나가 더 중요하지.’
성지한은 혈족의 창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어째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욕심이 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가만히 포탈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을 때.
스으으윽.
포탈 안에서, 아레나의 주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언제부터 공허의 기강이 이리되었나.”
나오자마자 한탄을 하는 아레나의 주인.
“왜, 못 잡았어?”
“999번을 찢어도, 계속 살아나는군요. 나중엔 마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 새낀 왜 누나한테 집착하는 거지?”
“모릅니다. 승진을 시켜 주겠다고 했는데도 요지부동입니다…… 대신, 그가 제안한 것이 있는데.”
“뭔데?”
“당신이 자신을 이긴다면, 공허의 마녀를 넘겨주겠답니다.”
“……내가?”
성지한은 뜻밖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놈…… 왜 굳이 날 지목한 거지?”
“제가 알고 싶군요.”
이가 있으면, 이를 갈 거 같은 아레나의 주인.
그는 그러더니.
“당신을. 제가 후원 좀 해도 되겠습니까?”
“……날 후원해 준다고?”
“예. 감히 하극상을 저지른 어비스의 주인을…… 완전히 없애버려야겠습니다.”
성지한에게 후원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