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04화>
성지한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눈앞의 존재.
공허의 힘이 미약하게 느껴지는 그가 누군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태극의 망혼인가.”
“그래. 이야기할 게 있어서 왔다.”
성지한의 물음에 긍정한 태극의 망혼은, 익숙한 걸음걸이로 식탁에 앉았다.
“하나 그 전에, 밥부터 먹을까. 같이 식사하지.”
식탁 의자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앉으라는 제스처를 내보이는 태극의 망혼.
마치 하는 행동이 자기 집인 것 같았다.
“……우와, 도플갱어야 저거? 으, 어떻게 해 삼촌?”
“줘. 죽기 전에 한 끼는 허락해야지.”
“아, 알았어…….”
윤세아가 마지못해 요리를 식탁에 놓자.
“먼저 먹지.”
태극의 망혼은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
한 입 먹고는, 한참 입을 오물거리는 상대를 보면서.
성지한은 답답함을 느꼈다.
뭐 저리 천천히 먹고 있어.
“세아야. 내가 저렇게 먹었냐?”
“아니…… 삼촌 원래 후다닥 먹잖아.”
눈앞의 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무시하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던 태극의 망혼은.
모든 반찬을 한 젓가락씩 먹고 나서야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 먹나?”
“다, 당신. 삼촌 아니잖아! 근데 무슨 식사를 같이해?”
스윽.
윤세아의 말에 성지한을 바라보는 망혼.
“세아야, 같이 먹자.”
“잉…….”
“이번이 저놈 마지막 끼니일 텐데, 잘 보내 줘야지.”
“너는 굳이 안 앉아도 된다.”
성지한의 말에, 젓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는 망혼.
“사, 삼촌도 안 먹으면 나 안 앉을 거야.”
“그럼 앉아라.”
하나 윤세아가 그리 말하자 다시 젓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무한회귀 속, 태극마검에 갈려 온 자신이라 마지막 끼니는 챙겨 줄까 했더니…….
‘가지가지 하는구만.’
그냥 망혼이고 뭐고 식탁 엎어 버릴까?
성지한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 먹으면, 누나를 부르도록 하지.”
“누, 누나라면 설마 엄마…….”
“……좋아. 앉자.”
원혼이 누나를 거론하자, 그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시작된 어색한 식사자리.
두 성지한은 그냥저냥 요리를 먹어 나갔지만.
“으으…… 뭐야 이게…….”
윤세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기에만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래서 그런가.
탁.
망혼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얼른 얼굴이 화색이 되어선.
“다, 다 먹었지…… 요? 가짜님?”
“응.”
“그럼 치울게!”
휙. 휙.
잽싸게 식탁에서 요리를 치워 나갔다.
“……밝네.”
그런 윤세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망혼은.
“외계로 이주해도, 씩씩하게 잘 살겠어.”
“외계로…… 이주?”
“그래. 이번 세계의 나여. 나는, 아니.”
스으으으.
성지한과 똑같이 생긴 망혼의 얼굴이, 일제히 갈라져 모자이크 상으로 변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다. 이 세계를 탈출할 준비가.”
“탈출이라.”
“너도 보았듯이, 이 세계의 멸망은 필연적. 이 수많은 죽음의 사례가 그것을 증명한다.”
태극의 망혼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부터, 목 아래 신체까지.
수천 개, 그 이상으로 갈라진 성지한의 파편.
이들은 하나하나가, 무한회귀 속 태극마검에 의해 죽어 나갔던 성지한이었다.
“그리고.”
스윽.
망혼은 성지한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윤세아가 있었다.
“이 수많은 죽음 속에서, 윤세아는 단 한 번도 살아나지 못했다.”
“…….”
“대부분, 나보다 먼저 죽었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가짜는?”
윤세아가 그의 말에 혼란스러워하자.
성지한은 화제를 돌렸다.
“넌 어떻게 나왔지? 분명 태극의 망혼 속에서, 육체를 장악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있었을 텐데.”
“그래. 분명 태극의 망혼을 장악하기엔 ‘성지한’의 힘이 부족했지. 하지만.”
스으으으…….
망혼의 앞에, 하나의 화면이 떠올랐다.
그 화면 속에선.
동방삭이 거인의 머리에, 태극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재생되었다.
“이건…….”
“동방삭이 너를 확실히 죽이라며, 나에게 태극을 부여했고…… 신체가 재구성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망혼의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동방삭이…….”
“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던 일. 절대자, 무신은 너를 견제한다.”
지이잉.
화면이 사라지고.
망혼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말문을 이어 나갔다.
“하나, 내가 무신의 의도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
“……무슨 생각이지?”
“힘은 충분히 모였다. 나와 함께 이 세계를 탈출하자. 가족과 같이.”
“탈출이라니…….”
“이 건은 누나도 동의했다.”
그 말이 끝나자.
슈우우우…….
망혼의 뒤에 보랏빛 포탈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엄마?”
석화된 상태의 성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누나, 저 말이 사실이야?”
[……맞아.]
성지한의 물음에, 석상 상태의 성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이야기한 거 기억나니? 내가 너희를 구하겠다고.]
“피난처를 통해서, 유사인류종이 사는 행성으로 피난시킨다고 했지.”
[맞아. 이 세계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땅. 나는 내 딸과 동생이라도 살리고 싶었어. 하지만…… 쉽지 않았지.]
그러면서 성지아는 망혼을 바라보았다.
[어비스의 주인이 날 구속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이 몸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기에, 원활한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누나가 하려던 탈출 방식은 이미 실패한 방법이었지…….”
스으으으…….
그러면서 나오는 화면.
거기선, 피난처에 낑겨 탄 성지한과 성지아가 재생되고 있었다.
하늘 위를 향해 치솟아 날던 소형 구체는.
지구를 빠져나가려는 듯싶더니, 대기권 탈출 직전에 허공에서 폭발해 버렸다.
폭발 직전, 그곳에 남아 있던 성지한이 본 건 바로 태극의 문양.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태극마검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은 것만, 벌써 7번. 탈출을 하려면, 새로운 방식으로 해야 했다.”
“……그게 뭐지?”
“종을 바꿔서, 공허의 문을 열어 탈출하는 것.”
그러면서 망혼은 입꼬리 한쪽을 비틀었다.
“태극이 닿지 않는 곳까지 먼 거리를 워프할 것이다.”
“…….”
“이미 탈출할 행성 후보군은 찾았다. 유사인류종이 사는 세계…… 거기엔, 인류와 매우 닮은 이들이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곳은 배틀넷도 없고, 평화로운 세계야. 물론 이종족이나, 마왕?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걔는 세아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해.]
“뭐야. 그 이세계는…….”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탈출하자는 건가.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성지한은 처음 들었을 땐 그리 생각했다.
망혼에게 동방삭이 태극을 부여한 걸 보면.
그의 기억이, 안 돌아온 거 같은데.
그럼 지금 태극의 망혼과 싸워 이겨도, 동방삭과 싸워 이겨야 했으며.
그다음엔 무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신 이놈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금륜적보의 힘까지 조종할 수 있었으니.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리셋이 되든지.
아니면 자신이 동방삭에게 패배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리고 무신의 성정을 보면, 다음 회귀 때는 나부터 죽이고 시작하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견제를 하겠지.’
무신보다는 조심성 많은 뱀에 어울리는 상대.
이번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서 어쩔 수 없더라도, 그가 다음 회귀부터는 성지한에게 지금만큼의 기회를 주지 않을 건 자명했다.
이렇게 자신이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이 세계가 마지막일 테니.
불확실한.
아니, 가능성이 솔직히 희박한 무신과의 승부를 준비하느니.
태극의 망혼이 제시하는 탈출 방법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럼 인류는? 이 세계는? 우리가 탈출하면, 삼촌이 없어지면 인류가 배틀넷을 헤쳐 나갈 수 있어?”
윤세아는 심각한 얼굴로 그리 물어보았지만.
“인류보다 가족이 중요하다.”
“그건 그렇지.”
두 성지한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니……! 삼촌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
“난 너의 죽음을 수천 번, 그 이상 보아 왔다…… 한 번이라도 살리고 싶군.”
“그의 방법이 나쁘지는 않아 보여서. 그러니 누나도 동의했겠지.”
“좋은 대답이군…… 그럼 너도 함께하겠는가? 우리가 같이한다면, 일주일 내에 바로 탈출할 수 있다.”
성지한을 향해, 손을 내미는 망혼.
인류보다, 가족을 살리자는 그의 제안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남아 있는 적이 얼마나 강대한지, 잘 아는 성지한 입장에선 더더욱.
‘그래. 받자.’
희박한 가능성에 도전하기보다는, 가족을 살리자.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자신도 손을 마주 뻗으려 했지만.
“…….”
뚝.
그 움직임이, 중간에 멈추었다.
“고민하나.”
[지한아…….]
“우리는 그저 한 명의 개인. 네가 이 세계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건 네가 막을 수 없는 멸망이다. 그렇다면…… 가족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을까?”
태극의 망혼은 손을 멈춘 성지한을 설득했다.
그와 같이한다면, 탈출은 훨씬 쉬워지니까.
멸망이 예정된 세계를 등지고, 인류와 비슷한 이들이 살고 있는 이세계에서 새로이 시작한다.
양심의 가책은 생길 수 있겠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도, 성지한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수도 없이 실패하지 않았나.’
실패의 증거가, 바로 눈앞의 존재 ‘망혼’이고.
지금의 성지한은 무한회귀까지 파헤쳤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신과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결론만 알아버렸다.
지금이, 어찌 보면 탈출에 있어선 최적의 기회.
태극의 망혼도 협조적으로 나서는 이상,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감이 안 좋아.”
“가, 감…….”
심각한 분위기 가운데서.
성지한이 ‘감’ 이야기를 하자, 윤세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지금까지 실컷 저 모자이크 성지한의 이야기에 동의해 놓더니.
갑자기 왜 감 타령이야?
“……날 의심하는 건가?”
“아니, 넌 믿어도 될 것 같은데.”
감 이야기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망혼에게, 성지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진정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알겠다.
이 제안.
받아야 한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까지 가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군.”
“무, 무슨 소리야. 삼촌! 갈 거면 같이 가야지!”
성지한의 말에 윤세아는 발끈했지만.
“…….”
태극의 망혼은, 입을 다문 채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난 이미 주목을 너무 많이 샀다.”
[그건…….]
“적색의 관리자의 손도 지니고 있고. 배틀튜브에는 빛의 눈도 설치되어 있지. 탈출 후, 잠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거 그냥 그때 후원 많이 한 태양왕이나 드래곤 로드한테 줘 버리면 되잖아! 빛의 눈도 배틀튜브 안 틀면 그만이고.”
“아니.”
윤세아의 반문에, 성지한은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듯.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아. 이미 관리자의 권능이 여럿 엮여서, 이 수라장에서 나 혼자 발을 빼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어쩌려고…… 설마.”
“나는 남겠다. 네가 책임지고 피신시켜 줘.”
“……너.”
“내가 무신까지 다 없애 놓고, 다시 부를 테니까.”
성지한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세계로, 잠시 여행 갔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