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17화>
길가메시가 피티아를 제거하자며, 공조를 요청하다니.
이거, 상황이 묘하게 되었군.
‘피티아의 상태가 저번 왕위 계승식 이후 이상해지긴 했다만…….’
왜 자신이 군림 성좌인 줄 모르겠다고 하더니, 그 후부터는 상태가 뭔가 이상해졌던 피티아.
요즘은 그쪽에서 연락도 오질 않았지.
그 대신인지, 길가메시가 무신에게 속은 걸 알고 협조하겠다고 말은 했었다만.
‘그간 별 정보를 보내오지 않더니, 갑자기 피티아를 제거하자고 하네.’
피티아와 길가메시.
둘 다 결국 무신의 종이고, 신뢰를 보내기엔 애매한 존재다.
이 제안도, 어떻게 보면 함정이 아닐까.
[갑자기 피티아를 제거하자고 해도, 쉽게 믿기가 힘들군. 전후 사정을 좀 말해 봐라.]
[의심이 많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여 주지.]
지이이잉…….
그러더니, 메시지창에서 떠오르는 링크.
폰 주인 윤세아는 그걸 보면서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거 눌러도 될까? 악성 코드 심어져 있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성좌인 길가메시가 악성 코드를 심겠냐.”
“삼촌. 이런 건 조심 또 조심해야 해.”
“그래. 그럼 아예 내 폰으로 눌러 볼게. 어차피 거의 안 쓰니까.”
성지한은 방에서 핸드폰을 가져와, 링크에 들어갔다.
그러자 재생되는 영상.
그 안에는, 무신이 어둠 속에서 붉은 두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왜 불렀지? 네 명에 따라, 열심히 관리자들의 감시자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더 시급한 일이 생겼다. 길가메시.]
[무슨 일이지?]
[인류가 아레나의 초대를 받아, 한 단계 더 진화하려고 한다.]
[그게 무슨 문제지? 좋은 것 아니냐?]
[인류의 왕인 너한테는 좋겠지. 하나 투성에는, 관리자의 감시가 더욱 거세진다…….]
인류가 하급 종족으로 업그레이드된 후, 기다렸다는 듯이 감시망을 좁혀 오던 흑백의 관리자들.
여기에 인류가 중급까지 업그레이드되면, 관리자의 관측은 더욱 예리해질 수 있겠지.
그런데 무신의 다음 말은 뜻밖이었다.
[너와의 약속을 미리 이행하겠다. 피티아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 실험실을 다시 가져가게 해 주지.]
[그게…… 정말인가?!]
[그래, 피티아. 네가 그에게, 실험실이 있는 곳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무신이시여.]
[……일단은, 고맙게 받지.]
그러면서 어두워지는 화면.
짧은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영상을 같이 보던 윤세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잉…… 삼촌. 이거 중간에 끊긴 거 아니야?”
“이상하지?”
“어. 무신은 인류의 진화를 견제하는 듯하더니, 왜 갑자기 실험실을 준대?”
“이거만 봐선 모르겠네. 이놈한테 물어보자.”
영상 재생을 끝내고, 하프엘프 커뮤니티 화면으로 돌아온 성지한은 다시 쪽지를 보냈다.
[실험실이 뭐지? 왜 인류 이야기를 하다 저게 나오냐?]
[현 인류는 나를 시작점으로 구축되었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부정하는군그래.]
[아니. 진화 또한 사실이다. 나도…… 그래.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였지.]
호모 사피엔스까지 나오는 거냐.
성지한은 메시지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하나 수많은 인간 중, 실험실에서 살아남은 건 나 하나였지. 그리고 나는 내 신성한 씨를 뿌렸고, 후손들은 번창하여 인류를 발전시켰다.]
길가메시가 추가로 보낸 메시지를 보자, 예전에 보았던 실험 장면이 떠올랐다.
적의 일족이, 인류를 시험관에 넣어서 태우다가 길가메시 한 명을 건졌던 실험.
그 후 살아남은 그가, 자신의 핏줄을 퍼뜨린 건가.
[뭐, 대부분은 쓸모없는 녀석들이었지만…… 너처럼 뛰어난 재능도 있었지. 그래. 너는 인정해 주마. 나 길가메시의 혈족으로.]
[필요 없다 그딴 거.]
[후후. 인류왕의 후손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고마워하도록.]
[됐고. 실험실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지 그래. 왜 그게 필요하지?]
[나는 실험실을 통하지 않으면, 자손을 보지 못한다.]
[그래?]
[그래. 태초의 때, 워낙 거기서 많은 씨를 뿌린 부작용이지.]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자손 보려고 실험실이 필요한 건가?
[인류가 네 후손이라며. 근데 뭘 또 자식을 보려고 그러냐?]
[너같이 뛰어난 녀석만 있으면 모를까. 쓸모없는 것들이 대다수지 않느냐. 새로 후손을 보아서, 길가메시의 혈족을 다시 완성해야지.]
정말로 숭고하기 짝이 없는 이유군.
성지한은 실험실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캐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원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피티아를 제거하려는 이유는 뭐지?]
[무슨 소리냐? 당연히 그녀가 무신의 충실한 종이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그녀, 예전엔 나한테 꽤 많은 정보를 물어다 줬거든.]
[흥. 그런 짓을 해 왔었나? 예전부터 눈동자를 마구 굴리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눈에 보였지…… 하지만. 그녀는 군림 성좌임을 자각하고 나서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왕위 계승식 이후부터?]
[그래. 예언자 따위가 군림 성좌 레벨 8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처음에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 것 같더니. 사람이 금방 달라졌어. 그리고…….]
길가메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강해졌다. 엄청나게.]
[강해졌다니…….]
[최근 같이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군림 성좌의 힘, 너무 손쉽게 다루더군.]
[너도 위협을 느낄 정도냐?]
[위협은 무슨! 왕이 예언자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않으냐. 다만, 무신의 패는 동방삭으로 충분하다. 이 여자는, 완전히 상정 외야.]
길가메시는 성지한의 말에 발끈하면서도, 피티아의 강함에 대해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자존심 높은 놈이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확실히 강해졌다는 건데…….
‘흠.’
피티아가 그렇게 무신에게 충성스럽게 변모했다면, 이번 기회에 제거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성지한은 길가메시가 그다지 미덥지 못했다.
‘이놈이 손만 대면 일이 실패하는 거 같단 말이지.’
지금까지야, 길가메시가 성지한과 적대적이었으니 그의 실패는 곧 자신의 성공이었지만.
이번에 협력을 하게 되면, 같은 배에 타게 되니 이야기가 달랐다.
[계획은?]
[실험실로 와라. 그곳은, 내가 제어할 수 있으니. 거기서 피티아를 가둔 후, 협공하자.]
[협공이라…… 무신에게 본격적으로 반역할 셈이냐?]
[아직은 대놓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실험실의 장치가 폭주했다고만 해야지. 그러면서, 외부와의 통신을 막고 피티아를 억류하겠다. 너는 타이밍에 맞춰 그녀와 싸워 주면 된다.]
[어째 싸움은 내가 다 하는 기분이군.]
[무신에게 내 본색을 다 드러내면, 투성의 소식을 알려 줄 이가 사라지지 않겠느냐? 그래도 사슬로 그녀의 발은 묶어 둘 테니,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신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도와준다 이건가.
성지한이 그렇게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지한아…… 이거 너무 리스크가 크지 않을까? 길가메시가 배신하면 성좌 둘이랑 싸울 수도 있는데.]
“그건 그렇지.”
“엄마 말이 맞아! 거기에 배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획이 너무 허술해 보여. 아직 찾지도 못한 실험실을 완벽히 제어할 거처럼 이야기하는 거도 그렇고…… 피티아란 성좌 억류는 말처럼 쉽나…….”
같이 메시지를 보던 성지아 모녀는, 그렇게 길가메시의 계획에 불안을 드러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놈 계획, 나한테 써먹을 땐 매번 물 먹었거든. 이번에도 왠지 저 말대로 될 거 같지가 않단 말이지.”
“그래? 그럼 역시 안 가는 게…….”
“하지만, 그래서 얘네들한테 막힐 정도면 무신도 못 이기겠지.”
성지한의 최종 목표는, 방랑하는 무신.
저 둘이 동방삭도 아니고, 그저 좀 강한 성좌에 불과한데.
이들도 못 이겨 내면 무신과는 어떻게 싸울 텐가.
‘오히려 지금처럼 공허처리장과 팔이 말을 듣고 있을 때, 제거하는 게 나아.’
성지한은 그렇게 가기로 결심하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다. 가지. 실험실 위치는 어디냐?]
[위치는…….]
* * *
2일 후.
툭.
성지한은 태평양의 한 섬에 발을 디뎠다.
호주 대륙의 북쪽에 자리한, 작디작은 섬.
길가메시가 알려 준 실험실의 위치는 분명 여기였지만.
‘진짜 여기가 맞나…….’
스윽.
성지한은 섬을 둘러보았다.
야자수가 빼곡한 섬은, 길가메시가 말한 실험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때.
스스스…….
땅바닥에서 나무의 뿌리가 올라오더니, 성지한의 발에 닿았다.
[왔나. 잘 찾아왔군.]
뿌리를 통해 들리는 길가메시의 목소리.
[이제 곧 실험실이 개방될 것이다. 피티아가 봉인을 해제하고 있으니,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들어와라.]
그는 이미 기습할 생각에, 목소리가 살짝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
과연 일이 그의 의도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있어야겠군.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면서 대기하고 있을 때.
지이이잉…….
그의 오른손에 있는 붉은 눈이 번뜩이며, 음성을 보냈다.
[오, 본체……! 이곳, 심상치 않음.]
‘뭐 좀 느껴지냐?’
[지금 봉인되어서 그렇지, 상당히 흥미로운 곳임…… 내 나름대로 여길 분석해도 되겠음? 어쩌면, 이 공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름.]
‘그래? 그럼 해 봐.’
성지한은 협조적으로 나오는 적색의 손에 조사를 해 보라고 한 후, 길가메시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쿠르르르……!
섬 전체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준비해라. 곧, 실험실이 개방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이이이잉……!
섬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붉은빛이 터져 나오며.
일제히 하늘 위로 치솟았다.
딱 보아도, 어마어마한 적의 권능.
[오, 본체! 저리로 가야 함! 가면 이 시설, 우리 걸로 만들 수 있음!]
‘길가메시 거라는데 이거.’
[그게 무슨 소리임? 적색의 권능이 깃든 모든 것은, 바로 본체가 주인임! 그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음.]
녀석.
웬일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 가져 보고 쓸모없으면 돌려주지.’
성지한이 그 말을 듣고 출발하려고 할 때.
[서, 성지한! 빨리 이쪽으로 와라!]
마침 길가메시도, 그에게 빨리 오라고 뿌리로 음성을 보내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
어째 느낌이 싸했다.
‘……또 망했나. 이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일을 그르치는군.
성지한은 만전의 준비를 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힘을 바짝 끌어 올렸다.
다만.
‘배틀튜브는, 일단 안 틀고 상황을 지켜봐야겠군.’
어디까지나 이번 계획의 목표는 무신의 종 피티아를 기습적으로 제거하는 것.
근데 배틀튜브로 만천하에 나 얘 죽여요 광고할 필요는 없겠지.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채널을 틀지는 않은 채로 섬의 중앙부에 접근했다.
그러자.
적색의 빛 한가운데에서.
“안녕하세요~ 성지한 님. 오랜만이네요?”
한 여인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적발에 푸른 눈을 한 그녀는.
만면에 지은 미소와는 달리, 눈빛은 냉정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미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뭐, 어느 정도는요. 전 예언자잖아요?”
그러며, 그녀는 발로 바닥을 밟았다.
콰직!
그러자, 그녀의 발치에서 드러나는 것은.
“크, 크윽…….”
“……야. 위협 아니라며.”
형편없이 짓이겨져 있는, 길가메시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