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20화>
사람 수십은 잡혀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검은 손.
성지한은 이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동방삭이 구궁팔괘도를 개진하려고 할 때, 저걸로 터뜨렸었지.’
하나 그때는 게임 속이었고. 지금은 엄연히 현실.
현실 세계에서, 그가 직접 개입해 온단 말인가.
그것도.
“성좌 후보자를, 무신이 직접 건든다고? 페널티가 두렵지 않은가 보군.”
“그럴 리가요. 지금껏, 그 페널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셨죠. 하지만…….”
피티아의 시선이, 성지한의 오른팔을 향했다.
“당신이 적색의 관리자의 손을 이식한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졌죠.”
“이거?”
“네, 이제 당신만 확보하여 팔을 흡수하면 주인님이 목표하신 바를 이룰 수 있거든요. 페널티 정도는 감수해도 된다는 이야기죠.”
피티아는 그러면서,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매서운 기세로 뻗어 오는 검은 손.
그 안에 담긴 힘이 상당하여.
[이런…… 망함. 적멸 또 쓰기엔 예열 시간이 필요함. 이럴 줄 알았으면 힘 적당히 쓸 걸 그랬음.]
관리자의 팔은 당혹스러운 듯 그리 말했지만, 정작 성지한의 표정은 태연했다.
“괜찮아. 대처 수단은 또 있거든.”
스스스…….
그의 등 뒤로 태극이 떠오르고.
갈라진 얼굴에서, 공허의 기운이 증폭되었다.
순식간에 공허로 물드는, 왼손의 암검.
성지한은 그것을 태극의 안에 넣었다.
“……설마 태극마검을 쓰려구요? 그렇게 여유는 없을 텐데요?”
“내가 근래 힘이 좀 세져서 말이지.”
스으으…….
턱부터 시작하던, 얼굴의 균열이 조금 더 커지고.
강렬한 공허의 기운이 성지한의 몸을 잠식했다.
그와 동시에, 태극에서 빠져나오는 암검 이클립스.
마검으로 변환한 암검은, 예전처럼 작은 크기가 아니라.
들어갔던 크기 그대로, 장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벌써…….”
무신의 손이 닿기도 전에, 완성된 태극마검의 2단계.
피티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이 정도 속도는, 동방삭처럼 숙달되어야만 가능하지 않나?
‘그냥 흉내만 낸 건가?’
너무 빠른 마검의 발출에, 피티아는 그리 생각했지만.
마검은 가볍게 움직이며, 무신의 손을 갈라 버렸다.
세상을 짓누를 기세를 지닌 어둠의 손을.
너무나도 손쉽게, 찢어 버린 것이다.
“……아니, 진짜 벴어?”
“무신도 아니고 손 하나 가지고 뭘 그러나.”
치이이익……!
검의 궤적은 더 나아가, 허공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새로, 무신의 손 전체를 빨아들였다.
소환되자마자, 붕괴하여 사라진 무신의 손.
-기세등등하게 등장하더니 1분 컷이네 ㅋㅋㅋㅋ
-무신, 이름은 세 보이는 데 별거 없는데?
-이럼 그냥 팔 따라가서 본체까지 때려잡아도 됐던 거 아님?
-ㄹㅇ 될 거 같은데, 성지한 님 요즘 강해진 거 보면…….
-관리자 손도 얻었는데 무신 따위야 쉽지 않겠음?
무신의 손을 한 번에 붕괴시킨 성지한을 보면서, 인류 시청자들이 무신도 별거 아니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아까 적색 빛줄기, 적멸이지?
-ㅇㅇ 맞음 적색의 관리자가 주 공격 수단으로 사용했던 거.
-관리자의 손을 얻으면, 적멸도 쓸 수 있는 거였어? 엄청난 가치를 지녔군.
외계의 시청자들은, 성지한이 아까 사용했던 적멸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적색의 관리자가, 주 공격 수단으로 사용했던 적멸.
눈동자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빛줄기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서 적멸은 적색의 관리자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는데.
그걸 손 하나 얻었다고, 바로 사용하다니…….
-대성좌들이 인류가 머무는 행성 위치를 알아보고 있다던데, 이걸 보면 더 혈안이 되겠네.
-그래도 대성좌급 아니면, 성지한 못 이길걸?
-맞어. 성좌급이 어설프게 덤볐다간 적멸에 휩쓸릴 거다.
-저 여자도 나름 군림 레벨 8인데, 제대로 반항도 못 했음.
-그냥 관리자 손 가질 생각은 하지 말고, 저 행성 위치나 찾아 봐야겠다…… 대성좌한테 위치 정보만 팔아도 GP 좀 벌 듯.
오늘 영상을 보고 대성좌들이 관리자의 손을 본격적으로 노릴 거라고 예상하는 외계의 시청자들.
그만큼 적멸의 등장이 주는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흠…… 붉은 눈 레이저가 이렇게 관심을 끌 줄이야.’
적멸이 세긴 해도, 태극마검보단 못한 거 같은데.
대성좌가 지구로 쳐들어오면 안 되니, 이를 컨트롤할 방안도 필요하겠어.
성지한은 그렇게 외계의 시청자들이 하는 채팅을 잠깐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숯덩이가 된 길가메시를 방패로 삼고 있는 피티아가 서 있었다.
“당신 진짜…… 뭐야? 왜 이렇게 세졌어요?”
“글쎄. 어쨌든, 투성엔 못 가겠군그래.”
그러면서 검 끝을 피티아에게 겨누는 성지한.
피티아는 그걸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태극마검도 꺼낼 정도면, 그냥 아까 갔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가도 내가 찾아가야지. 끌려가서야 되겠나.”
“거참 철저하셔…….”
“너까지 제거해야, 철저하다고 할 수 있겠지.”
휙!
성지한은 그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티아에게 돌진했다.
적멸로는 제거하지 못했지만, 태극마검으로 직접 베면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벌써 죽기엔 좀 억울해서요.”
휙!
그녀는 길가메시를 데리곤, 무신의 손이 튀어나온 균열로 몸을 던졌다.
스스스…….
그러자 순식간에 닫히는 공간의 틈새.
“그래도 정 죽이고 싶으면, 이리로 오셔요~”
균열 속의 피티아는 히죽 웃으면서, 성지한에게 손짓했다.
날 죽이고 싶으면 같이 여기로 들어오라 이거지.
“허.”
성지한은 혀를 차며, 균열을 향해 태극마검을 던졌지만.
검이 닿는 것보다, 균열이 사라지는 것이 더 빨랐다.
-이브 쨌네…… ㅡㅡ
-저런 애 살려 두면 끝까지 골치 아파지던데.
-그렇다고 저 균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잖아.
-근데 이브면 인류의 어머니 아님?? 왜 이렇게 못 죽여서 안달이야.
-이브 아니래잖아 자기 입으로 ㅋㅋㅋㅋ
피티아가 성공적으로 도주한 걸 보고는, 후환이 될 상대를 못 잡았다고 아쉬워하는 시청자들.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피티아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신안 때문인가. 그녀의 대응이 일반적인 상대보다 반 박자 빨랐어.’
무신의 네 종 중, 동방삭과 아소카는 다른 생각이 있어 보였으며.
길가메시는 도움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사기 계약 때문에 무신에겐 강렬한 적의를 보였다.
이러면 그에게 충성스러운 종은, 피티아 단 하나였으니.
이번에 꼭 그녀를 제거해야 했는데, 아깝군.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지한은 힘을 거둬들이곤, 배틀튜브를 껐다.
호주의 북쪽 섬까지 원정을 온 거치고는, 뭔가 아쉽군.
그가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관리자의 손이 그에게 제안했다.
[본체. 이곳 실험실, 확실히 장악하는 게 어떰?]
“여기서 건질 거 있냐?”
[있어 보임.]
“그래? 그럼 뭐라도 챙기자.”
피티아를 못 잡았으니, 이런 거라도 건져 가야지.
성지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붉은 눈에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무신의 별, 투성.
“죄송합니다, 주인님. 명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황급히 도주했던 피티아는, 무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니다. 성지한의 강함이 상정 외였을 뿐. 너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관대한 말씀, 감사합니다.”
비록 성지한을 투성으로 끌고 오라는 임무는 실패했지만.
피티아로선 할 일을 다 했다.
투성과 연결되는 균열을 만들어, 무신의 손까지 나오게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여기서 성지한이 안 끌려온 건, 전적으로 무신의 손이 태극마검에 의해 제압당해서 그런 거지.
그녀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스스스…….
무신은 지구에서 붕괴되었던 팔을, 다시 재생하며.
왕좌의 아래에서 예의 바르게 서 있는 동방삭을 바라보았다.
[동방삭. 그가 어떻게 태극마검을 저리 잘 다룰 수 있는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검은 제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검에 공허를 품고 있는 걸로 보아, 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마검을 구현한 것 같습니다.”
[파훼법을 알아내도록.]
“알겠습니다.”
동방삭이 깊게 고개를 숙이자.
무신의 시선은, 피티아의 옆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길가메시를 향했다.
[자신이 미끼임을 알아 버린 기분이 어떠한가, 길가메시.]
“네, 네놈……! 나와의 계약을 지키지 않을 셈인가?!”
[계약이라……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걸, 아직도 느끼지 못했나?]
“크윽…….”
길가메시는 이를 악물더니, 무신을 향해 질문했다.
“그럼, 실험실에선 후손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거짓이었냐?”
[그딴 게, 중요한가?]
“……나한텐 중요하다.”
[관리자의 손이 말한 것이 맞다.]
“마,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이런 사소한 것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야…… 아니라고…….”
무신이 그렇게 쐐기를 박자.
길가메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이 인간은 그렇게 씨 뿌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또 후손 타령이야.’
피티아가 그런 길가메시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무신이 손짓을 했다.
[동방삭, 저걸 치워라.]
“죽이면 되겠습니까?”
[아니. 살려는 둬라. 추후 쓸 데가 있다.]
“알겠습니다.”
스윽.
동방삭이 발걸음을 한 번 떼자.
길가메시의 몸이 허공에 둥둥 뜬 채, 순식간에 연행이 되었다.
후사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지, 별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가는 길가메시.
무신은 둘이 사라지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번쩍……!
어둠으로 물든 얼굴에서, 신안을 발동했다.
[피티아, 너도 신안을 발동해라. 예지를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무신의 명에 따라, 이마 위의 신안을 발동한 피티아.
지이이잉…….
두 빛의 눈은 서로 빛을 맞추더니.
둘 사이에서, 더 커다란 백색의 구체를 만들어 내었다.
[성지한은, 나의 대업을 가로막을 변수가 되는가.]
번쩍! 번쩍!
무신의 말에, 대답하듯 반짝이던 백색 구체는.
예지를 시작했다.
지이이잉…….
수많은 화면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피티아는 무신과 함께 이를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변수가 되는군요. 확실히.”
관리자의 손을 이식하고, 얼굴에 공허 처리장을 합치며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성지한.
신안의 예지에서는, 그가 승리할 가능성을 5%까지 측정했다.
제3자가 보기에는 겨우 5%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신께선 0.1%의 변수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나온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5%라니…… 성지한, 성장해도 너무 성장했어.’
피티아가 보기에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질문을 바꾸지.]
스으으으…….
무신의 두 눈이, 하늘을 향했다.
투성의 상공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성좌의 무구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의 손이 그것들을 가리켰다.
[무구의 힘을, 30% 사용해도 변수가 되는가.]
번쩍…….
그러자, 아까 보단 확실히 약해지는 백색 구체의 빛.
화면의 등장 빈도도 훨씬 줄었다.
하나.
‘있긴 있네…….’
성좌의 무구를 썼음에도, 성지한이 이기는 장면이 있었다.
그걸 본 무신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50%…….]
50%에도.
[70%…….]
70%에도.
백색 구체에선, 미약하게나마 빛을 반짝였다.
성지한이 이기는 미래가, 그럼에도 존재하다니.
무신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모든 힘을 사용해도, 그리되는가.]
그리고, 마지막 경우를 상정하자.
번뜩…….
백색 구체는, 단 하나의 화면만을 내보였다.
“이것마저도 있다니……!”
[…….]
피티아는 떨리는 눈으로, 신안의 예지가 드러낸 장면을 바라보았다.
초토화된 투성과, 홀로 서 있는 거대한 거인.
붉은 눈이 가득 몸에 박혀 있는 그는, 적의 일족과 흡사하게 생긴 형상이었다.
“주, 주인님. 한데 이건, 성지한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가 맞다. 적색의 관리자가 되었군.]
성지한이 승리하고, 무신이 패배하는 미래.
그건, 그가 적색의 관리자로 변했을 때가 유일했다.
“그럼…… 이러한 미래는, 가능성이 없지 않을까요?”
피티아는 그걸 보고, 표정이 밝아졌지만.
[아니, 확정적인 미래겠지.]
“……네?”
[관리자의 손이 그에게 들어가 있고. 그는 인류를 언제든지 불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류를 태울 사람 같지는 않은데…….”
피티아가 그러며 말꼬리를 흐리자.
무신의 붉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길가메시와 조금 같이 다녔다고, 우둔해졌느냐?]
“아, 아닙니다……!”
[세상에 그 누가, 적색의 관리자가 될 길을 포기하겠는가?]
무신은 확신했다.
[단지 행성 하나만 불태우고, 인류를 소각하면 될 것을.]
성지한은, ‘쉬운 길’을 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