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34화>
수련장 안.
중절모를 쓴 아레나의 주인은 여기가 자기 집인 것마냥 성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미리 와 주니 일이 편해지는군.”
“설마 여길 또 부수려고 했습니까?”
“그게 제일 빠르잖아.”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와 있길 잘했군요.”
번쩍!
우주 형상의 얼굴에서, 두 별빛이 반짝이고.
[특별 보상, ‘종족 진화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화속성 친화도가 +5 상승합니다]
[힘이 +3 상승합니다.]
[민첩이 +3 상승합니다.]
인류가 받았던 종족 진화 보너스 메시지가 그 앞에 떠올랐다.
“절 부르려던 건, 역시 이것 때문입니까?”
“그래, 화속성 보너스를 너무 대놓고 밀어주더군.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예, 우연은 아닙니다. 제가 선별해 드린 것이지요.”
아레나의 주인은 담담하게, 화속성 보너스를 퍼 준 건 자신이 맞다고 이야기했다.
“대체 왜지?”
“저는 그저 윗분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분의 뜻은 모르지요.”
“윗분의 지시라…….”
아레나의 주인의 위라면. ‘흑색의 관리자’인가.
공허의 일인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성지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다만, 개인적으로 추측을 해 보자면.”
“추측이라…… 뭔데?”
“윗분께서는 인류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걸 도와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면…… 설마 적색의 관리자가 되는 걸 말하는 거냐?”
“예.”
“이상하군. 그동안은 적색의 관리자를 추격하지 않았나?”
“그랬죠. 관리자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그 권한을 반납하지 않고 도망친 적색의 관리자. 그를 붙잡기 위해 시작된 추격이, 이제 ‘인류’ 안에 숨겨진 관리자의 흔적을 발견하며 끝이 나나 싶었는데…….”
탁.
아레나의 주인은 자신이 띄워 놓았던, 진화 보너스 메시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윗분께서는 오히려 적색의 관리자를 도와주는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변덕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화속성 진화 보너스를 계속 부여하다 보면, 인류가 적색의 관리자로 융합했을 때 ‘상시 관리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그러게. 흑백의 관리자만 하고 있는 ‘상시 관리자’가 하나 더 늘어나면, 자신들도 부담 아닌가?”
“음…… 부담이라.”
성지한의 의문에, 아레나의 주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꼭 부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색의 관리자가 상시 관리자로 추가되면, 그와 절대권력을 나누게 되겠지만…… 상시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나누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적색이 상시 관리자가 되는 걸, 싫어하지만은 않겠군.”
“……요즘 같으면,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틀넷에 속한 종족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니까요. 흑백의 관리자께서는 예전부터 업무 과다 상태였습니다.”
업무 과다라.
배틀넷에 포함된 종족 숫자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관리자는 지금 흑백에 녹색.
셋밖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성지한은 손가락을 세 개 피곤, 아레나의 주인에게 말했다.
“그렇게 일이 많으면 관리자를 왜 더 안 뽑는 거지? 녹색은 사리사욕만 채우는 거 같더만.”
“적색이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도망쳐서요. 새로 관리자를 뽑으려면, 적색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뭐, ‘특정 업적’을 달성한 플레이어는 예외 규정으로 관리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워낙 불가능한 일이지요.”
번쩍.
그러면서 아레나의 주인은 눈을 반짝이며 성지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걸 노리는 것 같습니다만.”
“성좌도 안 된 상태에서, 대성좌를 꺾는 것 말인가?”
“예. 토너먼트에서 대성좌를 부르려고 하던데, 그 업적을 깨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레나의 주인의 물음에 성지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색의 관리자도 그렇게 올라온 거라며. 나도 해 보려고.”
“인류를 불태우면 당장이라도 관리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쉬운 길 두고 어려운 길로 가는군요.”
“업적은 깨 줘야지.”
원래는 임시 관리자가 되어서, 인류 모두가 품고 있는 적색의 흔적을 싹 처리하려 그런 것이었지만.
성지한은 대충 그렇게 둘러댔다.
“……뭐 그건 넘어가지요. 어쨌든, 당신과 대화를 나눠보니 윗분의 뜻을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들께서는 상시 관리자를 늘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적색이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도망쳤지만, 그럼에도 그가 상시 관리자로 올라설 수 있으면 이를 눈감아 주려 하시는군요.”
흑백의 관리자가 상시 관리자 늘어나는 걸,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추측이 맞으면, 성지한이 하려는 일은 저 두 절대자의 뜻을 완전히 거역하는 건데.
‘스타 버프도 그렇고, 흑백의 관리자에게서 지금까지 나름 소소한 도움을 받아 왔는데…… 이게 사라지면 내게 큰 타격이다.’
안 그래도 무신 상대하기도 쉽지 않은데, 흑백의 관리자까지 고려하기엔 너무 버거운데.
‘……아, 그냥 불 지르고 끝내?’
흑백의 관리자까지 저렇게 나오면, 임시 관리자도 된다고 한들 인류의 불을 못 없애지 않을까.
그러느니 그냥 적색의 관리자가 돼서 무신이나 두들겨 패고 끝장을 볼까?
성지한이 그렇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무렵.
지이이잉…….
“어, 관리자께서…….”
반짝이던 아레나의 주인의 별빛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일의 수월한 진행을 위해서, 이번에 개입했다고 하십니다. 화속성 진화 보너스와, 무신에게 주어진 가벼운 처벌…… 이 두 가지 항목 모두 그분께서 주도하셨습니다.”
“……앞에 것은 그렇다 치는데, 무신 놈은 왜 도와준 거지?”
“그도, ‘상시 관리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후보라고 하십니다.”
“그놈이?”
무신이 무한회귀로 힘을 그렇게 축적해 두었다고 하더니.
흑색의 관리자가 인정할 정도로, 상시 관리자를 노려볼 가능성까지 얻은 건가.
‘이렇게 되면 내가 완전 걸림돌이네.’
인류를 모조리 불태우면, 상시 관리자를 노려볼 수 있는 ‘적색의 관리자’.
무한회귀로 힘을 축적해서, 상시 관리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무신’.
이 둘을 현재 가장 방해하고 있는 건, 바로 성지한이었다.
“3번째 상시 관리자를 맞이하고 싶은 흑색께서는, 어떻게든 날 치워 버려야겠군그래. 날, 죽이라고 하시나?”
성지한이 보랏빛으로 변한 눈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리 비아냥대자.
“오히려 반대입니다. 성지한님께서 ‘이 물건’만 받으면,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물건?”
스으윽.
아레나의 주인은 자신의 우주 얼굴에 손을 집어넣어, 거기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손에 올려진 것은, 빨간색 버튼이었다.
* * *
보랏빛과 적색이 뒤섞인 철판 위에, 불쑥 튀어나온 빨간색 버튼.
성지한은 그걸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지 이건?”
“아이템 설명을, 한번 보시지요.”
지이이잉.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세계수 점화 장치]
-아이템 등급 : EX
-버튼을 누를 시, 지구의 세계수에서 성화가 피어오릅니다.
-적색의 손을 지닌 상태에만 활성화되며, 손의 주인에게 성화로 흡수한 힘이 모두 귀속됩니다.
-해당 효과는 거리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1회용 아이템입니다.
“……세계수 점화 장치라니. 이게?”
“예, 버튼을 누르면 바로 관리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래요…… 꼭 지구에 안 계셔도 가능할 겁니다.”
적색의 손은 성지한에게 빨리 성화를 태워서, 적색의 관리자가 되자고 꼬드겨 왔다.
하나 백염으로 전 세계를 불태우고, 거기서 성화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은.
사실 인간성을 완전히 놓아야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근데, 이번에 아레나의 주인이 넘겨준 버튼은.
“간편하군그래…… 오른손으로 버튼만 누르면, 모든 게 끝이야.”
“예…… 이것만 누르시면, 바다에 봉인된 세계수를 단숨에 불태울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정말로 간단하게, 상시 관리자로서 승화할 수 있죠.”
스으윽.
그러면서 아레나의 주인은 손을 내밀어, 버튼을 성지한에게 건넸다.
“이걸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계신다면, 다시는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물건을 준 게, 가장 큰 개입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지요.”
“……알았다.”
버튼 하나로 손쉽게 관리자가 될 수 있다니.
드래곤 로드나 태양왕이 본다면 환장하겠군.
성지한은 가만히 이를 지켜보다, 붉은 버튼을 건네받았다.
물론, 왼손으로.
“이걸 건네준 걸 보면, 네 윗분도 무신보단 적색의 관리자가 상시로 올라오는 걸 선호하나 보군. 내가 버튼만 누르면, 적색의 관리자가 승리하는 거잖아?”
“적색의 관리자는 아무래도, 경력직이니까요. 그가 관리자로 있었을 땐 일하기 편했다고 하십니다.”
“……하, 그래. 관리자급에서까지 경력직이 우선인 줄은 몰랐네.”
성지한은 저쪽에서 무신보다 적색의 관리자를 선호하는 이유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경력을 우선시하는 세상의 이치가 우주의 정점에서도 통하는 줄은 몰랐네.
“그럼 이제는, 그쪽에서 지켜만 볼 건가?”
“예. 그. 빨리 와서…… 일 처리 좀 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야기 들으니 더 가기 싫어지는군그래.”
절대자들도 버거워하는 업무량이라니.
대체 상시 관리자들은 어떤 삶을 사는 걸까?
“그럼, 물건도 건넸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스스스…….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아레나의 주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세계수 점화 장치라.”
성지한은 붉은 버튼과 철판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EX등급이 매겨진 일회용 아이템.
보기엔 별거 없어 보여도.
버튼만 누르면, 서해에 봉인된 세계수에서 저절로 불이 지펴지며 전 인류가 멸망하는 미친 물건이었다.
거기에.
‘거리 제한도 없으면, 만약 내가 투성에 소환된 상태에서 이걸 눌러도 힘이 전송된다는 거잖아?’
성화로 얻은 힘을, 거리 제약 없이 받을 수 있다니.
아무리 봐도 이거 성능이 말이 안 된다.
일회용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등급을 EX보다 더 높게 측정해야 할 거 같은데.
‘흠…… 이 철판과 버튼에, 뭐가 숨겨져 있으면 저럴 수 있는 거지?’
성지한은 두 눈을 빛냈다.
흑색의 관리자가 직접 준, 미친 성능의 버튼.
여기에 숨겨진 힘을 분석하면, 뭐 떡고물이라도 얻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흑색의 봉인함도 그러고 보면 EX였지.’
성지한은 흑색의 관리자에게 받았던 또 다른 아이템.
손 보관용 상자, ‘흑색의 봉인함’을 떠올렸다.
[흑색의 봉인함]
-등급 : EX
-흑색의 관리자가 직접 만들어 낸 봉인함.
-그 어떤 존재도 상자가 열리기 전에는, 이곳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스위치보다 성능은 부족해도, 등급은 똑같은 EX였던 흑색의 봉인함.
-하나 적색의 손을 팔에 이식하고 난 이후엔 꺼낼 일이 없었다.
-성지한의 인벤토리에서는, EX급임에도 가장 쓸모없는 물건이었지.
“둘 다 똑같은 EX인 게 신기하단 말이지…….”
성지한은 그리 중얼거리면서, 인벤토리에서 흑색의 봉인함을 꺼내 보았다.
그러자.
스스스스…….
버튼의 철판 색깔이, 마구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곳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공허의 기운.
“……호오.”
그냥 등급이 같아서 꺼내 본 건데,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이지?
‘한번 엮어 볼 필요가 있겠는데.’
성지한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