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52화>
[나, 봉인 깸.]
적색의 눈동자 위로, 떠오르는 글자.
아소카의 봉인, 적색의 손이 깨 버린 건가.
‘아까 피티아의 얼음을 녹일 때, 제대로 자극을 받았나 보군.’
이놈 깨어나면, 인류를 성화로 불태우자고 자꾸 이야기할 텐데.
또 피곤해지겠군.
성지한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태연히 말했다.
“지금 적멸 쓸 건데, 잘됐네. 도와라.”
[적멸을? 왜 씀?]
“저거 막아야지.”
스으윽.
성지한의 창끝이 향하는 하늘 위에는.
무신이 소환한 검은 소용돌이와, 그 안에서 수십의 손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적멸이나 태극마검 급의 공격이 아니면, 퇴치하기 힘든 무신의 손.
[무신이 본체를 납치하려는 거임?]
“그래.”
[알겠음. 돕겠음.]
화르르륵!
성지한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관리자의 손.
그가 합세하자, 봉황기의 불길이 더욱 강해지고.
적색권능赤色權能
적멸赤滅
붉은빛이 곧,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치이이익……!
그러자, 하나둘씩 소멸하기 시작하는 무신의 손과 팔.
-역시 적멸인가.
-무신의 손도 저건 이겨 낼 수 없군.
-이렇게 보면 참 탐이 나는데 말이야…… 적색 관리자의 손.
-하지만 그렇다고 토너먼트에 출전할 순 없잖아? 저자는 드래곤 로드의 아바타도 꺾었으니.
외계의 시청자들은 그런 적멸을 보면서 욕심은 내면서도, 토너먼트를 참가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성지한이 드래곤 로드의 아바타를 쉽게 제압하는 걸 봐 버렸으니까.
그리고.
성지한의 적멸이 손을 깡그리 다 태워 버리자, 이를 예상했다는 듯 채팅이 올라왔다.
-무신도 별거 없네.
-하기야 강해 봤자 대성좌 급 아니겠어?
-그럴걸? 대성좌라고 소문은 났는데, 자세한 정보는 없긴 해.
-그럼 드래곤 로드와 뭐 엇비슷하겠네, 납치는 실패할 듯.
-이미 손 다 타오름 뭘로 납치해;
무신 쪽에서 바벨탑을 소환하고, 이것저것 수를 썼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 납치 시도.
‘바벨탑으로 귀찮을 뻔했지만, 그래도 싱겁게 정리됐네.’
성지한은 선릉의 중앙에 빛 형태로 떠 있는 바벨탑을 바라보았다.
천수강신을 통해 역으로 장악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지배하에 있다고 보기엔 애매한 탑.
‘이거나 연구 좀 해 봐야겠군.’
그러고 보니, 여기 안에 길가메시 있던 거 같은데…….
이놈은 어떻게 처리하지?
성지한이 그렇게 차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본체.]
삐빅.
성지한의 손등에서, 문자가 떠올랐다.
[내 봉인, 한동안은 상당히 강력했지만. 본체가 드래곤 로드에게서 적을 강화한 이후에는 많이 헐거워졌었음.]
“그래?”
[비록 눈도 못 뜨고, 메시지도 작성할 수는 없었지만. 본체가 행한 일들은 대강 파악이 가능했음.]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이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거지?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나 봤음. 스위치.]
“스위치라면…….”
[버튼 누르면, 세계수를 점화하는 규격 외의 아이템.]
세계수 점화 장치를, 봉인된 상태에서도 파악한 건가.
[왜 안 누름?]
“그건…….”
[누르면 끝임. 관리자 될 수 있음. 특히나, 그런 아이템은 흑백의 관리자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제조가 불가능함. 흑백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건 우리를 상시 관리자로 올라와도 된다고 용인한 거나 다름없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근데 왜 안 누름? 지금도 인벤토리에서 왜 썩고 있음?]
왜 썩긴.
버튼 누르면 인류는, 가족 포함해서 모두 싹 다 불타오르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관리자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지.
성지한은 굳이 이를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나는 본체가 관리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함.]
관리자의 손은,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화르르륵…….
성지한의 오른손이, 제 스스로 불타더니.
“적의 권능이여. 주인의 명을 따르라.”
그 안에서.
지금처럼 메시지가 아니라, 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성지한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스탯 적.
“너…….”
성지한은 내부에서 요동치는 적을 나름대로 컨트롤하려고 했지만.
관리자의 손이 실제로 음성을 내며 명령한 것이 더 우선시된 건지, 적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스…….
성지한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체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하늘의 균열.
무신의 손이 모조리 타오르고, 검은 소용돌이만 남아 있는 장소였다.
“설마…….”
“본체가, 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곤, 깨달았음.”
“뭘…… 깨달았다는 거냐?”
육체의 통제권은 손에게 다 빼앗긴 게 아니라서, 몸을 움직이고 입을 열 수는 있었지만.
성지한의 제어보다, 몸이 하늘 위로 날아가는 게 더 빨랐다.
이때만큼은, 무혼도 공허도.
죄다 내부의 스탯 적과 부딪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본체가 지금까지 살 만해서 그런 거임.”
“……뭐라고?”
“지금 만나는 적이라 해 봤자, 현재의 힘으로도 충분하니 굳이 버튼 누를 생각이 안 들었겠지. 진짜 위험에 처해 봐야, 관리자의 힘을 얻고 싶어질 거임.”
“그래서 지금 나를…….”
스윽.
성지한은 위를 바라보았다.
검은 소용돌이 안에서, 어느새 생성된 무신의 손이 황급히 그를 잡으려고 뻗어 오고 있었다.
“투성에 밀어 넣겠다는 거냐?”
“맞음. 극한 상황에 처해 봐야 함. 본체는.”
콰직!
손의 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잘해 주었다!]
성지한의 몸이, 무신에게 붙들리곤.
슉!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아니 시발…….
-뭐야 갑자기 배신 때림??
-관리자의 손이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ㅡㅡ;;;;
-아, 뭐야 방송 끝난 거야? 이렇게 끝??
-무신한테 납치당하다니…… 어떻게 해요!!
여느 때처럼 성지한의 힘으로, 상황이 정리된 줄 알았는데.
관리자의 손이 벌인 일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인류에게는, 이미 성지한은 무적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이미지여서 그런지.
그가 손의 배신으로 무신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자, 패닉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방송이 종료되면, 성지한 사망한 거 아니냐.
성지한 없으면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거냐.
당장 스페이스 리그에서 위치한, 최상위권 자리부터 유지 못하지 않냐.
사람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서 성지한 납치 소식이 속보로 떠오르고 있을 때.
-오, 화, 화면 나온다.
-어…….
-여기, 뭐야?
어두컴컴했던 성지한 채널에서, 다시 영상이 재생되었다.
“하…….”
화면에서 처음 들리는 건, 성지한의 한숨 소리.
그리고 바로 비춰지는 화면은, 황량하게 펼쳐진 회색 대지와.
-어. 여기 뭐야 하늘 없고 바로 우주 공간인데…….
-근데 위에 뭐가 둥둥 떠 있음; 저건 뭐야?
-무기인가? 종류 다양하네.
대지의 위편 저 멀리에 둥둥 떠 있는, 성좌의 무구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전 인류 뿐만이 아니라.
-여기가 무신의 별, 투성인가…….
-무기는 성좌의 것 같은데. 무신은 성좌를 죽이고, 무구를 강탈하는 거로 악명이 높지.
-아니, 근데 저렇게나 많은 성좌를 무신이 죽였다고?
-아무리 무신의 무리가 악명이 높다 해도, 그 정돈 아닌데.
외계의 시청자들까지, 투성의 면모를 살펴보게 되었다.
성좌를 사냥하고, 무구를 강탈했다기엔, 많아도 너무 많은 성좌의 무구 개수에 그들이 의구심을 품을 무렵.
스스스…….
성지한의 앞쪽에서.
어둠에 가려진 무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자의 손이여. 왜 협조를 하다 말았지?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내 손에 그대로 잡힌 채였는데.]
화르르륵!
그러자 또다시 불타는 오른손.
“나는 어디까지나 본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싶었을 뿐이니까. 네게 갈 생각은 없음. 이건 버튼 누르라는 충정임.”
“닥쳐, 이 새끼야.”
충정 같은 소리 하네.
성지한은 이클립스를 꺼내곤, 자신의 손등을 그대로 찔렀다.
그러자, 금방 꺼지는 불.
“안 그래도 이제 반항할 힘은 없었음. 본체…… 쉬운 길로 갑시다. 상시 관리자, 되어야 하지 않겠음…….”
관리자의 손은 그렇게 소리를 내더니.
다시 봉인되었을 때처럼,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스탯 적도 다시 성지한의 컨트롤 하에 들어왔다.
‘……이 미친놈이 대형사고를 쳤군.’
피티아.
왜 팔을 얼렸나 했더니, 신안으로 이런 미래까지 내다본 거였나.
성지한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배신한 관리자의 손은 힘을 다 썼는지 활동이 정지된 상태라, 기존의 능력은 모두 회복하긴 했지만.
‘하필 투성에서 회복한 게 문제네.’
거기에, 자신을 납치한 무신은.
[동방삭.]
“……예, 무신이시여.”
그의 뒤편으로, 동방삭까지 부른 상태였다.
[협공한다. 성지한을 이 자리에서 무조건 잡겠다.]
성지한을 여기까지 힘들게 납치했으니, 확실하게 끝을 보겠다는 무신.
-아니 시발…… 저기요. 무신이라면서요!!
-무신이 무슨 협공을 하려고 해 진짜 ㅡㅡ
-자기 구역으로 불러 놓고는 다구리를 친다? 이런 게 무의 신…….
-애초에 납치할 때부터 무신 칭호 떼야 했음.
시청자들은 현 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했지만.
무신의 뜻은 확고했다.
어떻게 데려온 성지한인데, 여기서 놓칠 수야 있겠는가.
‘무신과 동방삭이 날 협공한다고?’
이건 좀 심각한 상황인데.
성지한이 온 힘을 끌어올릴 즈음.
[대성좌 ‘태양왕’이 여기가 무신이 있는 곳이냐며, 태양핵을 빨리 꺼내 던지라고 플레이어를 다그칩니다.]
후원 성좌인 태양왕에게서 긴급히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신의 아들인, 무신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태양왕.
일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태양왕의 권능에 무신의 육체가 합친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었기에.
성지한은 저번에 태양핵 사용을 신중하게 검토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뭘 따지냐.’
무신과 동방삭의 협공을 당하게 생겼는데.
태양왕의 의도가 통하고 말고가 대순가.
어떻게든 뭐라도 꺼내서, 이 대치 상황에 균열을 내야지.
“인벤토리.”
성지한이 인벤토리를 말하자마자.
[스위치를 누르려 하는군. 동방삭, 봉인진을 펼쳐라.]
“예.”
무신은 스위치 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구궁팔괘도 소환을 명하곤.
스스스스…….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촤아아악!
성지한이 인벤토리에서 꺼냈던 태양핵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이거, 태산압정이군……!’
혼원신공의 기본공, 삼재무극.
그중 한 초식인 횡소천군이, 무신의 손에서 깔끔히 재현되었다.
다만.
‘오른손까지 베지는 못했어.’
관리자의 손 내구도가 좀 단단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작은 생채기를 낸 데 그친 일격.
정밀하게 아이템만 베려고 해서 그런 건지.
무신이 직접 펼친 태산압정치곤, 위력이 강하진 않았다.
그리고.
[스위치가 아니었군…….]
갈라진 태양핵을 보며, 붉은 눈을 번쩍이던 무신은.
곧 이 물건의 정체를 예측하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것, 태양왕의 물건인가?]
“그래, 태양께서 오신단다.”
태양핵을 꺼내자마자 반으로 갈라져 버렸으니, 솔직히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성지한은 태연하게 블러핑을 걸었다.
그러자.
[이놈…… 끝까지 성가시게 구는구나. 동방삭.]
“네, 무신이시여.”
[태양왕이 침입해 올 수 있으니, 그를 견제하라. 투성의 바깥에서 요격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태양왕이 투성에 오는 것을 경계하는 건지.
무신은 동방삭에게 별의 바깥에서 태양왕을 견제하라고 명하며 그를 내보냈다.
휙!
그 명을 듣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동방삭.
‘태양왕, 네가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이러면 2:1에선 벗어났네.
한결 낫군.
그때까지만 해도, 성지한은 한숨을 돌렸지만.
[……태양왕이 오기 전에, 전력을 다해야겠군.]
전력을 다하겠다고 무신이 선포하자.
그의 몸에서 검붉은빛이 피어오르더니, 위로 치솟았다.
빛은 곧 투성의 상공에 떠 있는 성좌의 무구를 향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닿았고.
화아아아악!
무신의 몸이 거대해지면서.
그의 기운이 크게 증폭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원래의 형태였을 때랑 비교하면.
수십 배,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해진 무신.
‘음…….’
이건…… 너무 강한데?
성지한은 거대화된 무신을 보면서, 근래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극한의 무예에 도달한 동방삭과는 달리.
‘……힘으로 찍어 누르네.’
무신은 그냥, 그간 모아둔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드래곤 로드의 아바타 따위는, 단숨에 찍어 누를 정도로.
‘그래도, 싸워야지.’
어차피 여기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성지한은 전의를 끌어올렸다.
스스스…….
그의 얼굴 반쪽이 공허에 완전히 물들고, 성좌 모드가 발동되자.
[반항하는가.]
성지한의 힘도 크게 증폭했다.
하지만.
‘이거론 부족해.’
그간 사용했던 강화 수단을 모두 총동원한 그였지만.
저 강대한 무신의 힘 앞에는 아직 미치질 못했다.
여기서 제대로 싸우려면, 그간 아껴 왔던 걸 다 끌어 써야겠지.
“초신성을 사용한다.”
성지한은 스타 버프 중, 1번만 사용할 수 있는 초신성까지 쓰면서.
무신과의 전투에,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