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5화〉
성지한은 이드가 띄운 화면을 바라보았다.
배틀넷 접속 해제가 된 후, 최하급 종족이 된 인류.
그간 종의 진화를 통해 누린 혜택이 모두 박탈당하고.
특히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모두 초기화되면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극도로 혼란해진 세상.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상황만을, 화면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여 주고 있었다.
‘날 여기 가두고, 지구에서 저 짓거리를 하고 있었군…….'
배틀넷 초대장을 가지고, 접속을 해제시킨다니.
적색의 관리자, 정말 전투 빼곤 다 잘 하는군.
그건 그렇고.
“아예 대놓고 저러는데…… 흑색은 뭐 하고 있지?”
성지한의 의문에
[그의 도움을 기대하는 거라면,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화면 안에서, 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류와 배틀넷의 연결이 해제된 이상, 흑색은 이곳에 바로 개입할 수 없으니까.]
“네놈에 비해 흑색은 참 제약이 많군 그래.”
[대신 그는 힘을 지니고 있지…….]
백색과 흑색 사이에서 전력 자체는, 정면으로 붙으면 흑색이 이기나 보네.
성지한은 이드의 말에서 그렇게 추측을 하곤, 생각에 잠겼다.
‘세아한테 중절모가 있는 게 지금 당장은 낫군. 하지만 계속 여기서 발이 묶이면 더 답 없는 상황으로 몰리겠지.’
투성으로 무신이랑 적색의 관리자를 끝내기 위해 쳐들어왔는데.
백색의 관리자가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발이 묶여 버렸네.
성지한은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투성 전체를 봉인한 빛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못 뚫어.’
이드는 자신이 백색의 본능이자, 일부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상시 관리자의 힘은 어디 가지 않는 건가.
저 빛의 장막은 지금 힘만으론, 통과할 수 없어 보였다.
[저 혼란은, 결국 네가 야기한 것이다. 단 한 명이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을…… 고통에 찬 인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응. 안 보이는데?”
인류를 핑계 삼아 자신에게 계약서를 내밀려는 이드였지만.
성지한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오히려.
“근데 이상하다? 이 상황, 니네 계획대로 잘 되는 거 아니냐? 왜 자꾸 계약서를 내미는지 모르겠네. 자기 몫까지 떼 주면서 말이야.”
이드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래. 이대로 일을 진행해도, 명계는 구축되겠지. 하나 나는 그 이후를 보고 있다.]
“이후?"
[적색의 관리자는 통제가 쉽지 않은 존재. 그에게는 억제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너와 같은 상극이.]
“……날 그의 견제 수단으로 쓰겠다고?”
[그렇다.] 바로 토사구팽할 각을 보고 있는 건가.
관리자급으로 을라가면 다 저렇게 변하는 건지.
백색과 적색, 녹색 죄다 정상이 없네.
“야. 근데 세아 모자 안 떼고 협력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럴 순 없다.]
“그래? 그럼 결국 모자 떼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네.”
[…….]
성지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이드.
그건 결국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저쪽도, 세아가 필요한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여유로웠다면, 그놈의 모자 떼라고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았겠지.
성지한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러면 더욱, 지구로 발리 가야겠는데.
‘지금 여기서 힘을 더 얻을 만한 변수는 저거밖에 없나.’
스으윽.
성지한은 눈앞의 화면을 치우고, 태극에 빨려 들어가는 뱀을 향해 다가갔다.
‘야. 어차피 죽을 거, 좀 빨리 들어가면 안 되냐?”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서 그런지.
'무신’ 칭호를 붙잡고 있는 뱀.
그런 성지한의 재촉에.
반도 안 남은 뱀의 몸뚱어리에서, 머리가 튀어나왔다.
[……나의 죽음이, 네 힘을 늘리나 보군. 혹시, 무신의 칭호를 원하는 건가.]
“눈치 빠르네.”
[네 기대와는 달리, 그 칭호는 단순히 명예에 불과하다…… 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뱀은 그러면서, 눈을 번뜩였다.
[그런 칭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뭔데?”
[내가 네 몸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
* * *
“……너. 그러니까. 내 몸에 기생하겠다는 거냐?”
성지한이 설마 하며 반문하자.
[그렇다.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 그래…… 벌레 정도 크기면 된다. ‘나’의 의식만 담을 수 있다면.]
당당하게 기생충이 되겠다는 뱀.
“됐고…….”
[받아만 주면, 남은 무구의 소유권을 모두 넘기지.]
“……몇 개 있는데?”
[내가 넘길 수 있는 건, 51개다.]
그 많던 성좌의 무구가 박살 나고, 그거만 남은 건가.
‘그래도 얻으면 확실히 전력은 강화되겠지.’
빛의 장막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지금.
뱀의 꼬드김은, 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동방삭에게도, 빠져나올 수 없는 금제를 걸었던 존재였으니.
저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이기엔, 리스크가 컸다.
그가 잠시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스스스스…….
무신이 다급히 말했다.
[기생에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 단 한 번, 널 물게만 해 달라.]
“물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 물건도 미리 일부, 넘기겠다.]
본체가 계속 태극에 빨려 들어가서 그런지, 먼저 성좌의 무구를 건네겠다는 무신.
“뭐. 일단 무구부터 줘봐.”
성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랑하는 무신이 ‘성좌의 무구 #174’를 양도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방랑하는 무신이 ‘성좌의 무구 #2217’을 양도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창이 여럿 떠올랐다.
성지한이 예를 누르자.
지이이잉……!
허공을 떠다니던, 부서진 성좌의 무구들이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서져서 둥둥 떠다니던 거잖아.
이 거.”
[어차피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힘. 기운은 그래도 상당량 남아 있다…… 그렇지 않은가?]
“흠."
과연 무신의 말대로, 그가 넘긴 성좌의 무구는 막대한 힘을 담고 있었다.
근데 양도받기 전에는, 무구 파편에서 이런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신이 소유권을 양도해야 본격적으로 쓸 수 있었던 건가.
‘이 정도면 힘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쏠쏠히 써먹을 순 있겠는데.’
성지한은 자신과 검붉은 빛으로 연결된 5개의 성좌의 무구를 보곤, 힘을 가늠해 보았다.
부서져서 그런지 계속 기운이 새어 나가곤 있었지만.
일회성으로 쓰기엔, 쓸 만해 보이는 성좌의 무구들.
[어떤가?]
“……괜찮네.”
[그럼, 물어도 되겠는가?]
스으으윽…….
뱀의 몸통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는.
자기 본체가 거의 끝부분까지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다급히 말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
[……아니. 왜?! 힘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
“어. 힘은 필요한데.”
성지한은 검붉은빛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거, 굳이 양도 안 받고도 써먹을 수 있을 거 같거든.”
[뭣…….]
“이렇게 말이야.”
파아앗……!
성지한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피어오르더니.
성좌의 무구의 잔해에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거, 본질적으론 적의 능력을 개조한 거네.”
성좌의 무구와 연결된 빛.
적과 상극인 성지한은, 이것이 지닌 성질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스탯 적을 남겨 두길 잘했군.’
혹시나 해서, 놔뒀던 스탯 적.
이번에 써먹어야겠네.
성지한이 그렇게 성좌의 무구 잔해에 빛을 연결하자.
[적…… 이었는가. 이것도?]
뱀이 이를 보곤,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러면, 그와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진 셈.
“고맙다 야. 저 잔해에 힘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힌트도 주고.”
[……하나, 살려 줄 생각은 없겠지.]
“당연하지.”
슥. 슥.
성지한은 태극을 향해 손짓했다.
“그만 버티고, 이제 가라.”
[아니다. 잠깐…… 내 말을 들어 보아라!]
거래할 것이 사라졌음에도, 무신은 마지막까지 살아 보겠다고 발악했지만.
슈우우욱……!
정방향으로 돌아가던 태극은, 뱀의 꼬리까지 집어삼켰다.
['방랑하는 무신’을 소멸시켰습니다.]
[무신을 쓰러뜨려, 칭호 '무신’을 이어받습니다.]
그러자, 성지한에게 무신이 소멸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무신’ 칭호를 장착하시겠습니까?]
* 주의 - 무신의 칭호는 한 번 장착할 시, 뗄 수 없습니다.
칭호 장착과 이와 관련된 주의사항까지 나타났다.
칭호 슬롯을 1개 차지하는 꼴이 되니, 이렇게 경고 메시지까지 나타난 건가.
“바로 장착해.”
성지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신’의 칭호를 장착합니다.]
[스킬 ‘무극멸신’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무재의 구현도가 올라갑니다.]
무극멸신도 모두 담아내지 못했던 동방삭의 무재가, 보다 선명히 성지한에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스으윽.
성지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신의 칭호로 인해, 한층 더 발전한 무의 재능.
이를 얻은 상태에서, 바라본 세상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와 내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도 달랐던 건가…….'
무신이 성좌의 무구를 양도하기 전만 해도, 힘을 느낄 수 없었던 성좌의 무구에선.
이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숨어 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며 .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빛의 장막은.
벌써 허점을 몇몇 군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은하검흔의 양 끝을 틀어막은 장막은, 확연히 약하다.’
투성을 반으로 완전히 갈라 버렸던 은하검흔.
그 흔적의 끝부분은, 빛의 장막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곳의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좋아. 저길, 뚫는다.’
파아아앗……!
성지한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투성에 떠돌던 성좌의 무구 잔해가 일제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청색의 관리자여. 설마…… 장막을 뚫을 생각인가?]
그러자 이를 보고, 화면을 끄고 다시 나타난 이드는.
입술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리 임시 관리자라 한들, 힘의 차이조차 보지 못하는가? 저건 ‘이드’가 아닌, 백색의 관리자께서 펼치신 장막. 이를 뚫을 수 있는 건, 흑색의 관리자밖에 없다.]
어쩐지 빛의 장막이 너무 강력하다 싶더라니.
저기엔 상시 관리자의 힘이 온전히 들어갔던 건가.
‘확실히, 은하검흔이 닿는 부위가 아니었으면 뚫기 쉽지 않았겠지…….'
그만큼 급이 다른 상시 관리자의 힘.
하나, 성좌의 무구에서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지금은.
저 장막을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뚫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단숨에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여기에 왔을 때와 같은 방법을 써야겠군.
스스스…….
성지한의 뒤에서, 태극이 떠오르고.
흑색의 마검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좋다. 한 번 시도해 보아라. 그래야 격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겠지.]
이 모습을, 이드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지켜보았다.
상시 관리자의 벽에서 절망을 느껴야, 제 주제를 파악하겠지.
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여유롭게 성지한의 행동을 바라보던 그는.
흑색의 마검에, 성좌의 무구에 담긴 힘이 연결되는 걸 보고는 목소리를 달리했다.
[……제법, 하는구나.]
태극마검에 담긴 기운.
그건, 빛의 절대적인 힘을 아는 그로서도 꽤 위협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드는 결국 저 검이 장막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성지한의 육신이, 검에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신검합일身劍合一
심즉검행心卽劍行
파아아앗……!
성지한의 모습이 사라지고.
검이, 은하검흔의 궤적을 따랐다.
빛의 흔적을 향해 질주하는 암검.
그것은, 곧 빛의 장막에 닿더니.
[아니……!]
이를 단번에 꿰뚫었다.
그러자, 투성을 감싸던 빛이 일순간 반짝이는 듯싶더니.
빛의 장막이 차츰차츰 허물어졌다.
[머, 멈춰라……!]
이를 본 이드는, 급히 암검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검은 사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