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쿵쾅쿵쾅!
덜덜덜덜!
심장이 미친 듯 두방망이질을 치고, 손발이 벌벌 떨렸다.
살면서 딱히 죽을 뻔했던 적이 없는 나로서는, 지금 상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르르!
그때,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기사 둘과 시종 넷이 황급히 달려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정작 가까이 다가와 내 상태를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왜?
화풀이 당할 게 두려웠으니까.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폭군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할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성의 소유자.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다 싶으면 귀싸대기부터 후려치는 건 기본.
조금만 화가 나도 채찍을 마구 휘두르기 일쑤.
거기에 더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기어코 피를 보고야 말았다.
예를 들면… 정원을 산책하던 중 벌에 쏘였다는 이유로 정원사를 벌이 가득 든 상자에 집어넣고 쏘여 죽게 만들거나.
혹은 면도를 해주다가 실수한 이발사의 양 손목을 잘라버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일 뿐.
오토가 저지른 패악질과 악행들은 하도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는 것도 입이 아팠다.
그러니 바로 곁을 지키는 이들조차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할 수밖에.
눈치만 보면 다행이게?
악행을 저지른 만큼 업보도 쌓이는 법.
영지에는 이 캐릭터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렇다는 말은….
‘사방이 적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애써 정신줄을 붙들었다.
굳이 <지지리도 못난 놈> 저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캐릭터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칼을 맞을지 모르는….
“저어… 영주님.”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없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예…?”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순간.
“히, 히익?!”
괜찮냐고 물었던 기사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다른 이들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라서 그런 거겠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토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왔는지 새삼스레 체감되었다.
“여, 영주님.”
기사가 다시 물었다.
“샹들리에를 설치했던 자를 찾아내서 참수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천장을 청소했던 청소부의 사지를 잘라다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절대로.”
“예에? 그럼 어떻게….”
“누구도 처벌할 필요 없어요. 별일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죠. 좀… 쉴게요.”
기억을 더듬어 오토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보자.’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 * *
영주인 오토가 자리를 떠난 직후.
“화를 안 내…?”
“고맙다고? 저 인간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개지랄을 떨어야 정상 아닌가?”
그들은 갑작스레 달라진 영주의 태도에 혼란스러워했다.
“쉿. 입조심.”
총대를 메고 오토에게 질문을 던졌던 기사가 그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언제 영주님의 분노가 터질지 모르니 다들 입조심하고 있어라. 잊었나? 재수 없으면 목이 날아간다는 걸?”
수군대던 이들의 입이 놀란 조개처럼 꽉 다물어졌다.
제아무리 악마라도 하루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겠지.
그래, 하루쯤은….
* * *
며칠이 지났다.
침대를 벗어난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게이머 김도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금발의 미남자.
게임 <영지전쟁>에 등장하는 100명의 군주 중 하나인 오토 드 스쿠데리아만 있을 뿐.
‘적응해보자. 별수 없잖아.’
나는 자포자기해서, 그냥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그래,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오토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플레이해봤고, 마침내 최적화된 빌드를 찾아낸 장인[匠人].
나는 내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민심은 흉흉하고. 재정은 파탄 직전이지. 누구 하나 믿을 만한 사람도 없고. 더욱이 내게 원한을 가진 사람만 한 트럭은 넘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괜히 오토로 게임을 클리어한 사람이 내가 유일한 게 아니었다.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내가 연구한 대로, 내가 발견해낸 빌드를 펼치기만 하면 된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뭐부터 해야 할까.
‘렙업은 당연히 무시해야지.’
레벨이 깡패란 말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나 통하는 개념이지, 이 오토라는 캐릭터는 통용되지 않는다.
-99레벨따리가 렙업은 무슨 렙업?
현실적으로, 레벨을 올려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 자체가 오토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다.
오토는, 특정 시기가 될 때까지는 레벨업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일단 민심부터.’
오토의 초반 플레이는 핵심은, 들끓는 민심을 달래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는 거다.
이오타 영지는 시한폭탄이다.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영지민들과 신하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몰랐다.
아주 작은,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즉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이 일어나면?
끝.
나는 체포될 테고, 성난 반란군들에 의해 단두대에 오를 거다.
그리고 참수된 내 머리통이 성문 위에 내걸릴 테지.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성난 민심을 달래는 게 최우선적인 과제.
‘곧 회의 시간인가?’
이오타 영지에서는 매일 아침 영주 주재로 회의가 열린다.
물론 이 캐릭터는 지난 몇 년 동안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었지만….
‘가자.’
곧장 침실을 나섰다.
“영주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 따라붙었다.
* * *
“영주님께서 드십니다.”
시종이 오토의 등장을 알리고.
“방금 뭐라고 했소?”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오.”
어전에 있던 신하들은, 시종의 목소리에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영주가 마지막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게 3년 전.
그런 인간이 아침 일찍 열리는 회의에 발걸음했다는 건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무슨….”
“영주님께서… 회의에 참석하셨다고? 그것도 아침 회의에…?”
신하들이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영지가 망하는 그 날까지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것만 같던 인간이 이렇듯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젊은 기사 카미유는 오토의 등장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안건이 뭐죠?”
옥좌에 앉은 오토가 입을 열었다.
‘미치겠군. 무슨 개지랄을 떨고 싶어서 아침부터 이러는 거지?’
‘뭘 잘못 처먹었나? 한 며칠 침실에만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 한단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당혹스러워하는 신하들.
“갑자기 그걸 물어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영주가 회의의 안건을 궁금해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그건….”
카미유는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오토는 그런 카미유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궁금해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소리치고 싶은 거겠지.’
카미유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원래 평민 출신의 고아였는데, 전대 영주의 은혜를 입어 기사까지 된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는 영주를 대신해 이오타 영지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기도 했다.
그마저도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적으로 돌변했을 때는… 가장 무서운 인물이지.’
만약 영지의 민심이 더 하락하면 참다못한 카미유가 영주인 오토를 직접 베어버리고, 자결해버린다.
충성을 맹세한 군주를 죽인다는 건 기사로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위이기에….
“그냥 진행해. 난 지켜보기만 할 테니까.”
“…예.”
불편한 회의가 시작되고.
“굶주림에 지친 부부가 딸아이와 함께 목을 매달고….”
“서쪽 숲에서 몬스터들의 출몰이 잦아졌습니다. 간밤에 외곽 초소 중 하나가 습격을 당해 병사 넷이….”
“소룬 영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이다. 우리 영지와 가까운 지역에서 잦은 군사훈련이 감지되었소.”
상황은 최악이었다.
‘역시 개판이네.’
현재 이오타 영지의 상황은 오토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상황이 이렇습니다.”
카미유가 오토를 돌아보며 말했다.
봐라, 니가 말아먹은 영지가 이 모양 이 꼴이다.
…라고 말하는 듯이.
“우선.”
오토가 입을 열었다.
“비축해놓은 식량을 풀어서 굶주린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그 순간.
‘식량을… 뭐?’
‘방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신하들은 오토의 명령에 혼란스러워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갑자기 구휼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며.”
“재정이 빡빡합니다. 지금 식량을 풀었다간 영지가 파산할지도 모릅니다.”
“파산보다 사람 목숨이 먼저야. 산 입에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그깟 파산이 대수야?”
“영주님….”
“기사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명령이야. 풀어.”
“명령…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때.
“아니! 영주님!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나타나 딴죽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