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끄, 끄어어어….”
오토는 코앞의 검 끝을 바라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금만 더 깊었어도 검이 얼굴을 꿰뚫었을 터.
주르륵….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이 쥐새끼 같은 놈. 네놈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다.
나즈락이 틈바구니로 몸을 집어넣었다.
“으아악!”
오토는 나즈락을 피해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치면서 더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돌무더기 속은 더 좁아졌다.
“헉?”
오토는 자신의 등이 돌덩이에 닿은 걸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더 도망칠 곳은 없었다.
- 흐흐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나즈락.
‘여, 여기서 끝인가….’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경험해본 적 없는 돌발 상황이었다.
게임에서 언데드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끄는 것까지는 여러 번 해봤다.
하지만 이렇듯 언데드 몬스터에 빙의한 나즈락이 직접 쫓아온 적은 없었다.
여기 이 세상이 결코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증거였다.
‘여기서… 죽는 건가….’
그때.
‘저거다!’
오토는 눈에 흔들흔들 위태로운 돌덩어리가 들어왔다.
‘제발… 제바아아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흔들리는 돌덩이를 발로 힘껏 차 보았다.
와르르르르!
그러자 돌무더기가 내려앉으며 나즈락을 덮쳤다.
그 결과.
- 크아아아아악!
돌무더기에 깔린 나즈락이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오토를 거의 잡을 뻔했건만….
- 어떻게든 죽인다… 이 비열한 배신자…!!!
나즈락이 오토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휙! 휘익!
그러나 나즈락의 검은 오토에게 닿지 않았다.
하필 허리부터 하체까지 돌무더기에 깔린 덕분에 더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안… 닿네? 휴우!”
오토는 나즈락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즈락의 말마따나, 자칫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죽나 싶었는데….
- 이 개 같은 사기꾼 놈아! 이리 와라! 이리 오란 말이다! 나는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절대로!
나즈락은 어떻게든 오토를 죽이려고 발버둥 쳤지만, 불행히도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하반신이 깔린 상태에서 검을 휘둘러 봤자 허우적거리는 꼴밖엔 되지 않아서, 오토에게 닿는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 이리 오너라! 이리 와!
“싫은데~?”
- 이 개 같은 놈이…!
“죽여 봐~~~.”
오토가 나즈락을 놀려대었다.
“응~ 못 죽이쥬~ 안 닿쥬~ 아~ 무고또 못하쥬우~?”
- 이 개 같은 새끼야!
“대갈통이 비었네. 텅텅.”
오토가 허우적거리는 나즈락의 머리통을 발로 툭툭 찼다.
- 이… 이이…!!!
나즈락은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빙의한 대상이 고위급 언데드 몬스터인 죽음의 기사라면 이까짓 돌무더기쯤 간단하게 치워버렸을 터.
그러나 해골기사는 이 돌무더기를 들어 올리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니 오토에게 농락을 당할 수밖에….
“미안해서 어쩌냐.”
오토가 히죽 웃으며 나즈락에게 말했다.
“그래도 진짜 고마웠다.”
- 고맙다…?
“니 덕분에 영지 세 개를 꿀꺽하게 됐거든.”
- ……?
“소룬, 라세느, 오르트. 다 내 영지와 경쟁 관계에 있는 곳들이거든. 지리적으로 내가 영지를 키워나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니가 나 대신 그 세 영지를 초토화시켜줘서 일이 쉬워졌다고. 내가 직접 싸우면 너무 번거롭거든. 힘들고.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푼 셈이지.”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맞서 싸우는 대신 이용해 먹는다.
그런 후 단물이 빠지면 기회를 엿보다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게 오토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극한의 이득충.
철저한 계획 아래 오직 이익만을 좇는….
- 이… 비열한 새끼… 감히… 네놈 따위가… 이 나를 이용했다는 건가?
“그럼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언데드 몬스터의 부하가 되겠냐? 생각이란 걸 좀 해라, 생각이란 걸.”
- 이런 개 같은….
“쯧쯧. 언데드라 뇌가 없어서 그런가. 하여간 멍청하다니까. 그러니까 500년 전에도 대책 없이 날뛰다가 토벌당했지. 전략이랑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 네 이놈… 네놈이 이러고도….
바로 그때.
풀썩!
나즈락이 돌연 고개를 떨궜다.
[알림: <살아남아라! 오토 드 스쿠데리아!>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어느새 10분이란 시간이 지난 것이다.
[알림: 나즈락의 시나리오가 삭제되었습니다!]
나즈락은 이제 100인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잃고, 게임 스토리라인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이는 군주가 다른 군주에게 제압을 당하면 벌어지는 현상.
고유의 시나리오와 각종 퀘스트, 혜택 등을 더는 누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카미유가 나즈락의 초상화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이겼어!”
“이오타 만세!”
“만세!”
“사악한 언데드들을 물리쳤다!”
그 증거로, 바깥에서 이오타 영지의 장병들이 승리의 함성을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오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돌무더기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 어떻게… 나가지…?”
조금 전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바람에 입구까지 막혀버려서, 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 갇힌 거야?
* * *
전투가 끝난 후.
“영주님은! 영주님은 어디 가셨나! 아무도 영주님을 못 본 건가!”
카미유는 나즈락의 초상화를 파괴하자마자 오토를 찾았다.
“영주님께서 어디론가 뛰어가시는 걸 보긴 봤습니다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도망치시는 걸 봤었는데….”
병사들은 갑자기 전장에서 사라진 오토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라! 전사자들의 신원도 철저히 확인하라!”
“예! 카미유 경!”
카미유가 장병들을 시켜 오토를 찾았지만, 누구도 오토를 발견하지 못했다.
무너진 돌무더기가 워낙에 깊어서, 나 좀 구해달라는 오토의 외침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철수한다.”
결국, 카미유는 오토를 찾기를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또 무슨 계획이 있는 거겠지.’
오토가 지난 며칠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길 반복해서, 또 뭔가 계획이 있는 줄 지레짐작한 것이다.
“야 이 미친놈들아! 설마 날 버리고 간 거냐! 날 잊은 거냐고!”
오토는 아무도 자신을 구해주러 오지 않자 악을 써대며 분노를 토해내었다.
그러나 군대가 철수한 덕분에, 꼼짝없이 돌무더기 안에 갇힌 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후 3일이 지나고.
“사, 살려줘… 나… 여기 있다고… 살려줘… 제발….”
“영주님! 거기 계십니까!”
“여기… 있다고… 살려줘… 제발….”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다! 여기!”
오토는 카미유가 보낸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어 무사히 이오타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토가 3일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카미유가 구조대를 파견해 나즈락의 본거지를 다시 한번 수색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살아남아서 이오타 영지에 복귀하게 된 오토는,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카미유를 만났다.
그리고 서운한 마음과 배신감을 카미유에게 퍼부어대었다.
“이 배신자.”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영주가 사라졌는데 그냥 가버렸잖아.”
“그, 그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지? 아닌가? 이참에 그냥 실종되길 바랐던 거 아냐?”
“절대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버리고 간 건 맞잖아.”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소오옹? 죄송하면 기사 생활이 끝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지 마. 짜증 나.”
“…예.”
“내가 죽거나 실종되면 영지를 꿀꺽하려고 그랬나?”
카미유는 ‘망하기 직전인 시골 영지 따위, 공짜로 줘도 안 가집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런 거 아닙ㄴ….”
“어쭈?”
오토가 눈을 부라렸다.
“아닙니다 하지 말라 그랬지? 짜증 난다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도 하지 마. 그게 더 짜증 나니까.”
오토는 거의 2시간 동안이나 카미유를 갈궈대었다.
3일 동안 돌무더기에 갇힌 채 쫄쫄 굶고, 추위에 벌벌 떨었던 걸 생각하니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 * *
갈굼이 끝난 후.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오토가 카미유에게 물었다.
카미유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즈락의 초상화를 지키는 수호자 몬스터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오히려 좋습니다.”
“왜? 오래간만에 몸 푼 기분이고 그래?”
오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힘든 전투를 겪으면서 검술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도 얻은 거 같고?”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카미유가 깜짝 놀라 오토에게 물었다.
“다 아는 수가 있어.”
“……?”
“내 눈엔 다 보여. 후후후.”
카미유는 나즈락의 초상화를 파괴하는 임무를 완수하면 레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경험치를 먹고 성장하는 것이다.
“아무튼 잘됐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카미유가 오토에게 보라색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언데드 군주의 초상화를 파괴하고 얻은 물건입니다.”
“아. 맞다. 그거 챙기는 걸 깜빡했네.”
“이 구슬에 대해서 아십니까?”
“알지.”
오토가 보라색 구슬을 받아들었다.
[알림: <파괴의 보주>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아이템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파괴의 보주]
언데드들의 왕국인 불사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나즈락이 지니고 있던 구슬.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다.
타입 : 보석 (구슬)
등급 : 유니크
내구도 : 무한 (∞)
특이사항 : 고대 문헌들을 뒤지다 보면 이 구슬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