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식인황제 카이로스.
공식 설정상 나즈락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는, 한 교단의 수도승 출신으로 대륙으로 3분의 1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황위에까지 오른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륙 통일을 거의 눈앞에 둔 시점부터 지나친 폭정을 휘두르다가, 반란군에 의해 폐위당한 뒤 처형당했다고 했다.
오죽하면 <식인황제>라는 무시무시한 칭호가 붙었겠는가?
훗날 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아르곤이란 인물이 대륙을 통일하고 대제[大帝]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음을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는 참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정말 그 식인황제 카이로스의 유골이 맞는 겁니까?”
“맞아.”
“카이로스의 유골이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게다가 카이로스는 아르곤 대제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카미유.”
“예.”
“평소에 책 안 읽지?”
“제가 말입니까?”
카미유는 오토의 물음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평소 책과 담쌓고 사는 건 카미유가 아니라 오토였기 때문이다.
“혹시 이거 봤어?”
오토가 품속에서 <나이젤로스 사가>란 제목의 책을 꺼내 카미유에게 보여주었다.
“그건 야사[野史] 아닙니까? 정식 역사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바이젠 사가>는 나즈락과 카이로스가 활동하던 시대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역사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동화책에 가까웠다.
그래서 공부를 좀 했다 싶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책이었다.
신빙성 없는 민담과 카더라 통신까지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록해놓아서, 도무지 신뢰하려야 신뢰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카미유.”
“예.”
“정식 역사서와 야사를 누가 정하는 줄 알아?”
“그야….”
카미유가 대답했다.
“쓰는 사람에 따라 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역사는 승자에 의해 써지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정식 역사서에는 카이로스가 아르곤 대제한테 처형당했다고 적혀 있지. 근데 이 책에는 아르곤 대제가 끝끝내 카이로스를 잡지 못했다고 나와 있거든. 이 지역 일대에 숨어들었다가 부상이 심해서 혼자 죽어갔다고.”
“그래서 그 책을 믿으신 겁니까?”
“속는 셈 치고 한번 뒤져봤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한 지 넌 모를걸?’
김도진은 오토 드 스쿠데리아로 <영지전쟁>을 클리어하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었고, 도서관에 있는 책들까지 모조리 읽어보았다.
혹시나 맵 곳곳을 샅샅이 뒤져서 숨겨진 던전을 찾아내고, 그곳에 있는 오브젝트와 아이템을 손에 넣기도 했으며,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고대유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식인황제 카이로스의 유골을 찾아낸 것도 그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영주님의 말씀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유골을 찾는 게 콘도르가 돌아오는 것과 무슨 관계인 겁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 거야.”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이로스의 유골에서 황금으로 만든 가짜 눈알을 빼내 품속에 챙겼다.
“이건 팔아서 맛있는 거 사 먹어야지. 헤헤헤.”
“…….”
“그리고 이건… 조심해서 옮겨야지. 조심조심.”
오토가 기다란 집게로 땅에 널브러져 있던 철퇴를 집어 자루에 넣었다.
“왜 집게를 쓰십니까? 편하게 손으로 옮기시면….”
“만지면 죽어.”
“설마.”
카미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철퇴… 마병 같은 겁니까?”
“정답.”
“안 됩니다. 이런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다 계획이 있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병에 손을 댔다간….”
“걱정하는 일 안 생길 테니까 일단 지켜봐. 알겠지?”
“…알겠습니다.”
결국, 카미유는 고집을 꺾었다.
그간 오토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에도 뭔가 그럴싸한 계획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오토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이번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유가족을 위로하는 등 민생을 살피는 행보를 이어나가며 민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오토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다.
두 달이 넘도록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였더니, 영지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건 이곳 오르트 영지의 영지민들이 오토의 폭정을 경험해보지 않아서인 것도 있었다.
라세느 영지와 오르트 영지 사람들은 오토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했지, 직접 겪어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본진인 이오타 영지와 앙숙이었던 소룬 영지의 사람들은 아직도 오토를 매우 싫어했고, 믿지도 못했다.
그래서 오르트 영지와 라세느 영지의 민심은 조금이나 올라가고 있는데, 이오타 영지와 소룬 영지의 민심은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민심은 올라간다. 차근차근하면 돼.’
오토는 영지민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내린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콘도르의 역습> 이벤트가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 밤.
“슬슬 올 때가 됐네.”
오토가 부지깽이로 벽난로를 쑤시며 혼잣말했다.
“뭐가 온다는 겁니까?”
밤늦게 특이사항을 보고하러 온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콘도르 말야.”
“그가 정말로 다시 옵니까?”
“엄청나게 강해져서 돌아올 거야. 무시무시하게.”
“그래서 식인황제 카이로스의 철퇴를 들고 싸우시려는 겁니까? 설마?”
“그렇지.”
“차라리 제가 싸우겠습니다.”
카미유가 의지를 내비쳤다.
“영주님께선 마나도 다루지 못하시잖습니까. 그런 마병을 잡았다간….”
“카미유.”
“예?”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난 괜찮아.”
“하지만….”
“생각을 해봐.”
“어떤 생각 말입니까.”
“만약 형이 철퇴를 들고 콘도르를 물리쳤다고 치자.”
“예.”
“그럼 형은 누가 제압할 건데?”
“……!”
“내가? 아니면 우리 기사들과 병사들? 마병을 잡고 폭주한 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야 당연히….”
“하지만 나라면 얘기가 다르지. 나는 약하니까. 내가 아무리 폭주해봤자 얼마나 폭주하겠어? 적어도 형이 폭주하는 것보단 약할 거 아냐. 안 그래?”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형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뭡니까?”
“그건 그때 가서 말해줄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부지깽이로 벽난로 속 모닥불을 들쑤셨다.
“아까부터 왜 자꾸 벽난로를 들쑤시십니까?”
“춥잖아.”
추수를 앞둔 계절.
슬슬 바람이 싸늘해진 터라 밤에는 벽난로를 켜고 자는 게 필수였다.
“그리고….”
오토가 부지깽이로 벽난로를 뒤적여 시커먼 숯덩이 같은 걸 꺼내 입으로 호호 불었다.
“날 추워지면 군고구마가 제맛이지. 이게 얼마나 달달하고 맛있는데.”
“…결국, 그거였습니까.”
카미유가 못 말리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 * *
하루가 지났다.
쏴아아아아!
차가운 가을비가 세차게 퍼부어대는 날이었다.
“이번 비가 그치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겠네그려.”
“그러게 말일세. 걱정이구먼. 올겨울은 좀 따뜻해야 할 텐데 말이지. 작년 겨울이 너무 춥지 않았나.”
“그래, 그랬지.”
오르트 영지의 성문 앞을 지키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늘 그렇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저벅저벅.
로브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자가 성문을 향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병사들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를 세웠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요. 신원을 밝히시오.”
“나는.”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대답했다.
“이 땅의 정당한 소유자이니라.”
“그게 무슨 소리요?”
남자의 신원을 확인하려던 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땅의 정당한 소유자라니? 그대가 영주라도 되는 줄….”
그때.
촤라락!
후드를 눌러쓴 자가 번개처럼 검을 휘둘러 질문을 던진 병사를 두 동강 내버렸다.
“이런 미친놈이!”
“어딜 칼부림이냐!”
놀란 병사들이 창을 움켜쥐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를 포위했다.
“충성을 저버린 자들에게는… 죽음뿐이겠지.”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검을 휘둘러 성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기에 이르렀다.
“히익?!”
살아남은 병사는 단 하나.
그 병사는 공포에 질려 주저앉은 채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한바탕 살육을 벌인 그 남자가 마침내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그러자 콘도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비록 피부가 거무죽죽한 보라색으로 물들고,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콘도르의 얼굴이었다.
“허억…?! 여, 영주님…?!”
살아남은 병사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라.”
콘도르가 살아남은 병사에게 말했다.
“가서, 내가 돌아왔음을 알려라. 이 땅의 정당하고 진정한 주인. 오르트 영지의 영주가 돌아왔음을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병사는 너무나도 놀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 * *
“영주님!”
카미유는 보고를 듣자마자 곧장 오토를 향해 달려갔다.
“왔어?”
“성문 앞부터 지금까지… 대학살을 벌이며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앞을 가로막았던 이들 중 누구도 살아남은 이가 없답니다.”
“그냥 막지 말라고 해. 막아봐야 개죽음일 뿐이야. 그냥 길 터줘.”
“그럴 것 같아서 막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놓긴 했습니다.”
“잘했어.”
“이제 어쩌실 겁니까?”
“가야지.”
오토가 철퇴가 든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겠어?”
오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두근두근.
솔직히 무서웠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후 사람이 죽는 걸 눈으로 봤고, 전쟁에서 참여해 봤지만,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일대일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안 괜찮아도 해야지.”
“영주님….”
“이 일은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내가 해야 돼.”
콘도르를 막지 못하면 죽는 건 오토뿐만이 아니었다.
<콘도르의 역습>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란 문구와 함께 화면이 회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떠오른다.
복수에 성공한 콘도르는 영지를 되찾자마자 영지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며 폭정을 휘둘렀다.
1년 후.
콘도르는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콘도르의 육체를 지배하게 된 악마는 이곳 오르트 영지에 지옥의 문을 열었다.
그 후 악마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세상을 휩쓸고, 마침내 대악마가 강림하니 세상은 오직 비탄과 절망만이 가득한 지옥이 되었다.
위 글귀는 콘도르의 공략법을 찾아낼 때까지 수도 없이 보았던 것.
즉, 콘도르를 처치하지 못하면 이 세계마저도 멸망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오직 오토뿐.
‘총대 메는 건 딱 질색인데.’
그러나 총대를 떠넘길 사람도 없으니, 직접 제 발로 뛰는 수밖에.
“왔군.”
밖으로 나가보니 콘도르가 비를 맞으며 오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되는 거지?”
“저 모습은… 영주님의 예전 모습이 아니야!”
“이제는 우리 병사들까지 다 죽여 버리다니….”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건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윽.
오토가 자루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오싹!
철퇴의 손잡이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전해져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에 잠긴 느낌이랄까?
“으으으!”
꽈악!
오토는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이를 악물고 철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각성 전 콘도르를 처치할 방법은 오직 <식인황제 카이로스>의 철퇴를 사용하는 것뿐이었으므로….
“쿨럭, 쿨럭쿨럭!”
철퇴로부터 전해진 한기와 세차게 쏟아지는 비 덕분에 기침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때.
- 누구인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