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라그나시스[Ragnasis].
그리고 그 뜻은… 세계대전!
전 대륙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대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의미였다.
“라그나시스… 라그나시스라….”
와지르가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런 와지르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감히 말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라그나시스가 벌어지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다는 모르겠죠.”
…라고 말하긴 했지만 오토는 라그나시스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게임 <영지전쟁>을 플레이하면서 숱하게 경험해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는 오토만큼 라그나시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륙에는 단 하루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날이 없을 겁니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가 바다를 이루겠죠.”
“이노옴…!”
“민간인들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최소 억 단위. 대륙 인구의 30퍼센트. 심하면 50퍼센트까지도 죽어 나갈 겁니다. 그리고 끝내 새 시대가 열릴 겁니다. 세계대전에서 최종 승자가 된 자가 주도하는 세상이 되겠죠.”
“무슨 근거로 그따위 음모론을 펼치느냐?”
“음모론이라고 말씀하시면 좀 섭섭한데요.”
오토가 앞에 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곧 아라드 제국이 무너지면, 강대국들의 주도하에 전쟁이 벌어질 텐데?”
“……!”
“그리고 그 전쟁은 곧 대륙 전체로 번져나갈 테죠.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통제가 사라지는데, 세상이 얌전히 돌아가겠습니까?”
“나를 납득시키려면 더 자세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근거는 얼마든지 댈 수 있죠. 그게 그러니까….”
뒤이어 오토의 입에서 왜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발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발언들은 모두 사실이기도 했다.
게임 <영지전쟁>의 시나리오 자체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대전은 반드시 벌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놈이…?!’
와지르는 오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설득되어 갔다.
사실 오토가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와지르가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륙의 정세에 밝은 와지르는 어쩌면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바다 너머 북쪽 툰드라 대륙도….”
“잠깐.”
와지르는 오토의 말을 자르고는, 시녀를 시켜 독한 위스키를 더 가져오게 했다.
“내 입맛을 만족시키기엔 형편없는 싸구려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마실 만하군.”
“제 이야기가 좀 들을 만하십니까?”
“더 해보아라.”
“얼마든지 해보죠.”
그렇게 오토와 와지르의 대화는 그로부터 3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 결과.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와지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오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그런 통찰력을 지닌 것이냐?”
“저요? 그냥 시골 깡촌 왕국의 국왕일 뿐이죠. 보시다시피.”
오토가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좀 거창하게 말씀드리면… 다가올 세계대전에 대비하는 사람. 딱 그 정도로 해두죠.”
그 순간.
띠링!
오토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와지르 폰 바실리>의 등용에 성공하셨습니다!]
* * *
‘허허! 이런 시골 깡촌에 이런 무서운 통찰력을 지닌 자가 존재했을 줄이야!’
와지르는 오토의 음모론 아닌 음모론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오토의 예상은 너무나도 설득력 있고, 또 그럴싸했다.
게다가 와지르가 지니고 있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공감도 많이 되었다.
“카미유에게 말씀하셨죠. 이곳에는 미래가 없다고. 그럼 제가 대공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이 땅에 미래가 없어 보이십니까?”
와지르는 오토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무서운 통찰력을 지닌 놈이 군주로 있는 곳이라면… 앞날은 어둡고 싶어도 어두울 수가 없을 터.’
오토가 와지르에게 다시 말했다.
“이곳은 도화지 같은 곳이죠. 때 묻지 않은 하얀 도화지. 다가올 세계대전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고요.”
“그 말은… 나를 등용하겠단 말이냐?”
“그러고 싶습니다.”
오토가 씩 웃었다.
“참 매력적인 일자리 아닙니까?”
“뭐가 매력적이란 말이냐?”
“여태 여러 강대국에서 일해보시기는 했지만, 이런 시골 깡촌을 일으켜 세워보신 적은 없잖아요.”
“음!”
“만약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운 그 시골 깡촌이 장차 대륙을 통일하고 새로운 세상을 주도하게 된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그러자 와지르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젊은 날 정치·행정·외교에 대해 공부하며 큰 뜻을 품었던 그때 그 시절처럼….
“어떠세요? 저와 함께 일해보시지 않으실래요?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좋다.”
와지르가 오토의 제안을 승낙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죠.”
“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네놈이 나를 실망시킨다면….”
“미련 없이 떠나셔도 좋습니다.”
오토는 자신만만했다.
왜?
와지르가 실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 *
“다가올 전쟁은 기술의 발전에 주목해야 해요.”
“그 말은… 앞으로 벌어질 전쟁이 지금까지의 전쟁이랑은 다를 것이라는 겐가?”
“바로 그거죠.”
“오호라?”
“새로운 무기들, 마법들, 그리고 비약적으로 강해진 강자들의 출현하면, 전쟁에 쓰이는 전략 전술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더 말해보게.”
오토와 와지르는 밤늦도록 대화를 주고받았다.
게임 <영지전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오토.
그리고 그 게임 속 등장인물 중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와지르.
이 두 사람이 만나니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드렁… 드르렁…!”
한편, 시녀장 올리브는 초저녁부터 만취한 덕분에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침을 질질 흘리며 잠들어 있었고.
“…군인은 그저 명령에 따를 뿐.”
고지식한 참군인인 스푸너는 머리 아픈 이야기는 딱 질색이라서, 조용히 자리를 떠나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카미유는….
‘전하께 저런 지식과 통찰력이 있었다니….’
카미유는 오토가 진면목을 드러내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머리가 좀 훼까닥 해서 개과천선하게 되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설마 망나니를 연기하고 계셨던 건가?’
어떠한 이유―사실 그런 건 없었지만―에 의해 오토가 본모습을 숨긴 채 일부러 폭정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사람이 변해도 유분수지, 이 정도면 아예 다른 사람이 들어가 앉아 있다고 해도 믿길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영주님… 어쩌면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카미유는 선대 영주인 오릭스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오토의 변화로 인해 꿈도 희망도 없던 이 땅에 커다란 대격변이 벌어질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 *
세 영웅의 합류로 이오타 왕국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주 다 개판이로군! 제대로 된 놈이 없어! 제대로 된 놈이! 게다가 재정도 개판이고! 행정도 엉망이야! 그간 업무들을 어떻게 처리한 게야!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와지르는 국정 운영을 시작하자마자 무시무시한 마왕으로 변신해 행정 관료들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으음! 오늘은 구보하기 좋은 날씨로군! 좋다! 지금부터 여기 있는 놈들 모두 토할 때까지 뛴다! 실시!”
스푸너는 이오타 왕국의 병사들을 인간 흉기로 개조시키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 훈련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기사아아아아아아앙!!!”
“히익?!”
“도대체 언제까지 퍼질러 잘 셈인가! 당장 일어나라! 당자아아아아아앙!”
올리브는 시녀장으로서 국왕인 오토의 쓰레기 같은 생활 습관들을 하나하나 개조해나갔다.
그러자 이오타 왕국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왕국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시골 마을이 제법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토는 점점 더 쇠약해져만 갔다.
1월 1일이 가까워질수록 <지지리도 못난 놈> 저주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몸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은퇴한 늙은이를 데려다가 앉혀놓고 먼저 저세상으로 가려고?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참으십시오, 대공 전하.”
카미유가 분노한 와지르를 뜯어말렸다.
“천재는 일찍 뒈진다더니, 저놈도 뭐 그런 게냐?”
“아닙니다. 저주에 걸려서 저런 겁니다.”
“저주…?”
“사정이 있습니다. 곧 해결될 문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흠… 그렇다면야….”
와지르가 걱정할 정도로, 오토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잘 걷지도 못했고, 하루에 한 번씩은 심장마비를 일으켰으며,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피부는 창백하고 입술이 시퍼렜다.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한 시한부 환자라고 생각할 만큼….
“좀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카미유가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오토에게 물었다.
“저 나무 좀 봐.”
오토가 창밖에 아름드리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잎이 몇 개 안 남았네.”
“겨울이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 잎들이 다 떨어지면… 나도 죽겠지?”
“…예?”
카미유가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봄에 태어나서 여름을 살다 간 저 잎들처럼 나도….”
휘이이이이이!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면서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낙엽들이 우수수! 하고 떨어져 나갔다.
“…….”
오토는 자기가 드립을 쳐놓고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진짜로 뒈지라는 건가…?”
그때.
“크윽!”
오토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마비에 가슴팍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전하!”
카미유가 황급히 오토를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려던 순간.
“누구 멋대로 뒈지려고 그러나!”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온 올리브가 오토를 덮쳤다.
그러더니 그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오토의 가슴팍을 짓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커헉!”
“정신 차려라! 어서!”
“크어어어어!”
“죽게 두지 않는다!”
“끄… 끄어억… 가, 갈비뼈… 갈비뼈 부러ㅈ… 으헉!”
“숨 쉬어라! 숨!”
뒤이어 올리브가 인공호흡을 위해 오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히, 히익?!”
오토는 어떻게든 올리브의 인공호흡을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뇌에 산소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만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게 왜 괜한 소리를 하셔서.”
카미유는 올리브에게 인공호흡을 당하는 오토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놈의 입.
입이 문제지, 아주.
“차라리 정신을 잃으신 게 잘된 일일지도….”
카미유는 그렇게 혼잣말하고는 올리브에게 오토를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1월 1일이 불과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카미유는 급한 마음에 오토를 찾았다.
오토가 자신이 1월 1일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기에,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오토는 다가올 죽음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금… 뭐 하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 화장하잖아.”
오토는 거울 앞에 앉아 올리브로부터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왜 갑자기 화장하십니까? 지금 꽃단장하실 땝니까? 곧 죽게 생겼는데?”
평소 같았으면 오토에게 다 계획이 있겠지, 하고 넘겼을 카미유였다.
하지만 몸도 안 좋은 사람이, 그것도 3일 뒤에 죽을 사람이 메이크업을 받으며 꽃단장이나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수밖에.
“설마 관에 들어가실 거에 대비하시는 겁니까?”
“아니거든? 이것도 다 계획의 일부거든?”
“꽃단장하는 게 계획의 일부가 됩니까?”
“되지.”
“도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미인계.”
“예…?”
“병약 미소년 컨셉으로.”
카미유는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도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