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오토가 막 <무적검법>의 수련을 끝냈을 무렵.
“그래서 몇 년 동안 개망나니 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건가?”
“잠시 방황하셨던 것 같습니다.”
콘라드가 과거 오토의 행적을 다 알면서 물어보았음에도, 말을 아꼈다.
오토가 아무리 얄밉기로서니, 기사로서 군주를 헐뜯을 순 없지 않겠는가?
“역시….”
콘라드는 카미유에게 오토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얼마나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었는지를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예…?”
“좋든 싫든 녀석은 내 피를 이어받는 녀석이다. 우리 쿤타치 가문의 피가.”
“아!”
“저주에 걸려 잠시 방황했다고는 하나, 결국 정신을 차렸던 모양이로군.”
콘라드는 오토가 천하의 개망나니에서 지략이 뛰어난 젊은 왕으로 거듭난 이유를 혈통 때문이라고 여겼다.
쿤타치 가문은 무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명가[名家]인지라, 콘라드로서는 혈통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최근 수십 년 동안은 과거의 영광에 한참을 미치지 못했지만….
“대공 전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카미유는 콘라드의 논리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왜?
카미유조차 오토의 극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확 달라져서, 그토록 뛰어난 지략을 선보인다는 말인가?
카미유는 혈통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었지만, 오토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콘라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위대한 쿤타치 가문의 피가 어디 가겠느냐? 결국 다 드러나기 마련이지.”
“예, 대공 전하.”
“덕분에 잘 들었네.”
콘라드는 카미유와의 대화에 꽤나 만족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콘라드에게 있어 오토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 같은 존재였다.
직계자손이 없는 콘라드로서는 부득이하게 하비에르의 아들 쿠조를 후계자로 지목해야만 했다.
하지만 쿠조가 차기 가주가 되면, 콘라드의 노후가 비참해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지금이야 숨을 죽이고는 있지만, 하비에르는 콘라드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콘라드는 후계자 지목을 미뤄왔는데,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콘라드의 나이가 너무 많다 보니 이제는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으면 쿤타치 가문 사람들과 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지경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오토가 떡하니 나타나 <성역>을 열어버린 이상 이야기가 달랐다.
오토가 조금만 능력을 보여준다면, <성역>을 연 공로도 있으니 차기 후계자로 지목할 명분은 충분했다.
‘예지에 가까운 지략이라… 머리 하나는 타고났단 말이렷다? 단점이라면 약해빠졌다는 것인데… 그건 저주에 걸린 것도 있고…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내 피를 이어받은 녀석이라면 검술과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일 테니.’
카미유가 열심히 영업(?)을 해준 덕분에, 오토에 대한 콘라드의 평가는 꽤나 긍정적이었다.
수집한 정보와 카미유의 증언을 듣고 보니, 오토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녀석이 만약 성역에서 무적황제의 권능을 얻어 나오고… 뒤늦게라도 검술과 마법을 배워서 마검사가 된다면… 나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을 터.’
콘라드는 어느새 오토를 후계자로 점찍어놓고 있었다.
콘라드의 노후가 오토의 손에 달린 셈이었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오토를 밀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 *
‘뭔 개소리야? 5년이라니?’
오토는 카이로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5년 맞다.
‘으응?’
- 넌 여기서 5년 동안 저 깡통 놈과 수련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5일이겠지. 뭔 5년이야.’
- 진짜다.
‘……?’
- 이 홀에 어떠한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하다. 네놈은 여기서 무한히 회복했다. 5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련만 했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심지어 똥오줌도 안 쌌다.
‘그랬다고? 내가?’
- 5년을 수련했으니 저 깡통 놈에게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거다. 5일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터.
‘자, 잠깐만!’
오토는 카이로스의 말을 듣고 아칸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제가 여기서 수련한지 얼마나 됐죠?”
-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5년 정도 지났을 것이다.
“히, 히익?!”
-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 홀은 성역에 든 자를 위해 특별히 안배된 곳. 이곳에서 1년이 지난다 한들 바깥에서는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정말입니까?”
- 믿어도 좋다.
…라고 아칸이 말하긴 했지만, 오토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급히 <성역> 밖으로 뛰쳐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앗! 도련님!”
콘라드의 친위대장은 오토가 고개를 내민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오토에 대한 호칭은 <도련님>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나오시는….”
“얼마나 지났죠?”
“예?”
“제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냐고요.”
오토가 대뜸 물었다.
“오늘로 정확히 5일째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예, 도련님.”
“휴! 다행이다!”
오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성역> 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
“……?”
“……?”
오토의 돌발행동에 황당해하는 친위대원들.
“너는 빨리 대공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라! 도련님께서 잠시 성역을 빠져나오셨다가 다시 들어가셨다고!”
“예!”
친위대장은 이 사실을 즉시 콘라드에게 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짜 5일밖에 안 지났네요?”
- 말하지 않았나. 이곳에서의 1년은 바깥세상에서 고작 하루에 불과하다.
“다행이네요. 5년이나 여기 있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솔직히, 5년 동안 아칸과 대련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저 아칸과 카이로스 둘 다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믿을 뿐….
- 성역에 든 자여. 이곳은 단기간에 무적의 검을 가르치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곳.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곧 느끼게 될 것이다.
“일단 알겠습니다.”
-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칸은 그렇게 말하고는 홀의 정중앙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스스로 돌로 이루어진 석상으로 변해버렸다.
마치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띠링!
그와 동시에 오토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무적검법>을 습득하셨습니다!]
뒤이어 오토의 뇌리에 지난 5년 동안의 수련 과정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아….”
오토는 그제야 자신이 5년 동안 이곳에서 수련했음을 실감했다.
아칸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입력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토가 검성[劍星]의 경지에 오른 건 아니었다.
단지 <무적검법>이라는 완벽한 검술의 기초를 닦았을 뿐.
앞으로 부지런히 갈고 닦으며, 강자들과의 싸움을 통해 강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말 그대로 이제 갓 <입문>을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게임에서는 아칸한테 말을 걸면 검술이 저절로 배워진 거구나.’
오토는 게임과 현실의 차이점을 떠올리며, 이제는 석상이 된 아칸을 지나쳐 <성역>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육체를 개조하고 검술을 배웠으니, 이제는 마법을 배울 차례였다.
고대의 절대자인 무적황제가 사용하던 마법을….
* * *
<성역>은 총 3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마지체>를 이루는 탕.
<무적검법>을 배우는 홀.
그리고 무적황제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마법을 배우는 <권능의 전당>이었다.
<권능의 전당>은 조그마한 광장에 총 다섯 개의 던전 입구가 자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플레이어는 이 다섯 던전들을 클리어할 때마다 무적황제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궁극의 마법들을 하나씩 습득할 수 있었다.
‘보자….’
오토의 시선이 광장 앞에 부채꼴로 펼쳐진 다섯 개의 던전 입구를 쭉 훑었다.
각 던전 입구에는 각기 다른 석상이 하나씩 자리했는데, 마치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생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고대 문자로 쓰인 석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게 맞나?’
오토는 게임과 현실이 일치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석상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게임과 현실의 차이점 때문에 벌서 두 번이나 데였더니,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하게 된 것이다.
무한한 지식의 힘으로.
우선 제일 왼쪽에 자리한 석상은 한 손에 커다란 책을 든 학자였다.
마음의 검을 얻는 자, 신조차도 벨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석상은 두 눈을 안대로 가린 기사의 모습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두 손이 비어 있었다.
자세는 검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
세 번째 석상은 어릿광대 같았는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는 강하게.
적은 약하게.
네 번째 석상은 용맹한 야만용사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포효하는 모습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독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대의 영혼을 빼앗길 것이니.
마지막 다섯 번째 석상은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마녀의 형상이었다.
‘다 맞네.’
오토는 자신이 알고 있던 던전 정보와 현실이 일치하자 미소를 지었다.
- 어이, 뺀질이. 이것들은 다 뭐냐?
‘별거 아냐. 무적황제가 만들어 놓은 일종의 과제라고나 할까?’
- 무, 무적황제?! 짐이 아는 그 무적황제 말이냐?
‘무적황제가 무적황제지 누구야.’
- 맙소사! 그럼, 여기가 무적황제의 무덤이냐?
‘무덤은 아니고. 그냥 유산을 모아놓은 장소?’
- 그럼 네놈은… 무적황제의 힘을 얻으러 온 것이냐?
‘정답.’
- 어떻게 무적황제의 무덤을….
‘영업비밀이라 못 알려 줘.’
- 그럼 네 녀석은 무적황제의 유산을 얻어서 뭘 할 생각이냐?
‘당연히 X나 강해져야지.’
- 강해져서 뭐 하게?
‘살아남아야지.’
- 으음?
‘머지않아서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거야. 그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 그걸 어떻게 장담하느냐? 네 녀석이 예언자라도 되냐?
‘그건 아니고.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것 하나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정도로 해두자.’
오토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가장 오른쪽에 자리한 던전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권능의 전당>에 있는 다섯 가지 던전들은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었다.
한 번에 모든 던전들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두고 레벨을 올라가면서 하나씩 클리어해야 했다.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거기가 초고레벨 던전이라면?
입장 1초 만에 꽥! 하고 죽기 십상!
한 번 들어가면 클리어하기 전에는 나올 수도 없으니,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도 매우 신중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던전 공략에도 순서가 있지. 후후후.’
초고레벨 던전을 클리어할 때, 다른 던전에서 얻은 권능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최적화된 순서가 필요했고, 오토는 그걸 알고 있었다.
물론 각 던전에 대한 공략법 역시도….
오토는 가장 오른쪽에 자리한 5번 던전의 입구 앞에 섰다.
‘할 수 있겠지?’
살짝 망설여지긴 했다.
<권능의 전당>은 아무리 레벨이 낮은 던전이라 하더라도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곳.
두려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신마지체도 이루고, 5년 동안 무적검법도 배웠다. 그러니까 쫄 필요 없어. 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다 아는 던전이잖아.’
오토는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인 <정보>와 <경험>을 믿기로 하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마녀의 석상을 지나쳐 던전의 입구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