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반란군의 승리로 순식간에 끝날 것만 같았던 로샨 왕국의 내전.
그러나 오토의 활약 덕분에 내전은 끝나기는커녕, 더욱 길어지게 되었다.
루이블랑 왕세자가 무사히 반란군을 뿌리치고 펠튼 요새에 도착하면서, 진압군이 반란군을 진압할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펠튼 요새에 주둔해 있던 제1군단은 로샨 왕국의 최정예 부대답게, 빠르게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란군의 수장 알렉스 공작은 엄청나게 분노했다.
“왕세자를… 놓쳤다?”
보고를 받은 알렉스 공작의 표정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반란군에 가담한 귀족들은 알렉스 공작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왕세자를 생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왕세자 일행은 수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최정예 기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고, 측근들 역시 대부분 붙잡히거나 죽었다.
그런 왕세자 일행은 지칠 대로 지쳐있으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때문에, 왕세자를 생포하는 건 시간문제여야만 했다.
하루 이틀 정도 늦어질 수는 있을지언정, 실패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인은 말이다.”
알렉스 공작이 귀족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왕세자가 수도를 탈출한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완벽할 순 없는 법. 그저 왕세자에게 천운이 따라준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왕세자를 완전히 놓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알렉스 공작이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비숑.”
“예, 여기 있습니다.”
평소 알렉스 공작의 총애를 받던 기사 비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가 이번 작전을 지휘했다지?”
“그, 그러하옵니다.”
“이번 작전의 실패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알고 있나?”
“그것은….”
“왕세자를 놓침으로 인하여, 본국은 내전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전쟁이 불가피해졌다는 이야기다.”
“알고 있사옵니다.”
“전쟁의 참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터. 네놈이 실패한 작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흐를지 상상이나 해보았나?”
“전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용서를….”
그 순간.
촤락!
알렉스 공작의 검이 마치 번개처럼 번뜩였다.
툭!
데구르르르….
비숑의 머리가 어전 바닥을 나뒹굴고.
푸화아악!
머리를 잃은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털썩!
비숑의 몸뚱이가 쓰러졌다.
한때는 알렉스 공작의 총애를 받는, 그야말로 촉망받는 기사였건만….
비숑의 죽음으로 인해 어전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
“…….”
“…….”
귀족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혹시나 분노한 알렉스 공작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목이라도 달아날 수도 있었기에….
신하들의 예상대로, 알렉스 공작의 분노는 비숑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작전에 참여했던 장교들도 책임이 없지는 않을 터. 모두 구속하고, 처형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전면전을 준비하라. 왕세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
“예, 전하.”
신하들이 고개를 깊이 조아려 알렉스 공작의 명령을 받들었다.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알렉스 공작은 어전을 나서며 이를 악물었다.
‘내전만은 피하려 했건만.’
내전은 전쟁의 형태 중 단연코 최악이었다.
국력을 갉아먹는 괴물이라고나 할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전쟁.
상처뿐인 승리.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
승리한다 한들 나라 꼴이 초토화되어 있으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로샨 왕국을 맨입에 꿀꺽 삼킬 수도 있었던 알렉스 공작의 입장에서, 왕세자를 놓친 건 너무나도 뼈아픈 실패였다.
게다가 펠튼 요새 주둔 중인 1군단의 전력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수준이라, 전쟁이 벌어지면 알렉스 공작으로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걸 감수해야만 했다.
‘오늘 밤은 못 자겠군.’
왕세자만 생포했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위에 올랐을 테니, 잠이 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
알렉스 공작은 독한 위스키를 들이켜며 밤을 지새웠다.
왕세자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 * *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카미유는 오토가 아침밥을 먹으며 실실 웃는 걸 보고 물었다.
또 뭔 악랄한 생각을 하는 건지….
“좋은 일? 있지.”
“살아남은 게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 그건 당연히 좋지. 하하… 하하하….”
카미유의 뼈 있는 말에 오토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진짜 뒈질 뻔했다고. 으으.’
오토는 어젯밤 벌어졌던 추격전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지난 1주일 동안 반란군을 따돌리느라 개 같이 구른 카미유의 분노는 엄청났고, 그건 고스란히 오토에게 되돌아왔다.
‘이 뺀질이… 죽인다….’
‘이, 일단 진정하고 우리 대화로 원만하게….’
‘죽어.’
‘으아아아악! 기사가 왕 죽인다! 으아아아아악!’
분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작전을 수행하느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오토를 집요하게 뒤쫓아 왔을 정도.
‘겨우 살았네.’
만약 도망치는 속도가 조금만 느렸다면, 꼬치가 꿰이듯 카미유의 검에 찔렸을 거라고 오토는 확신했다.
“그래서 왜 웃으신 겁니까? 제 손에 안 뒈지신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낄낄거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특별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 뭡니까.”
“알렉스 공작이 얼마나 빡쳤겠어?”
“…그거였습니까.”
“얼마나 아깝겠어~ 왕위를 꿀꺽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오토는 알렉스 공작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며 고소해했다.
“막 이성을 잃고 날뛰진 않았겠지만, 그냥은 절대로 안 넘어갔을 거야. 물론 여러 사람 목도 날아갔겠지.”
오토는 알렉스 공작이 비숑뿐 아니라 다른 장교들까지 처형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언컨대 이번 반란에서 왕세자를 체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기에, 알렉스 공작으로서도 분노를 다스리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분노에 희열을 느끼신다는 겁니까?”
“타인 아니고 적이거든?”
오토가 카미유의 말을 즉시 반박했다.
“내가 무슨 변태야? 타인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게?”
“아닙니까?”
“절대 아니거든?”
“흠.”
“뭔데? 그 표정?”
오토가 눈을 부라렸다.
“내가 진짜로 타인의 고통에 희열을 느끼는….”
그때.
“전하.”
마검사 카심이 오토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왕세자가 지금 즉시 회의에 참석해달랍니다.”
“그래요? 금방 간다고 전해주세요.”
오토는 카미유와의 실랑이를 그만두고,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안 가십니까?”
“밥은… 우물우물… 먹고… 쩝쩝… 가야지… 음… 이거 맛있네… 쩝쩝….”
“…….”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회의에 참석하는 것보다 배를 채우는 게 먼저인 오토였다.
* * *
“어서 오시오.”
루이블랑 왕세자는 회의에 참석한 오토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오토가 아니었다면 왕세자가 이곳 펠튼 요새에 도착했을 확률은 매우 희박했던 게 사실이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끼는 건 루이블랑 왕세자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들 인사하시오. 이쪽은 검은 여단의 케인 여단장이오. 케인 여단장이 없었다면 나는 반란군들의 손에 붙잡혔을 터. 케인 여단장이야말로 내 생명의 은인이오.”
왕세자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오토를 소개시켜주었다.
“케인 여단장. 이쪽은 우리 군의 사령관을 맡고 있는 로버트 백작이오.”
“말씀은 많이 들었소이다. 로버트 백작이오. 진압군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소.”
중년의 기사가 오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뛰어난 인물이지.’
로버트 백작은 오랜 세월 왕가에 충성을 바쳐온 인물로서, 뛰어난 기사이자 군인이었다.
괜히 로샨 왕국 최정예 부대인 제1군단의 군단장이 아닌 것이다.
“검은 여단의 케인입니다.”
“왕세자 전하를 구해주어 참으로 고맙소이다.”
“별말씀을….”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부탁이랄 게 있겠습니다. 저희 검은 여단은 그저 승하하신 선왕 전하의 의뢰를 수행할 뿐입니다.”
인사가 끝난 후.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오토는 왕세자가 이끄는 진압군 수뇌부가 되는 데 성공했다.
오토,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의 뛰어난 전투력에 매료된 왕세자가 적극적으로 등용한 것이다.
“우리의 전략은….”
그렇게 전략 회의가 이어지고.
‘으. 졸려. 언제 끝나.’
오토는 회의 내용을 듣는 둥 마는 둥 졸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어….’
식곤증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케인 여단장?”
그때.
“예?!”
오토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왕세자가 기대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뭐. 그게 그러니까….”
오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젠장. 못 들었네. 뭐라고 대답하지?’
사실 오토는 회의 내용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전략·전술은 오토가 딱히 끼어들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왕세자가 전략적으로 불리한 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알아서 팽팽하게 치고받고 싸우며 사이좋게 공멸하게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케인 여단장의 의견이 절실하오.”
“어….”
“의견을 부탁드리오.”
“예, 물론입니다. 제 의견은….”
한참을 고민한 결과.
‘에라, 모르겠다.’
오토는 졸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대신, 일단 아무거나 때려 맞춰보기로 했다.
“저희 검은 여단이 야간에 적들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고, 중요한 전투 전에 정보를 수집하는 등 특수한 임무를 맡겠습니다. 또한, 적들을 교란시켜서 우리 군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오토의 말이 끝난 후.
“…….”
“…….”
“…….”
왕세자를 포함한 수뇌부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X됐다.’
오토는 자신이 동문서답을 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짤리는 거 아냐? 그럼 골치 아파지는데… 아침 적당히 먹을걸….’
수뇌부에서 퇴출당하면 목표 달성이 힘들어지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케인 여단장.”
왕세자가 오토에게 말했다.
“네….”
“정말 훌륭하오.”
“예?”
“그대가 나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구려.”
왕세자가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어!”
“저런 패기라니!”
회의에 참석한 수뇌부들 역시 매우 감동한 듯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일 텐데, 가능하겠소?”
“가능할 것 같으니까 말씀을 드렸겠죠?”
“오오오!”
왕세자가 오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그대와 그대의 부하들이 보여준 전투력을 결코 잊을 수가 없소이다. 그런 그대가 가능하다고 말하니, 내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소?”
“하하… 하하하하….”
오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말이오.”
왕세자가 오토에게 부탁했다.
“혹시 다른 의뢰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소?”
“말씀하십시오.”
“이오타 놈들 말이오.”
“아, 이오타?”
“최근 성장세가 무섭소. 아버님께서 승하하시기 전에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더는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우리가 내전을 겪는 동안 그놈들이 얼마나 더 성장할지 두렵소.”
“하지만 지금은 이오타를 정벌하실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오타… 아직은 왕국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세력이지만…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란 놈을 먼저 처리해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