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어쭈, 이것 봐라?’
가면 속 오토의 진짜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나한테 나를 죽여 달라고 하네?’
기분이 묘했다.
살면서 자신에 대한 청부 의뢰를 받을 날이 또 있을까?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
오토가 흥미롭다는 듯 되뇌며 왕세자에게 물었다.
“그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벌써 신경 쓰십니까?”
“결코 만만히 볼 놈이 아니오.”
왕세자가 대답했다.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수완이 상당한 인물이오. 불과 몇 개월 만에 서쪽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지 않았소?”
“음.”
“지금이야 코딱지만 한 약소국의 왕이지만, 본국이 내전을 겪는 틈을 타 크게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오?”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합니다만….”
“게다가 내전이 벌어진 이상, 본국의 국력은 앞으로 크게 약화될 것이오.”
왕세자의 예측은 옳았다.
어느 쪽이 이기든 앞으로 로샨 왕국의 국력은 크게 약해질 예정이었다.
최악의 경우 군사력의 70퍼센트 이상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국이 약해진 틈을 타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침공해온다면…. 그땐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오. 내가 알렉스 저 역적 놈을 무찌르고 왕위를 되찾는다 한들, 이오타 놈들의 침략으로 본국이 멸망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라고 말했지만 오토는 속으로 뜨끔! 했다.
‘이놈 이거 눈치 빠른 거 보소?’
지금 왕세자는 오토의 계획을 아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물론 코앞의 인물이 오토란 사실은 꿈에도 모를 테지만….
“나는 싹을 자르고 싶소. 훗날 내 왕국을 위협할 세력의 우두머리를 미리 제거하고 싶은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나는 지금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제거하고, 숙부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왕위에 오를 것이오.”
“그다음엔 어찌하실 겁니까?”
“당연히 우두머리를 잃은 이오타를 침공할 것이오.”
“오오?”
“그럼 우리 로샨 왕국이 이 지역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셈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로샨 왕국은 변방의 약소국을 벗어나 강대국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겠지.”
왕세자의 야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대륙의 서쪽 변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아가 동쪽으로 진출해 강대국이 되겠다.
오토의 계획과 완전히 똑같았다.
왕세자도 결코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소? 내 계획이?”
“아주 현명하십니다.”
“도와줄 수 있겠소?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내 결코 섭섭지 않게 보답할 것이오.”
“그야….”
오토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가면에 가려져서 웃는 얼굴이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물론입니다. 왕세자 전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오오! 고맙소.”
“별말씀을….”
“그럼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죽여주시는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곤잘레스 그 악독하고 집요한 놈을 보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암살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예, 죽여 드리죠.
후후후.
“고맙소! 정말 고맙소!”
왕세자는 오토의 손을 덥석 붙들고 고마워했다.
정작 코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죽여 달라고 청부했던 오토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 * *
회의가 끝난 후.
“뭐랍니까?”
카미유가 숙소로 돌아온 오토에게 물었다.
“별 건 아니고. 앞으로도 좀 도와 달래. 잘 부탁한다는데?”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나 좀 죽여줘야겠어. 왕세자가….”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즉시 검 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다.
“야 이!”
오토는 카미유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으려는 걸 보고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죽여 달라고 바로 검부터 뽑냐! 한국말은… 아니 얘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할 거 아냐!”
“그저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만?”
“내가 미쳤어? 진짜로 죽여 달라고 하게?”
“아닙니까?”
“아니야!!!”
카미유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뭐야? 그 표정은? 아쉬워하는 거 같은데?”
“그렇게 보입니까?”
“어. 완전.”
“기분 탓입니다.”
카미유가 딱 잘라 말했다.
“아무튼, 뭡니까? 그 매력적인… 아니. 이상한 명령은.”
카미유는 살짝 본심이 튀어나온 걸 애써 뭉개고는, 오토에게 물었다.
“왕세자가 날 죽여 달래.”
“예…?”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죽여 달래. 훗날에 대비해서.”
“왕세자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었습니까?”
“뭐어? 괜찮은 사라아아암?”
오토가 눈을 부라렸다.
“방금 그 발언 상당히 불순하네?”
“오해십니다.”
“뭐가 오해인데?”
“전 어디까지나 왕세자가 미래를 내다보는 전략적 시각이 뛰어나다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정말로?”
“왕세자에게 있어 전하는 상당히 위협적인 적입니다. 그런 적이 더 성장하기 전에 미리 제거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오토가 미심쩍다는 듯 뱀눈을 뜨고 카미유를 노려보았다.
“…….”
카미유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오토를 바라보았다.
“앓느니 내가 죽지, 죽어.”
오토는 카미유의 표정 연기가 워낙에 훌륭해서, 갈구기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아무리 계급이 깡패라고 한들 저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면서 발뺌을 하는데, 더 갈굴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죽여 달라니까 죽여 줘야지. 오히려 좋아.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죽었단 소식이 들리면, 왕세자가 날 더 신뢰하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가서 와지르 대공한테 얘기 좀 전해줘. 그럼 그 양반이 알아서 처리해주실 테니까.”
“예.”
오토의 명령을 받은 카미유는 즉시 펠튼 요새를 떠나 이오타 왕국으로 향했다.
* * *
알렉스 공작이 이끄는 반란군.
그리고 루이블랑 왕세자가 이끄는 진압군.
두 세력의 군대는 거의 비슷한 시간에 주둔지를 떠나 서로를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압군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왕위를 거머쥐기 위한 내전에 돌입한 것이다.
한편, 왕세자가 이끄는 진압군 지휘부는 고민이 많았다.
막사 안.
“지형이 너무나도 불리하오.”
루이블랑 왕세자는 저녁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지도를 들여다보며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사옵니다.”
로버트 백작이 왕세자의 물음에 답했다.
“아무리 행군 속도를 높인다 한들, 반란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는 걸 막을 순 없사옵니다.”
“그럼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이까? 우리 군이 너무 불리하지 않소?”
왕세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도 상황은 꽤 답답했다.
제1군단은 로샨 왕국의 최정예 부대인 만큼 전투력 하나는 기가 막혔지만, 문제는 보급과 지형이었다.
현재 제1군단에는 딱 한 달 치 식량과 보급품밖에 없어서,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지형도 좋지 않아서, 먼저 공격했다간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반대로, 진압군은 지형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게다가 수도를 장악한 덕분에 식량이나 각종 보급품들을 안정적으로 보급받을 수 있었다.
즉, 버티면서 시간을 끌기만 해도 매우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나가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답답하겠지.’
오토는 조용히 왕세자와 로버트 백작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여기 이 캐니언 능선을 뚫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소. 정말이지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거요. 무리를 해서라도 캐니언 능선만은 우리 점령해야 하오.”
“하오나 점령에 성공한다 한들, 큰 피해를 입는 걸 피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럼 어떻게 하오? 이대로라면 우리는 말라 죽게 될 것이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소?”
“그것은….”
제아무리 백전노장의 지휘관인 로버트 백작이라 할지라도, 지금 상황에서 캐니언 능선을 뚝딱 점령할 방법을 내놓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못 참고 꼬라박으려고 하겠지?’
오토는 왕세자의 다음 행동 패턴을 예상해보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캐니언 능선을 손에 넣어야 하오. 그래야 이 전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터이니.”
과연 오토의 예상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모 아니면 도. 병력 다 꼬라박고 개 같이 멸망하던지. 아니면 어떻게 어떻게 운 좋게 능선을 점령하던지.’
오토의 경험상 왕세자가 캐니언 능선을 점령할 확률은 20퍼센트 정도.
‘문제는 성공한다고 해도 병력 손실이 너무 크다는 거지.’
오토가 예상하기에, 점령에 성공한다 한들 왕세자는 가진 병력의 3분의 1 이상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전쟁이 더욱 어려워질 테고, 결국엔 알렉스 공작의 승리로 내전이 빠르게 마무리될 터.
그럼 이오타 왕국도 끝장이었다.
왕세자와 마찬가지로, 알렉스 공작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오타 왕국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하,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때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법이오. 로버트 백작. 그대도 알지 않소. 캐니언 능선을 점령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
“난 이미 결정을 내렸소. 캐니언 능선을 공격할 것이오.”
그때.
“제가 해보겠습니다.”
오토가 나섰다.
‘여기선 도와줘야지.’
캐니언 능선을 점령하게만 도와주면, 루이블랑 왕세자와 알렉스 공작은 개싸움을 벌이며 소모전을 펼치게 된다.
즉, 오토가 가진 목적의 반 이상은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제가 캐니언 능선을 점령해보겠습니다.”
“그, 그게 가능하겠소이까?”
왕세자는 오토의 발언을 믿을 수가 없었다.
캐니언 능선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거의 1만에 가까운 반란군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곳을 점령해보겠다니….
“일단 캐니언 능선 근처로 군대를 이동시켜 주십시오.”
“그 뒤에는 어찌하면 되겠소?”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기다리라?”
“예.”
“그게 무슨 소리요? 부디 자세히 설명을 해보시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오토는 그 말을 남기고 즉시 지휘부 막사를 나섰다.
* * *
3일 후.
왕세자가 이끄는 진압군이 캐니언 능선 근처에 도착했다.
“진압군 병력들이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대기하죠.”
오토는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들을 이끌고 캐니언 능선 주변에 숨어 있다가, 카심의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갑시다.”
오토는 마검사들을 이끌고 캐니언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캐니언 능선은 이미 반란군들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라서, 주변에는 많은 수의 반란군 정찰병들이 돌아다니며 정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놀랄 건 없었다.
왕세자의 군대가 능선 주변으로 모여들었으니, 공격에 대비해 정찰 활동이 활발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조용히 지나치죠.”
<투시> 스킬을 켠 오토와 야간투시경을 착용한 마검사들은, 그 많은 정찰병들은 너무나도 쉽게 지나쳐 반란군 진영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그게 <투시> 스킬의 무서운 점이었다.
직접적인 전투에서는 큰 도움은 되지 않아도, 밤에는 전술적으로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보인다.’
<투시> 스킬을 켠 오토는 반란군 진영에 설치되어 있는 군용 텐트들의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덕분에 오토 일행은 군용 텐트들을 엄폐물 삼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순찰 중인 야간 경비병들도 모조리 피해갔다.
“여기서 복장 한 번 갈아입고 갑시다.”
오토와 마검사들은 건조를 위해 널어놓은 반란군 군복을 훔쳐 입고, 즉시 지휘부 역할을 하는 텐트로 향했다.